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리스트 정명화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에게는 이제 홀로 차지하는 스포트라이트보다 다음 세대와 함께 나눌 무대가 더 중요하다. 매년 여름에 개막하는 대관령국제음악제는 두 거장이 젊은 연주자와 새로운 관객을 위해 신중하게 고르고 준비하는 선물이다.

악기 없는 이중주를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정경화는 바이올린 선율처럼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건네받은 질문을 정확히 찌르듯 답했다. 카메라 앞에 선 작은 체구에는 집중할 수밖에 없는 당당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무대 아래에서도 그는 차갑게 타는 불같은 자신의 연주를 떠올리게 했다. 한편, 정명화와의 대화는 그보다 몇 옥타브가 낮은 부드러운 음악과 닮아 있었다. 첼로를 안고 있을 때처럼 거장은 깊고 묵직한 존재감을 발산했다. 자매는 서로 달라서 더욱 조화로운 한 쌍 같았다. 언니가 시작한 문장을 동생이 끝맺거나 동생의 이야기를 언니가 부연하는 모습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익숙해 보였다. 둘이 한 음을 낸 순간도 있었다. 촬영용으로 준비한 높은 신발을 나란히 신고 휘청거릴 때는 합창 같은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어릴 때부터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심지어 같은 현을 다루잖아요. 눈짓만 봐도 서로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두 사람의 특별한 교감은 정명화의 이야기에서도 충분히 드러났다. 예술가로서, 그리고 가족으로서 삶의 큰 부분을 공유해온 자매는 4년 전부터 또 하나의 역할을 나누게 됐다. 공동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대관령국제음악제는 양질의 클래식 공연으로 채워진 축제인 동시에 어린 연주자들에게 요긴한 가르침을 줄 음악 학교이기도 하다. 7월 중순부터 시작될 올해 행사의 주제는 ‘오 솔레 미오(O Sole Mio)’다. 비발디부터 사라사테까지, 화사하고 때로는 강렬하기까지 한 남부 유럽의 레퍼토리들을 청량한 녹색의 풍광 안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젊은 시절,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연주했던 정명화와 정경화는 이제 다음 세대가 설 무대를 마련하는 데서 새로운 즐거움과 보람을 얻는 듯했다. “재주 있는 사람을 북돋워줘야죠. 한국은 예술을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시스템이 여전히 아쉽습니다. 그나마 알려진 사람부터 나서서 계기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해요.”(정경화) 활을 내려놓고 무대 뒤로 물러나 있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음악은 꾸준히 이어진다. 그건 독주나 실내악보다도 더 큰 규모의, 젊고 뜨거운 가능성들이 꿈틀대는 앙상블이다.

정경화가 입은 큼직한 셔츠는 김서룡 옴므. 테일러드 팬츠는 퍼블리카, 스니커즈는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제품.

정경화가 입은 큼직한 셔츠는 김서룡 옴므. 테일러드 팬츠는 퍼블리카, 스니커즈는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제품.

두 분이 함께 모일 날짜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소화해야 할 스케줄이 많은 모양이다.
정경화 연주 일정이 이어지다 보니 그렇다. 며칠 뒤에는(지난 6월 13일) 자선 콘서트 <그래도, 희망>이 예정되어 있다. 아프리카 르완다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공연인데 이 무대에서 한국의 영재들에게 기회를 주면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관령국제음악제 캠프에도 참가했던, 이제 열네 살이 된 임일균이라는 학생과 함께 소품을 연주하려고 한다. 또 언니(정명화)의 제자이기도 한 유지인은 나와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는 피아니스트(케빈 케너)와 함께 무대에 선다. 노장들이 어린아이들과 함께 만드는 콘서트인 셈이다.
정명화 연주 스케줄 외에도 나는 가르치는 아이들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콩쿠르에 내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지만 학생들이 원하면 일단 준비를 도와야 한다. 올해 대관령국제음악제도 곧 시작된다. 프로그램 등 큰 계획이야 이미 마친 상태지만 그 와중에도 챙겨야 할 일들이 여전히 적지 않게 남았다.
정경화 대관령은 세팅이 정말 아름답다. 영재들이 와서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여기서 배웠던 젊은 연주자들이 다시 찾아와 아티스트로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기회를 찾기도 한다.
정명화 우리도 20대 때 노장들과 많은 무대에 섰다. 무척 좋은 경험이었고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게 많았다. 선생님들 역시 젊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작업에서 즐거움을 얻으셨을 거다.

