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렐 윌리엄스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작곡가이자 퍼포머, 음악 프로듀서이자 디자이너이며 미술품 컬렉터인 동시에 모자 애호가다. 우르스 피셔와 알렉스 카츠, 두 사람의 현대미술가가 아트의 관점에서 이 흥미로운 존재를 재해석했다.

1월 26일 로스앤젤레스의 그래미 시상식에서, 41년의 일생 동안 거의 언제나 음악계의 센세이션이었던 퍼렐 윌리엄스는 인생을 바꾸는 드문 경험을 했다. ‘올해의 프로듀서’ 상을 포함해 그래미 상을 네 개나 탔지만 그날 밤이 퍼렐의 것이었던 이유는 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번 들으면 머릿속에서 끝없이 반복 재생되는 다프트펑크의 ‘겟 러키’, 로빈 시크의 ‘블러드 라인스’를 함께 만들었을 뿐 아니라, TV와 인터넷에 쉴 새 없이 등장하는 독특한 개인적 매력도 지니고 있다. 퍼렐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고 조금은 신비로운 이집트 고양이 같은 모습에, 긴 아몬드 모양의 눈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진지한 외모에 재미가 조금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모양이다. 그래미 시상식에서 그는 청바지, 그의 마른 몸에 딱 맞춘 빨간 가죽 아디다스 파이어버드 재킷, 늘 착용하는 코스튬 목걸이를 했다. 가짜 보석 대신에 옥과 커다란 진주를 넣은 금목걸이다. 머리에는 괴상한 마무리를 얹었다. 멋지게 낡은 갈색 펠트 모자였는데,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1982년에 디자인한 것이다. 우아하고 눈길을 사로잡으면서도 좀 기괴한 모자였다. 퍼렐의 대관식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왕관이랄까. 그 모자는 곧 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물건이 되었고, 그는 그 뒤로 늘 그 모자를 쓰고 다녔다. 이 모자는 한편으로 퍼렐의 음악, 스타일, 인생에 대한 철학을 상기시켜주는 근사한 매개물이기도 했다. 과거를 존중하되, 다른 요소를 첨가해서 조금 익숙하면서도 친근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자는 태도 말이다.

어린 시절을 보낸 버지니아 주 버지니아 비치에서 퍼렐은 드럼 신동으로 통했다. 그는 대단한 본능과 거침없는 호기심을 지녔다. 재능 있는 신인을 알아보는 눈도 뛰어나고(저스틴 팀버레이크가 보이 밴드 활동에 집중하던 시절 그는 이미 팀버레이크가 솔로 아티스트로 성공할 거라 집어냈다), 가스펠 코드 진행이 얼마나 귀에 쏙 들어오는지도 잘 안다(전염성 있는 넘버원 히트곡 ‘해피’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패션에도 비범한 능력을 보여, 자신의 의상 라인 빌리어네어 보이스 클럽(BBC)에서 80년대 비보이, 올드 스쿨 프레피, 아방가르드 일본 감각을 교묘하게 섞어낸다. 아트 컬렉터로서도 큰손이다. 그라피티 아티스트 KAWS부터 무라카미 다카시까지 아우르는 취향을 지녔다. 윌리엄스의 목표는 언제나 클래식하면서도 한 방이 있는 무엇이다. 룩이든 사운드든, 자신이 만들어낸 도저히 잊지 못할 요소가 들어가 있는, 무의식적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는 걸 만들려고 한다. “그 모자는 참 신기해요.” 그래미 시상식 후 3개월 뒤, 그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해피’ 리허설을 기다리며 내게 말했다. 때는 4월 초 목요일, 오전 11시 30분이다. 윌리엄스와 거의 전부 여성인 그의 팀(홍보 담당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수, 안무가), 그의 아름다운 아내 모델 헬렌 라시찬은 록펠러 센터의 NBC 스튜디오에서 무대를 향해 다닥 다닥 늘어놓은 의자에 앉아 있다. 윌리엄스는 앞에 ‘BILLIONAIRE BOYS CLUB’이라고 쓰인 회색 후드 티, 늘 하는 목걸이, 헐렁한 데님 팬츠를 입고 비비안 웨스트우드 모자의 짙은 황록색 버전을 쓰고 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현대미술관에서 매년 열리는 갈라 파티에 참석했다가 어젯밤 늦게 도착했다. 그 행사에서 비비 네모라는 억만장자가 ‘뻔뻔’스럽게도 웨스트우드 모자를 썼다. “난 다른 사람들이 퍼렐 모자를 쓰는 건 싫어요.” 라시찬은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기분 나빠했어요. 밤새도록 ‘왜 다른 사람이 퍼렐 모자를 쓰고 있지?’라는 말을 하더라구요.”

