백지영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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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영은 강하다. 그건 약점과 실수까지 솔직하게 드러내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갖는 종류의 부드러운 강함이다.

검정 퍼 재킷은 Michael Kors, 브라톱은 Vina J, 레이저 커팅된 귀고리는 Missgee Collection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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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함께 촬영한 게 다지만, 감정이 겉으로 투명하게 드러나는 사람으로 보인다.
담아두지 않고 다 표현하는 편이다.

그런 것 때문에 불편한 점도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사랑의 리퀘스트>에서는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기들 사연을 보고 우느라 생방송에서 노래를 못 부르기도 했다. 감정을 표현해도 상관없을 때는 괜찮지만, 연예인이라 내 사생활이나 스토리가 알려지다 보니까 곤란할 때가 있다. 방송에서 눈물을 보일 때도 저 사람은 지금 무엇 때문에 울 거라고 넘겨짚는다거나 말이다. 어떻게 보고 해석하는지는 보는 분들의 마음이고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문제지만 억지스럽게 내 사연을 짐작하는 상황이 될 때는 난처하다. 정말 그 사연 자체가 슬퍼서 울었는데, 내 문제로 추측하더라.

자기 자신의 문제가 아니지만 슬퍼할 수 있는 게 사람일 거다.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한 공감 능력이 인지상정이라는 거고.
나 같은 경우는 가사도 내가 쓰면 잘 와닿지 않는다. 나에게 벌어진 사실 안에서 단어를 골라 쓰면 상상할 여지가 별로 없다. 하지만 남이 주는 가사를 받으면 그 사람의 진짜 스토리가 어쨌건 가사 안에서 다양한 상상이 가능하다. 내가 당하는 슬픈 일은 그다지 슬프지 않은데 남이 겪은 스토리가 나에게는 훨씬 더 진하게 증폭된다. 슬픔도, 기쁨도.

‘총 맞은 것처럼’을 부를 때, 이별의 상황을 설정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가사에 대한 상상이 굉장히 구체적이었다.
나는 발라드 가수다. 발라드는 크게 보면 이별, 기다림, 잊지 못하는 사랑, 그리움… 이런 감정을 다룬다. 몇 안 되는 테마 안에서 여러 곡을 불러야 하다 보니까 감정 몰입이 힘들 때가 있다. ‘총 맞은 것처럼’같이 묘사적인 가사의 경우 상황을 설정해보면 다른 노래가 된다, 나한테는. 내 안에서 드라마를 만들고 이미지를 그려볼 때 나로 인해서 노래가 풍성해진다.

감정을 절절하게 토해내는 창법이 당신의 특징인데, 최근 싱글인 ‘여전히 뜨겁게’는 아주 담담하게 부르더라. 의도적으로 노래 부르는 방식에 변화를 줬나?
감정이나 창법을 좀 다르게 가져가보자는 생각은 있었다. 나이 들어 가는 건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내 나이에 맞는 감성을 갖는다는 건 나만의 특권이다. ‘여전히 뜨겁게’는 그런 면에서 나에게 합당한 노래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노래에서 그리워하는 대상은 자신의 지나간 옛 감정이다. 누구와 헤어진 후에 여전히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뜨겁게 사랑한다는 게 아니라, 한때 그러던 내 감정 자체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다. 내 나이 무렵의 사람에게는 가장 그리운 대상이 사람보다도 어떤 시절일 수 있다. 사회 생활을 오래 하며 감정에 대해 솔직하지 못한 세월을 살아봤다면 그 노래의 담담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녹음하는 당시에는 노래 부르면서 감정의 포화를 느끼고 터뜨리기보다는 차분하게 따뜻했다. ‘여전히 뜨겁게’는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나에게 큰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발라드를 계속 부르며 비슷해지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걸 경계한다고 했는데, 이 노래가 그런 결과물이라 볼 수 있을까?
결과물이라기보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그걸로 인해 보인 것 같다.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으니까 변화해야 한다는 압박은 없지만, 섞이긴 해야 할 것 같다. 섞였을 때 내가 조금 더 좋았던 것 같다. 그 ‘섞이는’ 기획에 대한 고민이 많을 것 같다. 아이돌 위주의 가요 시장에서의 전략도 그렇고. 내가 아주 잘됐을 때, 대중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을 때의 시점을 생각해보면 의도하지 않았을 때가 대부분이더라. 흐르는 건 흐르는 대로 놔두는 게 맞는 것 같다. 아이돌 위주의 음원 시장, 무대, 방송… 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90년대를 보면 갑자기 힙합 바람이 불었을 때가 있고 트로트 바람이 불었던 때도 있다. 그러다 테크노, 댄스, 발라드 붐이 다 지나갔다. 지금은 아이돌이 대세고. 흐름을 바꾸는 건 내 능력으로는 안 되는 것 같다. 다만 그 안에서 OST라는 콘텐츠를 내가 운명적으로 우연히 만난 것처럼 뭔가를 열심히 하다 보면 그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더딜지언정 일하면서 기다리면 어떤 흐름을 탈 수 있는 때가 분명히 온다.