말씀하신 대로 대관령국제음악제는 페스티벌인 동시에 음악 학교이기도 하다.
정명화 그게 특징이다. 한국에는 재주와 근면함을 모두 갖춘 학생이 무척 많다. 해외의 음악 학교를 살펴봐도 한국인들이 유독 두각을 나타낼 정도다. 이렇다 보니 오히려 여기에 와서 배우고 싶어 하는 외국 학생도 점점 늘고 있다. 대관령의 캠프는 해마다 그 수준이 높아지는 게 느껴진다.

한창 성장 중인 젊은 연주자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정경화 요즘 젊은이들은 죽어라 콩쿠르에 나가려 한다. 몇 등이라도 성적을 거둬서 그 내용을 경력에 보태려는 거다. 그런 모습을 보면 솔직히 우려가 된다. 나는 대관령 같은 음악 학교가 일찌감치 재능 있는 아이들을 픽업해서 잘 관찰하고 길러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면 지금처럼 지독스럽게 콩쿠르만 쫓아 다니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게다가 수상 경력이 국제적인 아티스트가 되는 데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대표적으로 언급할 만한 연주자가 바이올리니스트 안나 소피 무터고 한국에도 사라 장 같은 예가 있다. 젊은이들이 자기 음악에만 집중하면서 꾸준히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나도 19살에 리벤트리트 콩쿠르에서 1등을 했고, 그때만 해도 한국 소녀로서는 그런 예가 없었기 때문에 폭발적인 주목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연에 대한 막중한 부담에 시달렸던 것도 사실이다.
정명화 어린 첼리스트들의 경우, 덩치 큰 악기를 들고 외국의 캠프에 참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대관령음악제가 자리를 잡은 뒤에는 가까운 곳에서 국제적인 교육 기회를 누릴 수 있게 됐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정경화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예술가로서 발전할 수가 있다. 요즘은 박사 학위도 하나만으로는 모자라서 둘 정도는 따는 분위기라고 들었는데 그래서야 사람이 짓눌려서 성장을 못한다. 공부한 내용을 소화시켜 발전할 새가 없는 거다. 1980년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한 번도 자국을 떠나지 않고 교육을 받았던 일본의 호리고메가 우승을해서 화제를 모았던 해다. 국내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한국인들 특유의 조급함 때문일까? 음악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메달이나 트로피처럼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에 연연하는 경향이 강하다.
정경화 일등은 끝이 아니다. 그때부터 시작… 아니 시작 단계도 못 된다. 그걸 알아야 한다. 교육의 역할은 아이들이 스스로 보람을 찾고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다.
정명화 어쩔 수 없이 콩쿠르에 내보내더라도 내가 아이들에게 단단히 부탁하는 내용이 있다. 다른 연주자들이 하는 걸 많이 보고 배우라는 거다. 예선에서 탈락하자마자 냉큼 돌아오는 애들도 많은데 그러면 안 된다. 등수에 든다는 것? 그냥 연주할 기회가 좀 더 늘어난다는 정도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기회가 생기는 거지 이기는 게 아니다. 나는 이기려고 하는 음악이라면 아예 하지도 말라고 한다.