퍼렐이 그래미 시상식 때문에 그 모자를 산 것은 아니다. 사실, 그의 모자에 대한 관심이 폭발한 것은 인기에 대한 우화라 할 만하다. “5~6년 전에 구입한 모자예요.” 윌리엄스는 밴드가 사운드 체크를 하는 동안 내게 말한다. “내 친구인 로니 뉴하우스랑 런던에서 ‘월즈 엔드(World’s End)’라는 가게에 들어갔어요. 아내에게 줄 부츠를 사려고요. 로니(패션의 힘과 역사를 굉장히 잘 이해하고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가 ‘이건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디자인한 건데, 당시 남편이었던 말콤 맥라렌이 좋아했다’고 하더군요. 섹스 피스톨스의 매니저였던 그 사람 말이에요. 그날 모자를 두 개 샀어요. 얼마 뒤에 TV 인터뷰에 나갈 때 그중 하나를 쓰고 나갔고요, 그땐 모자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알아보는 사람이 없던데요.”

하지만 그때는 윌리엄스가 세상의 무대의 중심에 서기 전이다. 2013년까지는 그는 그웬 스테파니의 ‘홀러백 걸’ 같은 곡의 프로듀서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마돈나, 스눕독,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히트곡을 만들었지만 대중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인이라기보다는 컬트적 존재였다. 중학교 시절의 친구 두 명과 함께 만든 용감무쌍한 밴드 N.E.R.D.로 일찌감치 성공을 거두고 난 뒤, 그는 흥미로운 하이브리드로 자연스럽게 변신했다. 세련되고, 어떤 업종이나 문화에도 적응할 수 있는 학생이 되었다. 2006년에 솔로 앨범을 내긴 했지만 히트 싱글은 나오지 않았고 곧 잊혀졌다. “2013년 쯤엔 난 내 역할이 카무플라주 같은 것이라고 받아들였어요. 주인공이라기보단, 주인공 옆에 있는 사람이었죠. 경력을 쌓는 동안 난 늘 제이-Z나 저스틴 팀버레이크 같은 제왕 옆에 서 있었어요. 음악이든 미술이든 패션이든, 언제나 장인들에게서 배워왔어요. 하지만 2013년엔 달랐어요, 갑자기 이젠 난 더는 카무플라주가 아니게 됐죠.”

여기서 다시 은유가 될 만한 모자 이야기를 해보자. 그래미 시상식 불과 몇 주 전인 2013년 12월 말, 윌리엄스는 그 모자를 쓰고 TV 쇼 ‘뉴 이어스 로킹 이브’에 출연했다. ‘블러드 라인스’ 뮤직 비디오에도 직접 출연했고, 이어서 ‘겟 러키’를 히트시키기도 했지만 그는 그때까지도 끝없는 매혹의 원천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아무도 모자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새해가 되어도, 온라인에서든 어디서든 아무 말이 없더군요. 하지만 그때쯤엔 난 그 모자를 쓰는 게 익숙해졌어요. 딱 이거다 싶었어요. 상황이 변해가고 있었죠. 그리고 그래미 시상식에서도 쓰기로 했어요.”