오래 한 분야에서 일한 사람에게서는 경험적 지혜가 느껴지는데 당신도 그런 것 같다.
데뷔 15년 됐다고 사람들은 놀라워하지만 앞으로 나는 20년, 30년을 맞고 싶은 가수다. 지금의 확신에 대해서도 나중에 돌이켜보면 내가 틀렸다고 깨달을 때가 분명 올 거다. 내가 맞다고 생각해서 가는 길은 진실로 옳아서라기보다 지금은 그렇게 가는 게 나에게 어울리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더 성숙한 날이 또 올 거다.

이너로 입은 보디수트는 Zara, 검은 뷔스띠에는 Agent Provocateur, 스터드가 박힌 스타킹은 Wolford, 검은 귀고리는 Minetani, 오른팔의 뱅글은 EddieBorgo by 10 Corso Como, 나사 모양의 뱅글은 Viatory, 반지는 Jewel County, 왼쪽 팔에 한 손 모양의 뱅글은 Bernard Delettrez by 10 Corso Como, 골드 뱅글과 반지는 모두 Jewel County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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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솔로 가수들이 많이 줄어서 외롭지 않나?
외롭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룹에서 솔로로 잠깐 활동하는 여자 가수들이 꽤 많다. 팀으로 뭉쳤을 땐 힘이 좋은 가수들인데 혼자 있으니 무대가 비어 보이더라. 그룹 감, 솔로 감이 따로 있다기보다 익숙함 같다. 누구나 팀에 속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 내가 모자라는 건 다른 멤버가 채워주니까, 그 무대는 훨씬 돋보일 거다. 그런데 솔로의 무대란 건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나에게 사람들이 집중하게 만들어야 한다. 본인이 아무리 강해도 많이 해보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요즘 아이돌들은 그걸 경험할 기회가 없다. 솔로 스코어가 안 좋았다고 결과만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제작자들이 두세 번 아티스트를 믿고 투자하는 마인드를 가져주셨으면 하고 바란다.

스스로는 후배 양성에 뜻은 없나?
내가 심사위원을 한 <보이스 코리아> 시즌 1에서 1등한 성은이란 친구를 우리 회사로 데려와서 앨범 제작을 해봤다. 그런데 보컬리스트로서의 내 활동과 그 친구를 서포트하고 디렉팅하는 일은 공존이 안 되더라. 신인이니 무대에서 압도하는 힘을 채워주려고 여러 가지를 시도했는데, 제작이나 양성보다 노하우 전수 개념이 맞을 것 같더라. 우선 내가 소모되는 느낌이 있고, 나와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 가수에게 아이디어를 주면서 그 아이디어와 어울리지 않는 문제도 발생했다.