대관령국제음악제의 공동예술감독으로서 4년째 함께 행사를 준비해왔다. 두 분께는 어떤 경험이었을까? 무대 위에서 연주자로서 호흡을 맞추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을 듯하다.
정명화 따지고 보면 지금 대관령에서 하는 건 일생 동안 음악을 하며 거쳐온 일들이다. 그래서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느낌은 없다. 단, 전체를 살피고 계획해야 하는 자리다 보니 전보다 책임감이 커졌다.
정경화 나란히 현악을 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붙어 다녔고 줄리어드에서도 함께 공부했다. 그런데 언니는 성격이 첼로에 맞게 부드럽고, 난 영락없이 바이올린이다. 고음을 다루다 보니 신경질적이고 까다롭다. 오거나이즈 같은 건 언니가 기가 막히게 한다. 예전에는 정 트리오와 관련된 프로젝트도 거의 맡아서 진행을 했다.
정명화 밸런스가 중요하다. 동생은 나보다 연주 경험이 훨씬 많은 사람이다. 영향력이 닿는 사람들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게 시너지가 된다. 게다가 일생 동안 함께 현을 하며 많은 경험을 공유한 만큼 하모니가 이루어지는 관계다.
정경화 언니는 티칭을 벌써 20년 했고 대단한 실력이다. 나는 손을 다친 뒤에 비로소 줄리어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제 연주에 복귀하게 됐으니 계속하기가 어려워졌다. 학교 측과도 티칭 대신 코칭만 하기로 이미 합의를 마쳤다. 그랬더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내 성격이 하도 완벽주의라 티칭을 하면 자꾸 애들을 들들 볶는데 그게 좋지는 않은 것 같다.

정명훈 선생님을 비롯해 가족 중에 연주자가 또 있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두 분의 교감은 남다른 듯하다.
정명화 아무래도 그렇다. 현에 대해 이야기하면 직접적으로 통하니까. 무엇보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형제기도 하고.

함께 공부를 하고 연주를 하던 젊은 시절의 두 분은 어땠나?
정경화 성장을 하느라 뭐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지원이 대단하셨다. 1958년에 패밀리 콘서트를 처음 했는데, 당시 우리가 입은 의상 비용이 거의 집 한 채 값이었다. 그 정도로 무대에서의 프레젠테이션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굉장히 멀리 보셨던 분이다.
정명화 무턱대고 돈을 쓰신 게 아니라 무대 위에서의 모습이 음악과도 어우러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다.
정경화 1969년에 닉슨 대통령 초청으로 백악관에 갔을 때도 같은 디자이너의 의상을 입었다. 마드모아젤이라는 부티크였다.
정명화 그때는 노라 노나 마드모아젤이 제일 유명했으니까.
정경화 물론 음악적으로도 한없는 노력을 했다. 언니는 계속되는 연습으로 손가락이 너덜너덜해져서 늘 테이프를 감고 지냈을 정도다. 며칠 전 TV에서 케이팝하는 수지 인터뷰를 봤는데 정말 엄청난 트레이닝을 거쳤더라. 우리도 비슷했다. 그래도 언니와 함께 음악을 한 게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믿을 만한 평가를 해주는 누군가가 늘 곁에 있었던 셈이니까.
정명화 음악을 하며 형제들끼리 시기는 없었는지 묻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시기에 빠지면 남으로부터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다고 들으면서 자랐다. 같은 이야기를 학생들에게도 늘 해준다. 동생과 나는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정확히 짚어줄 수 있는 사이다.

정명화가 입은 케이프 형태의 장식이 달린 롱 드레스는 퍼블리카, 굵은 반지는 스와로브스키 엘리먼츠, 하이힐은 구찌 제품. 귀고리는 본인의 것.

정명화가 입은 케이프 형태의 장식이 달린 롱 드레스는 퍼블리카, 굵은 반지는 스와로브스키 엘리먼츠, 하이힐은 구찌 제품. 귀고리는 본인의 것.

당시에는 환경과 상황의 제약도 지금보다 컸을 거다. 지금과 비교할 때 음악가에게는 뭐든 더 어려운 시기가 아니었을까?
정경화 오히려 예전이 훨씬 쉬웠다.

