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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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시장 육회에 소주, 퇴근길 동네 치맥의 맛이야말로 남자가 알아야 할 미덕이지만, 요즘의 멋쟁이들은 좀 다른 공간을 찾아 즐기기 시작했다.

한남동 헤아(Herr)를 한마디로 소개하자면 이발관이 맞을 것이다. 여자들은 남자친구를 따라서만 갈 수 있고, 남자들만 머리를 자르는 곳이니까 이발관이 맞다. 하지만 기다란 등의 빨강 파랑 리본이 꼬이며 빙글빙글 돌아가던 옛날식 이발관의 손주뻘 되는 젊은 곳이라서, 조금 더 멋 부린 단어로 대개 ‘남성 전용 바버샵’이라고 부른다. 넓은 2층 단독 주택을 개조한 이곳은 시간당 세 명까지만 받는 손님이 거의 예약으로 차며, 기다리는 동안에는 커피나 차 말고도 위스키나 진토닉을 골라 마실 수 있다. 2층에는 직수입한 향수와 넥타이를 판매하는 공간, 구두 손질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방과 컴퓨터를 비치한 비즈니스 룸이 있다. 어딘가 고급스러운 미용실의 남성 버전이라기보다는 클래식한 남성 의류 브랜드 매장의, 세련되게 꾸민 형제 같은 분위기다.

아직 서른이 채 안 된, 이곳의 젊은 대표 이상윤 사장은 외국계 투자은행에 다니던 금융맨 출신이다. “수트를 늘 입어야 하는 직업이었는데 수트 차림에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제대로 하는 곳, 남자들이 여자들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머리를 손볼 수 있는 곳이 아쉬워서 제가 만들게 됐어요.” 그의 창업 스토리에서 ‘여자들 눈치 보지 않고’라는 구절이 귀에 들어와 되물었다. “미용실에서 머리 자를 때 여자들 눈치가 보이나요?” “남자들은 머리가 짧으니까 더 자주 다듬어야 하잖아요, 투자은행에 다니면서 일이 바쁘기 때문에 주말 붐비는 시간을 피해서 잠깐 짬이 나는 평일 오후에 가는데, ‘이 시간에 저 사람은 한가한가 봐?’ 하는 시선을 받는 게 무척 신경 쓰였어요.” 남자들이 가득한 엘리베이터에 탄 여자는 아무렇지 않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 남자는 불편해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른 남자의 머리가 어떠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전문성, 그리고 여자들과 섞여 그루밍할 때 남자들이 느끼는 불편함의 해소야말로 금융계 출신 이상윤 대표가 사업적으로도 승산이 있다고 여긴 포인트다. 홍대의 나씽 앤 나씽 (Nothing N Nothing), 밤므 (Bombmme), 압구정동의 블레스 바버숍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한 시기에 생겨난, 남자들을 위한 클래식한 그루밍 공간이다.

“남자들이 와서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 복합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 대표의 말처럼 위스키와 시가, 향수, 슈 케어, 클래식 소품 쇼핑에 예약제 수트 맞춤까지 남자들을 위한 콘텐츠가 이곳을 채우고 있다. 남성 브랜드에서 소수의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트렁크 쇼, 시가 업체의 핸드롤링 이벤트 등 대관 이벤트도 열린다. 여름을 맞아 지금 기획하는 건 타코 식당과 제휴한 바비큐 파티. 머리를 자르다가 약속 시간에 임박하면 친구들끼리 서로를 부르거나, 남자친구가 면도를 하는 동안 여자친구는 넥타이를 고르는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교 장소의 기능도 한다. 문을 연 지 반년이 된 현재 헤아에는 기업의 오너, 대기업 직원, 변호사와 회계사를 비롯한 전문직, 금융맨과 디자이너 등의 30대 중반 이상 남성 고객이 주로 방문한다. 젊은 남자들 가운데도 고전적인 복식을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고, 포마드 투블록 컷이나 리젠트 헤어같은 스타일이 유행한 것도 바버숍 부흥에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바버숍이 옛 이발소의 재해석이라면, 양복점의 현대판이라 할 만한 맞춤 수트 전문점도 다양해지고 있다. 서초동의 비스포크 수트 전문점인 웰드레스드는 패션을 중심에 둔 스타일 컨설팅을 지향하는 맞춤 정장 숍이다. 미국인인 타드 샘플 대표는 그 자신이 한국 공기업에서 일하다가, 옷 입기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 이곳을 열었다. “한국 남자들은 수트를 너무 크게 입어요. 옷을 입을 때 튀지 않는 안전한 선택을 하고 멋보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편이죠. 하지만 그런 점이 요즘은 많이 바뀌고 있어요.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보수적인 직장 분위기에 맞추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 멋지게 입고 싶다는 욕망이 드러나거든요. 반드시 비싼 원단을 선택하지 않아도, 자신의 예산에 맞게 얼마든지 멋진 옷을 지어 입을 수 있어요.”