그런 면에서는 박진영이 신기한 사람이다.
진영 오빠는 머리나 감성이 여러 개인 사람 같다. 자기 건 자기 것대로, 애들 건 애들 것대로 잘하는 게 참 신기하다. 전 세계를 통틀어 아티스트, 제작자, 행복한 가정, 이 세 가지를 완벽하게 성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 하나는 포기해야 둘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고. 그 얘기 듣고 나라면 뭘 포기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하나를 뺀다면 나는 뭘 버려야 할까…. 가족은 반드시 지켜야 할 독보적인 영역이니까, 나머지 둘 중에 접는다면? 하지만 후배 양성이란 걸 조금이나마 경험해보니 굉장히 매력적이더라. 내가 뭔가 원한 걸 그 친구가 해냈을 때, 내 스스로 해내서 얻는 만족과는 다른 카타르시스가 있다. 그 부분도 욕심이 난다. 평생 배우고 경험해볼 것이 너무 많으니 오래 살아야 한다(웃음).

평생을 얘기하지만 요즘이야말로 당신은 전성기를 누리는 것 같다. 일과 사랑을 다 이뤘다.
약간… 그렇게들 보시는 것 같다(웃음).

스스로도 지금에 만족하나?
이 정도에 만족 못하면 너무 욕심 많은 사람일 거다. 내 인생에 있어서 평온한 느낌을 가장 오래 갖고 있는 순간이 요즘인 것 같다. 자갈밭이 아니고 따뜻한 모래 깔린 길을 걸어가는 느낌이다.

본인이 성공한 동력이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나?
예민하지 않은 거. 섬세한 거랑 예민한 건 좀 다른데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참 눈치가 없고 둔하다. 그게 오랫동안 가수 활동을 할 수 있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성공도 실패도 인생에 계속해서 오는 고비다. 그런 고비마다 내가 예민했다면 영향을 많이 받았을 텐데 둔감한 편이라 크게 반응하지 않고 꾸준히 온 느낌이다. 되돌아보면 내 감정으로 울고 웃는 일 외에 일의 결과를 가지고는 아주 크게 웃거나 운 적이 없다. 일이 잘될 때도 잘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담담했다.

일희일비하지 않았다는 얘기 같다.
성공했을 때 너무 크게 도취되는 게 가장 위험하지 싶다. 내가 나한테 놓는 큰 덫이다. 실패보다 오히려 성공했을 때의 도취로 인해 망가지면 그건 되돌릴 수 없다.

몇 년 뒤 마흔이란 나이에 대해 의식하나? 여자한테 마흔이란 건 서른과는 또 다른 의미인데.
서른은 됐는지도 모른 채 넘겼는데 내년이면 불혹의 나이가 된다는 건 인식하고 싶지 않더라. 여자에게 마흔은 여자에서 어머니로, 아줌마로 넘어가는 단계 같아서. 30대까지는 충분히 여자답고 매력 있을 수 있는데 4자를 앞에 다는 순간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내년이 돼봐야 알 것 같다.

가수니까, 해가 갈수록 넓어지는 경험과 감수성으로 어떤 감정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다는 건 강점일 것 같다.
그런 면에서는 나이 먹는다는 것의 긍정적인 면이 있다.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노래 잘 부르는 친구들이 정말 많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당장 내일 서른아홉, 마흔이 가질 수 있는 감성을 갖고 싶다고 가져지는 건 아니지 않나. “너희들이 노래를 참 잘하지만, 부족한 2%가 있어. 나랑 비교해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그래. 그건 시간이 자연스럽게 채워줄 거야” 이렇게 생각한다. 산뜻하고 풋풋한 어린 친구들이 그 시간 동안 잘 견뎌야 할 텐데, 싶다.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될 텐데 그걸 자기 인생의 히스토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난, 역경, 극복해야 할 풍랑 같은 것으로 여기면 힘들 거다. 어떻게든 지내고 나서 봤더니 그건 치열하게 싸워 이기고 지고하는 문제가 아니더라. 조금 무심하게 예민하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흘러가야지 그거랑 싸워서 ‘이기리라’ 하면 인생이 피곤해지는 거다. 물론 그런 마음을 가져야 인생이 더 사는 것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살아봤더니 나에게는 그렇지는 않았다. 어린 친구들 보면 열정적이되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복잡미묘한 생각이 든다.