뜻밖의 대답이다.
정경화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아이들이 너무 빨리 배우게 됐다. 정보가 지나칠 정도로 많아졌는데 사실 예술에는 소화를 시킬 시간이 필요하다. 하늘도 쳐다보고 바람도 느끼고 그래야 가능하다. 그래서 대관령 이야기를 다시 꺼낼 수밖에 없다(웃음). 지금은 학생들에게 자연스러운 환경이 아니다.

아까 수지 이야기를 하셨는데, TV도 종종 보시는 모양이다.
정경화 열심히 본다. 특히 <생활의 달인>과 <TV동물농장>. 그 프로그램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동물을 사랑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현실은? 내가 강아지 둘을 키우는데 같이 산책을 나가면 다들 “물지 않느냐?”고 묻는다. 평생 묶어두고 기르는 개들만 겪어서 그런 모양이다. 제대로 뛰질 못하면 사나워지는 게 당연하다. 그렇게 괴롭혀서는 안 된다.
정명화 나는 노래 콩쿠르… 아니 콩쿠르가 아니라 오디션 쇼를 종종 본다. 한국 사람들이 정말 재주는 많다.
정경화 그렇게 재주 많은 사람들을 북돋워주고 좋아하는 걸 잘할 수 있도록 성장시켜야 한다. 어머니께서는 일곱 형제의 장점을 각각 높게 평가하셨다. 왜 넌 다른 형제만 못하냐는 식의 비교나 핀잔을 하신 적이 없다. 수지 이야기를 또 하게 되는데 물 마시러 갈 때 외에는 거의 쉬지 않고 연습을 하면서도 그렇게 재미있었다는 거다. 그런 아이들은 된다. 물론 기회와 운도 따라줘야겠지만. 그게 없이는 어렵다. 재능과 성실함만큼이나 운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은근히 슬프게 들리기도 한다.
정경화 아니다. 그걸 왜 슬프다고 생각하나. 그냥 무대에 설 운명이 아닌 것뿐이다. 그리고 그 위에서의 삶이 그렇게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사실 말도 못하게 힘들다. 나는 예순을 넘겨서 다 겪고 모두 버렸을 때 겨우 자유로워졌다. 누구나 손안에 자기 몫의 행복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 드라마도 보시나? 최근 방영된 <밀회>는 마침 클래식 음악계를 다룬 이야기였다.
정경화 물론 봤다. 피아노 연주 장면에서 흉내를 그럴듯하게 하더라. 듣자 하니 배우가 말도 못하게 연습을 했다고 한다. 사실 초반에는 극 중 상황이 너무 지저분하게 돌아가기에 좀 화도 났다. 두고보자는 기분으로 봤는데 제작진이 재주를 부려서 마무리를 기가 막히게 했다. 결국 지나친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젊은 사람을 통해 그걸 배운다. 모르긴 몰라도 세월호 사고를 지켜본 뒤 작가가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직선으로만 빠르게 내달리리려 드는 건 위험하다. 언제든 넘어지고 만다.
정명화 처음 이탈리아에 갔을 때가 문득 생각난다. 우리와는 삶의 속도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계를 30년쯤 되돌려놓은 듯했다. 오래된 방식을 고수하며 몇십 년에 걸쳐 일하고 있는 구두 수선 장인들의 프라이드가 인상적이었다.
정경화 한국에서 보면 그 사람들이 달인인 거다.
정명화 그런 프로그램이 참 좋은 것 같다. 자신의 자리를 자랑스럽게 지키는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바가 크다.
정경화 유대인의 가르침 중에 제일 큰 죄가 뭔지 아나? 부러움이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안 갔다. 언젠가 로린 마젤과 점심을 먹다가 당신의 에너지가 정말 부럽다고 했더니 엔비(Envy)는 절대 안 된다며 정색을 했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자신을 돌아보고자 한다. 서울 인구보다 더 적은 수가 전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이유도 그런 데서 찾을 수 있다.