갑자기 하룻밤 만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가 2013년에 만들었던 온 세상을 위한 사운드트랙을 사람들은 마침내 그 전체로 이해하며 즐기기 시작했다. 모자는 그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미 시상식 날에는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난 커리어를 마라톤같이 이어오는 걸로 행복했어요. 상은 기대하지도 않았죠. 특히 첫 상을 받고 백스테이지로 갔을 때, 내 매니저 중 하나가 내 모자의 트위터 계정이 생겼다고 해서 정말 놀랐죠. 쇼 중에 팬 한 명이 내 모자 이름으로 트윗을 시작한 거예요.” 퍼렐에 대한 세상의 열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모자와 마찬가지로, 발표 즉시 성공할 것 같던 곡인 ‘해피’도 곧바로 인기를 끌지는 않았다. 2013년 애니메이션 영화 <슈퍼배드 2>를 위해 쓴 곡으로, 그가 프로듀서 크리스 멜레단드리에게 열 번째로 제안한 곡이었다. 영화는 대성공을 거뒀지만 라디오에서는 아무도 ‘해피’를 틀지 않았다. 몇 달 후에 윌리엄스는 ‘해피’에 애니메이션 이상의 비주얼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윌리엄스과 그의 팀, ‘위 아프롬 L.A.’라는 이름의 감독들이 ‘해피의 24시간’을 만들어냈다. 세계 최초의 24시간짜리 뮤직 비디오인 이 영상에는 수백 명이 등장한다. 대부분은 LA에 사는 보통 사람들로, 곡에 맞춰 끝없이 춤을 춘다. 1시간마다 윌리엄스가 나타나 ‘해피’에 열광하는 새로운 사람을 등장시킨다. 이 비디오는 공개되자마자 바이럴로 마구 퍼졌다. <뉴욕 타임스>에서는 이 비디오를 ‘형벌 수준의 발랄함’이라고 했지만, 온라인에서 ‘해피’가 퍼진 것은 대중을 위한 전염성 있는 팝과 예술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는, 냉소를 싹 잠재우는 좋은 예였다.

‘해피’는 대히트를 거두며 오스카 상 후보에도 올랐다. 그가 3월 초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물론 그 모자를 쓰고) 공연했을 때, ‘해피’는 빌보드 톱 100에서 1위였다. 발표 당시 라디오에서 외면당한 노래가 이런 기록을 세운 것은 처음이었다. “‘해피’가 뜨고 나서, 등호(=)를 내 상징으로 삼아야겠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는 두 발을 내민다. 낡은 흰색 스탠 스미스 스니커의 왼발 끝부분에는 그가 녹색 유성 펜으로 그린 등호가 있다. 등호는 오른발의 노란 데이지꽃을 향하고 있다. “아디다스랑 새로 컬래버레이션하는 라인이 있어요. 이름은 ‘아디다스 = 퍼렐 윌리엄스’예요. 등호를 트레이드마크로 삼을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건 괜찮아요. 왜냐하면 ‘동등’한 거니까요. ‘해피’ 비디오는 동등함에 대한 거였어요. 내 음악은 동등함에 대한 음악이에요. 동등하다는 개념을 가까이한 결과 지금의 내가 있는 거고요.”
동등함을 강조하는 윌리엄스의 만트라는 진심이지만, 어쩌면 ‘블러드 라인스’의 가사 때문에 일었던 분노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다. 여러 평론가들은 ‘블러드 라인스’가 여성을 대상화한다고 생각했다. ‘너는 짐승이야’ 같은 대목, 그리고 노골적으로 섹슈얼한 비디오 때문에 상당히 논란이 일었고, 특히 2013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마일리 사이러스가 이 곡을 선정적으로 커버했을 때는 난리가 났다. ‘블러드 라인스’ 역시 히트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8개월 동안이나 잠잠하다가 뮤직 비디오가 화제가 되며 떴다. “‘블러드 라인스’는 특히 여자들을 춤추고 싶게 만들었어요. 랩 송의 리듬에 어떻게 맞춰야 할지 모르는 여자가 많다는 걸 난 깨달았거든요. 난 소울풀한 백인인 로빈 시크를 프로듀스하고 있었고, 함께 도전해볼 수 있겠다 생각했죠. 그 결과가 ‘블러드 라인스’예요.”

‘블러드 라인스’의 경험을 바탕으로, 윌리엄스는 자신의 중요 고객층, 즉 여성을 조금 더 신경 쓰게 되었다. 그의 새 솔로 앨범 은 모든 여성의 영혼에 바치는 앨범이다. 글자 사이를 띄어 쓴 것은 동등함의 의미를 담기 위해서다. “난 여성들의 힘을 전적으로 이해해요. 만약 여자들이 양손을 치켜들고 ‘이제 아이를 낳지 않겠어’라고 한다면, 여자들은 세상을 멈출 수도 있어요. 우린 여자들의 힘을 이해해야 해요. 내가 남성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평등해지자고요. 모자 말고도 요샌 내가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두 손을 치켜드는 동작이 유명해지고 있어요. 요즘 나는 감사하는 기분으로 살아요.”