복잡미묘하다는 건 어떤 점에선가?
가수 발굴 프로그램이 늘어나면서 준연예인이 많아졌다. 얼굴이 알려지고 회자되는데 막상 이름이 팔린 만큼의 성공은 못한 경우가 많은 거다. 자신이 거기서 벗어나야 하는데 남들의 작은 반응도 크게 받아들이면서 인생이 불행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가끔이지만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도 있는데, 상처받더라도 얘기해주는 편이다. 너는 직업이 노래 부르는 사람일 뿐이니 연예인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고.

데뷔했다가 금세 사라지는 아이돌 출신도 많다.
감성적으로 풍부하고, 자유롭게 자신을 발산해야 하는 나이에 그러지 못한다는 게 안쓰러운 일이다. 얼마 전 베트남의 신인 발굴 프로그램에 한국 심사위원으로 갔는데 연습생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높이 평가하고 있더라. 자긍심을 느끼고 뿌듯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시스템도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수를 키워내는 데는 효율적이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의 부작용에 대한 준비가 없는 것 같다. 두통약을 먹어도 주의사항이 있듯이 연습생 출신의 아이들이 다른 인생을 선택할 때도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가 더 생겼으면 좋겠다.

연예인의 화려한 삶을 동경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지금의 연예인은 사람들에게, 가수라면 노래, 배우라면 연기가 아니라 그 신분 자체가 목표가 된 것 같다. 아이들에게조차 꿈이 아니라 사업이 됐는데, 그런 의도로 도전하면 잘못될 확률이 굉장히 높다.

‘내 귀에 캔디’가 무척 잘됐기 때문에 그런 댄스 컬래버레이션도 염두에 둘 것 같다.
나에게 업템포는 힐링되는 장르다. 빠른 리듬의 노래를 하면서 몸을 움직이고 땀을 내는 게 좋다. 트렌드를 잘 읽는 댄서들에게서 많은 걸 배울 수 있기도 하다. 거울로 내 몸을 보고 춤추는 것 자체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노화 방지에 좋은 것 같다. 놓을 수 없는 나만의 욕심이라면 욕심이다. 아주 각잡고 세게 춤을 추지 않아도 카일리 미노그나 셰어 같은 언니들은 자기만의 댄스 뮤직 콘텐츠를 갖고 있다. 나 역시 결혼도 했고 앞으로 아이도 낳을 거지만 나만 할 수 있는 그런 류의 업템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늘 있다(옆에서 글로리아 에스테반의 ‘콩가’를 이야기하자). 그것도 될 수 있지. 트렌드라는 건 돌고 도니까. 흐름을 타는 순간이 오면 순간 트렌드세터가 되어 있는 거다.

보디수트는 Vina J, 검정 와이드 팬츠는 Michael Kors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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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낳고 나서도 쭉 댄스 음악 하면 멋질 것 같다.
나는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보는 사람들은 어떨까(웃음)? 좋은 노래만 나와주면 창피한 생각이나 망설임 없이 할 텐데, 댄스는 수익이 나든 안 나든 간에 귀에 싹 들어오면 안 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내 귀에 캔디’만큼 귀에 확 들어오는 곡을 못 만났다. 그 곡은 가이드 보컬을 듣자마자 랩 음색이 귀에 익어서 누구 목소리인지 찾았다. 그게 택연이었고. 이쪽 일 하다 보면 열심히 노력해서 잘되는 경우도 물론 많지만 메가히트라는 건 하늘에서 주는 것 같다. 시기도 음악도 마음가짐도… 여러 가지 설명할 수 없는 박자가 맞아야 빅 히트가 나온다.