정경화 선생님은 2005년의 손가락 부상 때문에 공백기를 갖기도 했다. 연주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야말로 연주자에게는 가장 큰 공포가 아닐까? 당시는 본인에게 어떤 시간이었나?
정경화 내가 서른여섯에 결혼을 했는데 그전까지 커리어를 너무 많이 올려놓았었다. 더 펼쳐야 할 욕심이랄 것도 없었기 때문에 아이 둘을 낳은 뒤에는 가정을 우선순위로 생각하게 됐다. 부상을 당했을 때가 마침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 즉 대학을 가기 직전이었다. 걔들한테 매달려 있을 무렵 다치고 나니 혹시 이제는 다른 쪽을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뜻인가 싶더라. 내가 음악으로 할 수 있는 걸 고민한 끝에 줄리어드에서 티칭을 하게 됐다. 부상을 당했을 때 남들의 짐작처럼 절망하거나 비관하지는 않았다. 연주를 못하면 음악과의 관계가 끊어진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바이올린은 내 일부나 마찬가지다. 지금은 그냥 행복하다. 아이들도 다 자랐고, 심지어 다시 연주도 할 수 있게 됐으니까.

당사자는 담담했다지만 오히려 정명화 선생님의 안타까움이 컸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으로서뿐만 아니라 동료 연주자로서도 그 심정을 헤아리게 됐을 테니까.
정명화 안타까웠다. 그래서 못 온다는 걸 억지로 불러서 무대에 세우기도 했다(2010년, 정경화는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이끄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면서 재기의 의지를 다졌다). 그때는 자기가 어떻게 곡을 마쳤는지 생각도 안 난다고 하더라. 그 후 몇 개월 동안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며 재활을 했다.
정경화 한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여기서 몸 관리를 대단하게 했다.
정명화 그렇게 오랜만에 또 몇 달을 같이 살아봤지.
정경화 언니가 참 대단하다. 연주자로서도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 또 없다.
정명화 바이올린보다 훨씬 육중한 첼로를 다루려면 근육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이 든 뒤에도 연주를 다니는 여성 첼리스트는 손에 꼽는다. 그저 지금껏 할 수 있다는 데 감사할 뿐이다.

이제 두 분 모두 아티스트로서 개인적인 성취를 더 이루는 데는 큰 미련이 없는 듯하다. 다만 음악으로 할 수 있는 더 많은 것을 고민하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는다. 음악가로서 남은 목표로는 무엇이 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
정경화 영재들을 키워내는 게 언니의 큰 역할 중 하나다. 무엇보다도 언니는 학생들을 무조건 끼고 지내지 않는다. 어느 정도 성장했다 싶으면 딱 내보낸다. 이런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내 아들도 피아노를 계속했을지 모른다. (선생님이) 죽을 때까지 가르치겠다고 하기에 내가 기절초풍을 하면서 그만두라고 했다. 자기 뱃속에서 자란 아이도 탯줄을 끊고 내보내야 하지 않나. 평생 데리고 있겠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정명화 하하하.
정경화 또 한 가지. 한국에는 꾸준히 예술을 후원하는 시스템이 없다. 아무래도 나처럼 눈에 띄는 사람이 나서서 조금씩이나마 계기를마련해가고 싶다. 결국은 돈이다.
정명화 나는 교육뿐만 아니라 청중의 규모를 키워가는 데도 기여하고 싶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연주의 의미도 바랠 테니까. 대관령국제음악제 같은 좋은 현장을 경험하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한 번이라도 직접 겪고 그 맛을 알면 다음 번에도 자연스럽게 공연장을 찾게 될 거다. 얼마 전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추모 연주회를 갖기도 했듯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지금껏 살아온 대로 열심히 사는 모습이 좋은 영향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정경화 어머니께서 그렇게 가르치셨다. 이화여대 가사과를 졸업하셔서 현모양처를 목표로 삼으신 분이다. 아이를 잘 키우는 게 곧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셨다. 사회로부터 뭔가를 얻어내겠다는 욕심이 아닌, 그 반대의 마음가짐이었다. 우리도 그렇다.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