다음 날 윌리엄스는 맨해튼 다운타운에 있는 크로스비 스트리트 호텔의 투 룸 스위트에 있다. 라시찬은 옆 방에 있고, 그들의 다섯 살 난 아들 로켓은 윌리엄스의 부모님과 박물관에 갔다. 마이애미 비치에 사는 두 분은 아들이 SNL 공연하는 것을 보고 41번째 생일을 축하해주려고 뉴욕에 왔다. 공연과 생일이 같은 날이었다. 윌리엄스는 그 녹색 모자를 쓰고, 회색 버튼다운 스웨터를 입고, 목걸이를 하고 있다. 바지 벨트 구멍에는 커다란 진주가 매달려 있다. 86세의 미술가인 알렉스 카츠가 에 윌리엄스의 그림을 싣기로 해서, 방금 모델을 하고 돌아온 참이다. “그는 스케치를 하면서 미술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미술 먼저, 다음에는 음악을요. 난 음악, 다음엔 미술을 생각했죠. 우린 평행적으로 서로를 이해했어요.” 윌리엄스에게 예술을 만드는 입장이 아니라 대상이 되는 것은 어떤지 물어보았다. “난 다른 사람의 스토리 속의 캐릭터가 된다는 게 좋아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난 늘 내가 웨스 앤더슨 영화 속의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한때는 그의 캐릭터처럼 옷을 입기도 했고요. 왈라비, 탠 수트 같은 것들.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의 제이슨 슈워츠먼처럼 머릿속으로 버지니아 비치의 내가 다니던 학교의 모든 문화가 다 내 영향이라고 생각했어요. 빌 머레이가 그 영화에서 아무 이유 없이 내달릴 때, 그 느낌은 내 삶에서는 100% 진실이에요. 그가 달릴 때면 난 내 자신을 보는 것 같아요.”

교사였던 어머니, 잡역부였던 아버지, 두 남동생과 함께 버지니아 비치에서 자란 것은 윌리엄스에게 행운이었다. 자넷 잭슨,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과 작업한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가 90년대 초에 윌리엄스의 고등학교에서 5분 거리에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내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대단한, 가장 운 좋은 사건이었죠.” 19살이 되었을 때 그는 색소폰을 연주하던 고등학교 친구 채드 휴고와 함께 넵튠스를 결성했다. 곧 그들은 넬리의 ‘Hot in Herre’, 제이-Z의 ‘I Just Wanna Love U(Give It 2 Me)’ 같은 히트곡을 작업하게 되었다. 윌리엄스가 서른 살이 된 2003년 8월에는 라디오에 나오는 곡들의 43퍼센트가 넵튠스의 손을 거친 곡들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내 호기심을 따라갔어요.” 윌리엄스는 겸손하게 말한다. “그때 나에겐 비전이 있었어요. ‘이건 이렇게 해야돼!’ 아니면 ‘우린 저렇게 해야 돼’라는 의견이 있었죠. 어렸을 때는 난 내가 전부 다 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내가 아는 게 하나라도 있나 잘 모르겠네요.” 2006년에 발표한 솔로 앨범 는 실패했다. “그땐 모든 게 다 미쳐돌아갔어요. 목적 의식을 잃어버렸죠. 모든 게 다 과했어요. 집중할 수 가 없었죠. 그 앨범이 망했을 때, 솔로 아티스트는 내 길이 아닌가보다 생각했어요. 거기에 대해 불만은 없었어요.”