그렇다면 마음을 비우게 되는 면도 있겠다.
노력만으로 되지 않지만, 노력 없이도 안 된다. 그 곡이 그냥 나에게 와주진 않으니까. 나는 보컬리스트지 싱어송라이터가 아니라서 작곡가들에게 늘 주의를 기울인다. 그 당시 유독 방시혁 씨 노래가 좋게 들리더라. 밑도 끝도 없이 우선 찾아 가서 이번 타이틀을 어떻게든 같이 작업하고 싶으니까 날 생각하며 곡을 써달라고 했다. 그때 같이 재밌게 얘기하면서 작업한 게 ‘내 귀에 캔디’랑 ‘총 맞은 것처럼’이었다. 시혁이 오빠는 그때 뭔가 씌어서 신내림 받은 것 같았다. 나는 ‘총’이라는 글자가 싫어서 그것만이라도 빼자 그랬다. 이 노래 이전의 발라드는 무조건 아름답고 서정적인 거였고, 도입부 첫 가사부터 총으로 시작하는 걸 못 받아들이겠더라. 그런데 오빠가 한 번만 자길 믿고 가달라고 해서 설득당했다. 이런 프로세스를 생각해봐도 히트곡에는 운명적인 요소가 작용한다.

요즘은 그런 식으로 같이 일하고 싶은 작곡가가 있나?
작곡가는 아니고 싱어송라이터인데, 자이언티. 재밌는게 조만간 나올 거다.

김제동이 ‘백지영 노래는 세파에 찌들어서 소주 한잔하는 느낌’이라고 한 적이 있다.
지금 내 성격 보시면 알겠지만(웃음), 공공장소에서도 모자와 선글라스로 가리고 다니지 않는다. 그러기 시작하면 내가 어느 순간 어색해져서 사람들과 섞일 수가 없다. 만약 내가 칭칭 감고 다니고 차 안에만 숨으며 데이트도 그렇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지금 못 살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들도 나에게 말 거는 걸 편안하게 생각한다. 연예인이라고 뒤에서 수군대고 그러지 않고 와서 말 걸고 알아봐주시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다. 나라는 사람의 팬이라기보다 내 노래를 좋아해준다는 거다. 가수로서 아, 이 사람은 내 노래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는 순간 보람이 있다. 그런 분들을 생활 속에서 마주치고, 그분들의 생활 속에 내 노래가 있다는 걸 발견할 때 행복하다. 앞으로도 계속 그랬으면 좋겠다.

어릴 땐 허스키하고 성숙한 음색이 불만일 수도 있었겠다.
딱히 생각해본 적 없다. 장난 삼아서도 내가 갖고 있는 목소리에 불만을 얘기한 적은 없다.

아까 얘기한 ‘둔한’ 성격 덕분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다행히 허스키함에도 불구하고 음역대가 높은 편이라 그런 면은 장점일 수도 있고.

힘든 시기가 있었던 사람이지만 결국 당당하게 살아남은 건 실력 덕분이란 생각이 든다. 백지영이 노래 잘하는 건 누구도 시비 못 거니까.
그건 정말 내 마음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웃음). 나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순간도 없다. 심지어는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받아서 대답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보통 인터뷰를 하면 노래를 잘하는 가수라는 전제하에 다른 질문을 하니까.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이 주어졌다. 아시다시피 나는 테크닉보다 감성 위주의 보컬이기 때문에 감정이 무너지면 음정도, 갖고 있는 스킬도 무너지기 쉽다. 그래서 시스템적으로 몰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노래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노래에 대한 연습이나 감정 몰입이 충분히 훈련돼 있지 않으면 시도조차 못한다. 친구들이랑 노래방에 가도 원래 내가 했고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노래 아니면 잘 못 부른다. 요즘 연습생들은 툭 치면 레퍼토리가 나올 정도로 춤 연습, 노래 연습을 하지만 나는 그런 세대가 아니었으니까. 내 무대가 좋았다고 말씀하는 분들에게 어떤 무대냐고 물어보면 그날은 정말 내가 그 무대에 몰입했던 순간들이다. 관객의 귀가 얼마나 예민한지 느끼는 순간이다.

본인 실력에 대해 상당히 냉정한 편인가 보다.
냉정할 수 밖에 없다. 그때그때 불안함을 적나라하게 느끼니까.

결혼 안 했으면 지금 어땠을까?
싱글 친구들 만나고, 술 마시고 그러지 않을까?

결혼하고 나서 달라진 점은?
행복한 순간이 많아졌다. 의지할 사람이 생기니까 확실히 강단은 많이 없어졌고. 사회 생활 하다 보면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하니까 강한 척도 하고, 사람들이 바라보는 내 이미지도 같이 세지는데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좋다.