샘플 대표는 맞춤 수트가 기성복보다 비싸다는 생각은 선입견이라고 말한다. 물론 얼마든지 고급 원단으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전문가와 상의해서 함께 고민하고 자신의 사이즈에 잘 맞는 옷을 만들어 입으면 오래 입을 수 있어 더 경제적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옷에 관심이 많은 신입사원도 적은 예산에 맞추어 맞춤옷을 주문하고, 완성된 디테일에서 만족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샘플 대표는 찾아온 고객의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아주는 일대일 큐레이터 역할이 자신의 일이라 여기며, 그런 면에서 옷 입기에 관해 낯가림이 심하던 한국 남자들이 서서히 변하는 게 느껴질 때 즐겁고 보람 있다는 언급도 한다. 법원 근처에 매장이 있어 변호사나 판사 고객이 많고 패션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멀리서도 찾아오는 이곳에서는 5명~ 20명 그룹이 모이는 와인 테이스팅이나 소규모 전시 등 캐주얼한 모임을 바탕으로 단골들의 네트워킹도 자연스럽게 구축하려 한다. “단순히 상품을 파는 가게라기보다, 스타일을 다루는 문화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남동으로 돌아가면, 헤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골목에 숨은 듯이 자리한 작은 위스키 바가 있다. 두툼한 나무 문의 눈높이에는 조그만 창이 나 있고, 이 창을 통해 내부에서 바깥 손님을 확인할 수 있다. 너무 취하거나 소란스러운 손님은 가려 받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창이다. 요란한 파사드나 간판으로 가게를 알리지 않고, 홍보를 원하지 않는다며 매체의 취재 제안도 거절하며, 손님들이 휴대폰 사진을 찍어 블로그나 SNS에 올리는 것도 정중하게 거절하는 다소 엄격한 정책을 가진 이곳은 싱글 몰트위스키 바 ‘스피키지 몰타르’. 가게 이름 그대로 금주법 시대의 밀주 바처럼 폐쇄적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다양하게 갖춘 싱글 몰트위스키와 칵테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바텐더들의 서비스 스킨십에 더불어 그 폐쇄성 덕분으로 좋은 함량의 손님들이 유지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좁은 듯한 공간에 두툼한 나무 바와 테이블, 재즈 음악과 어둑한 조명이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여기는 갈 부담 없이 잔으로 마시는 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향을 즐기는 술, 여자와 함께 분위기를 즐기는 술로 싱글몰트 위스키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사진은 청담동 B28.

때마다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단정한 차림의 남자들이 자기들끼리, 혹은 여자친구를 데리고 앉아 있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몰타르 바로 옆의 한남동과 청담동에 매장을 둔 커피바 K, 한남동의 볼트+82, 청담동의 B28, 서교동의 라이온스 덴 등도 단연 젊은 남자들의 위스키 바다. 최근 싱글 몰트위스키의 유행은 달라진 남자들의 음주 문화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전 세대의 위스키는 회식 자리에서 함께 단시간에 취하기 위한 폭탄주의 주재료였다. 혹은 여자를 ‘끼고’ 마시는 술집에서의 기본 세팅이거나. 그러나 요즘 세대의 남자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통한다. 부담 없이 잔으로 마실 수 있는 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향을 즐기는 술, 원산지와 종류를 공부하며 마시는 술이 위스키다. 멤버십제로 운영되는 조니워커 하우스의 장동은 부장은 서울의 위스키 문화가 확연히 젊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젊은 남성들의 위스키에 대한 거부감은 장소도 한몫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찾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공간에서나 마실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최근 문화와 예술이 결합된 새로운 개념의 싱글 몰트 바들이 등장하면서 젊은 층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자연히 여성들도 함께 즐기고요.” 헤아의 이상윤 대표 역시 본인이 방문하는 위스키 바에서 고객들과 종종 마주친다는 언급을 했다. 몸에 잘 맞는 수트를 갖춰 입고 그에 어울리는 그루밍에 신경을 쓸 줄 아는 남자들이 위스키를 즐기는 어떤 뚜렷한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 각자의 취향의 여집합, 특히 여자친구는 절대 데려가지 않는 은밀한 장소는 여전히 있을 테고 사업 때문에 단란주점에서 접대를 하거나 받을 확률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곳, 일대일로 독립적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 광고와 마케팅보다는 추천과 소개로 알려진 곳, 사치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즐거움이 있는 곳, 그곳의 단골과 말을 섞고 친분을 쌓는 게 유쾌한 곳, 내 여자를 데려갈 수는 있되 여성스러운 취향으로 도배되지는 않은 곳, 무엇보다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나와 내가 초대한 누군가가 멋진 사람으로 느껴지는 곳. 스타일을 아는 남자들이 요즘 이런 장소에 찾아가고 있다. 어쩌면 한 개인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남성 집단 전체로 보면 큰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지표다. 약간 호들갑을 떨자면, 새로운 서울 신사들의 탄생이라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서울 여자들에게도 충분히 반가운 변화다. 남자들이 점점 멋있어지면, 즐거워지는 건 그들 자신뿐 아니라 여자의 눈이기도 하니까.

에디터
황선우
아트 디자이너
Art work by PYO KI 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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