수년 동안 그는 솔로 작업 대신 음악과 패션의 만남에 집중했다. 파일럿이 쓰는 것과 비슷한 모양에 금으로 악센트를 준 선글라스를 디자인해서 마크 제이콥스에서 발표했고, 자기가 디자인한 주얼리를 착용하고 루이 비통 광고에 등장했다. 모자로 대표되는 밝고 친근한 그의 요즘 이미지와는 달리, 당시 퍼렐의 이미지는 섹시하고 쿨한, 세련된 디스코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는 늘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는 멋진 체인을 자랑하며 말한다. “제이콥스에게 주얼리를 만들어달라고 했죠. 베이딩 에이프(BAPE로 알려진, 대성공을 거둔 일본 의상 라인)를 시작한 니고는 잡지에 실린 내 사진을 뜯어 제이콥스에게 가서, ‘퍼렐 것과 똑같은 걸 다른 색으로 만들어줘요’라고 했대요. 이 얘기를 전해듣고, 일본에 갔을 때 니고를 만났어요. 니고는 영어를 못하지만 우린 친구가 됐고, 그는 내 독자 라인을 만들어보라고 격려해줬어요. 그래서 빌리어네어 보이스 클럽이 생겼죠. 난 니고에게 어떤 라인을 만들고 싶은지 설명했고, 그는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BBC, 최근 발표된 아디다스와의 협업뿐 아니라 윌리엄스는 꼼데가르송과 향수를 만들었고, 플라스틱 병을 재활용해서 고급 천으로 만드는 바이오닉 얀과는 청바지를, 유니클로와 협업해서는 티셔츠를 만들었다. ‘해피’에서 영감을 얻은 티셔츠 시리즈도 있다. “내 영원한 첫사랑은 음악이에요. 하지만 내가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인생은 영화고 나는 공동 제작자라는 점이예요. 대작이고, 크리에이티비티가 아주 많이 등장하죠.” 윌리엄스는 자기도 모르게 모자를 톡톡 두드린다. “내가 내 역할을 계속하는 이상, 당분간은 끝나지 않을 거예요.” 글 | Lynn Hirschberg

아티스트 우르스 피셔는 퍼렐의 사진 패널을 든 여자들을 촬영해 그의 최근 앨범인 이 떠오르는 유쾌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아티스트 우르스 피셔는 퍼렐의 사진 패널을 든 여자들을 촬영해 그의 최근 앨범인 이 떠오르는 유쾌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우르스 피셔
Urs Fischer
스위스 출신 아티스트 우르스 피셔의 작품은 무시하기 어렵다. 평범한 소재를 가져다 대담한 조각, 그림, 오브제로 만들어내는 그는 신나는 이미지를 통해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는 빵으로 스위스 산 속의 오두막을 만들었고, 갤러리 바닥에 2미터가 넘는 깊이의 구멍을 뚫었고, 책상 램프에 기댄 20톤짜리 브론즈 곰 인형을 만들었으며, 잠볼로냐의 ‘사비느 여인의 겁탈’을 복제해 거대한 밀랍 상을 만들었다.
로스앤젤레스의 현대미술관에서 2013년에 피셔 회고전을 했을 때, 밀랍상의 심지에 불을 붙여 천천히 녹아 내리게 만들었다. 6월에는 런던의 새디콜스 HQ에서 신작을 전시할 예정이고, 여름에는 뉴욕의 애머건셋에 있는 카르마 갤러리에서 화가 줄리언 슈나벨이 상자 무더기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양초 조각을 공개할 예정이다(슈나벨의 심지에도 아마 불이 붙을 것이다). 다다와 팝,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보이는 그는 크기의 변화, 비주얼 이미지의 과부하가 걸린 이 시대를 살며 우리가 매일 겪는 현실의 충돌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예를 들어 이번 호에 실린 그의 작품은 자신의 2012년 작 ‘프로블렘 페인팅’ 시리즈를 레퍼런스로 한다. 1950년대의 스타들 얼굴을 과일, 채소, 가정용품의 실크스크린 이미지로 가린(훼손했다고 해야 하나?) 알루미늄 패널 작품들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퍼렐 윌리엄스를 촬영하며 피셔는 처음에는 윌리엄스가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들고 있는 작품을 구상했지만, 윌리엄스의 새 앨범 의 주제인 여자들을 등장시키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완성작에서는 브루클린 레드 훅에 있는 피셔의 스튜디오 앞에서 여자들이 다양한 크기의 윌리엄스 사진을 들고 있다. 피셔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사진에서 윌리엄스는 그의 상징인 모자를 쓰고 있기 때문에(“마치 앤디 워홀의 가발과도 같아요. 정체성을 명확하게 해주죠.” 피셔의 말이다) 피셔는 얼굴을 가릴 만큼 크되 얼굴이 조금은 드러나는 오브제를 쓰기로 했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아이디어는 초상화를 만든다기보다는 윌리엄스의 사진과 장난스럽게 그를 가리고 있는 천의 충돌에서 생겨나는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해보자는 것이었다. “퍼렐의 세상은 젠틀하고 좋은 세상이에요.” 41세의 피셔는 존경심을 담아 말한다. “그의 대중적인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보면 뭔가 살아 있는 것이 떠오를 거라 생각하죠. 꽃 같은 거요. 하지만 난 그 반대로 가보기로 했어요. 그의 이미지에는 굉장히 남성적인 에너지가 있어요. 그쪽으로 가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어쨌든 내 영역에 들어온 건 퍼렐이지, 내가 퍼렐의 영역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니까요.”