지금의 편안한 상황이 노래에도 영향을 주나?
그렇진 않다. 아까 말한 것처럼 내 상황에서 몰입하기보다 이미지를 떠올려 노래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남편이 아홉 살 어리다. 연하 남자랑 지혜롭게 사는 노하우가 있나?
내 머릿속에서 내가 나이가 많다는 생각을 없애야 된다. 그걸 내가 인지하는 순간 트러블이 생기는 것 같다.

우선 사귀는 것부터가 가능하려면 그걸 인지하지 않게 만드는 연하 남자여야 하는 거 아닌가? 나이 차에 대해 의식하지 않게 만드는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건 맞지만 관계라는 건 어느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잘해서 되는 게 절대 아니다.나이 많은 여자와 나이 어린 남자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건 난 대체로 연상 쪽에 있다고 생각한다. 연상 쪽에서 나이에 대한 부담을 안 가지면 연하는 사실 잘 못 느낀다. 연애와 결혼 기간 합치면 4년 좀 넘었는데 ‘나이가 많으니까 뭔가를 해야 할 거 같다’라고 생각했을 때 내가 약간… 무리하게 됐던 거 같다(웃음). 거꾸로 연하인 남자가 ‘내 나이가 어리니까 뭔가 해야지’ 하는 법은 적다. 어쨌거나 같은 공간에 있고 많은 걸 공유하는데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서로 사랑하는 데 나이가 참견해야 할 일이 별로 없다.

이제 다음 목표가 있다면?
가수 생활 오래 하는 거.

그런 사람이 왜 토크쇼에서 은퇴 얘기를 했나?
그건 망언이었다, 인정한다(웃음). 결혼이 구체화되고 내가 가정을 가진다는 강박이 생기니까 약간 흑백논리에 빠졌다. “일과 가정 중에 택하라면 넌 뭘 택할래?” 하는 질문을, 아무도 묻지 않는데 스스로 던진 셈이었다. 사실 내가 1년 내내 해외 스케줄을 소화하는 일정도 아니고, 막상 결혼해보니 일과 가정이 서로를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일이 바쁠 때 오히려 남편에게 미안해서 잘하게 되고.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도 마음에 담으면 꼭 말을 해야 하는 스타일 같다.
좋은 거든 나쁜 거든 내 마음 안에 있는 걸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다. 품고 있질 못한다.

그래서 곤란해진 적도 있을 것 같다.
사실 그렇기도 하지만 생긴 대로 그냥 살기로 했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속상해하면서 넘어가고. 조금 심사숙고해야겠다는 생각은 한다. 아직 모자란 게 많다.

성격의 부족한 점을 배우자가 채워준다고들 한다. 당신의 경우 어떤 면에서 그런가?
남편은 모르는 것, 틀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이다. 왜곡하지 않고 판단 없이 뭔가를 바라보고 흡수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몰랐던 것, 틀린 것에 대해 인정하면 선선히 받아들여준다. 내 경우는 모르는 걸 들키기 싫어서 준비하는 성격이고.

하지만 당신만큼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사람도 드물 것 같다.
세상엔 재밌는 게 많다고 언제나 느낀다. 좋은 사람도 많고. 평생 가는 친구도 몇 명 있고.

요즘은 뭐가 재밌나?
골프. 승부욕이 강하고 급한 편인데 느긋해야 하는 운동이라서 좋다. 시간 제한은 없는 대신 18홀 안에 매번 고비가 온다. 그걸 넘어가는 희열이 있다. 몸을 많이 쓰는 운동은 아니지만 생각하는 방식, 생각이 내 몸을 지배하는 방식이 무척 액티브하다.

햇볕에 타서 자국도 생겼다.
스타일리스트는 질색을 하지만 나는 뿌듯하다. 내가 열심히 했다는 게 몸에 남은 거니까.

에디터
황선우
포토그래퍼
조선희
스탭
스타일리스트 / 한종완(factory83), 헤어 / 조영재, 메이크업 / 오미영, 어시스턴트 / 김유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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