인물 초상의 대가 알렉스 카츠의 그림 속에서도 퍼렐은 트레이드 마크가 된 모자를 쓰고 있다. 작가는 그에 대해 ‘스타일링이 샤프하고 잘 생긴 남자’라고 언급했다.

인물 초상의 대가 알렉스 카츠의 그림 속에서도 퍼렐은 트레이드 마크가 된 모자를 쓰고 있다. 작가는 그에 대해 ‘스타일링이 샤프하고 잘 생긴 남자’라고 언급했다.

알렉스 카츠
Alex Kaltz
알렉스 카츠가 1968년부터 살며 작업하고 있는 뉴욕 소호의 꼭대기 층 다락에 퍼렐 윌리엄스가 초상화 모델을 하러 간 것은 어느 봄날이었다. 천장 채광창으로 회색 빛이 비쳐들었다. 카츠는 낡디낡은 이젤 옆의 램프 밑에 앉으며 윌리엄스를 칭찬했다. 퀸스 출신의, 구상회화의 장인인 그는 추상표현주의가 득세할 때 풍경과 초상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그 길로 계속 나아갔고, 상업 미술, 빌보드 미술을 연상시키는 일이 많은 스타일리시한 자신의 그림으로 팝아트를 진정 ‘팝’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난 그림이 새 것 같아 보이길, 정말 멋져 보이길 원했어요. 리얼리스틱한 그림은 별로 새 것 같아 보이지 않죠. ” 카츠는 유화로 윌리엄스를 그리며 수다를 떨었다. 그는 나중에 내게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나누면 사람들은 긴장을 풀어요. 그러면 거울을 보는 것 같은 얼굴, 죽은 사람 같은 얼굴이 되는 걸 피할 수 있죠.” 카츠는 텔레비전에서 윌리엄스를 본 적은 있지만 그의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얼굴 그림은 그의 장기다. 카츠는 지하철을 자주 탄다. “얼굴 하나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는 시인, 댄서, 케이트 모스까지 다양한 사람을 그려왔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모자, 티셔츠, 진주 끈을 단 그는 카츠가 보기에 ‘잘생긴 남자’다.
“스타일링이 아주 샤프해요. 진주가 정말 중요해요. 섹시하군요.” 두 사람은 자신들의 세계가 겹친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들은 그림이 영원히 남는다고 생각하지만, 패션이나 음악과 같아요. 3년마다 새로운 스타일이 나타나고 새로운 관객이 등장하죠. ” 카츠의 말이다.
윌리엄스가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차를 복구하는 일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하자 카츠가 짐작을 해본다. “당신은 그 일을 할 만한 참을성이 없었을 것 같은데요?” “정말 싫어했어요.” 윌리엄스가 인정하자 두 사람은 함께 웃는다. 카츠는 그림을 완성하자마자 이 그림을 원본으로 해서 거대한 그림을 새로 그려야겠다고 결심한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만화’를 만들고, 윌리엄스가 잠깐 모델을 하러 다시 들를 때 손을 보겠다고 한다. 그러고는 그걸 확대해서 6시간에 걸쳐 다른 캔버스에 새로 그릴 생각이다. 그 작업에 필요한 체력이 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86세인 카츠는 매일 팔굽혀펴기 300번, 윗몸일으키기 200번을 하고 5킬로미터 정도를 달린다. 요즘은 거리에서 달리기를 한다. “몸은 계속 관리해주면 계속 돌아가더라고요.” 카츠의 풍경화는 최근 런던 테이트 모던의 전시실 하나를 독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