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이징 그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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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스타로 스포트라이트를 누리다 유럽의 왕족이 되어 스크린을 떠난 그레이스 켈리의 고전적인 우아함을 21세기에도 재현해낼 수 있을까? 니콜 키드먼이 주연을 맡은 올리비에 다한의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호사스러운 전기 영화는 그녀가 배우로서의 욕심과 왕비로서의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던 1962년의 모나코로 관객들을 데려간다

클래식 스타가 남긴 추억에 도전하려는 후대의 시도는 종종 불경한 신성모독으로 여겨지곤 한다. 시드니 폴락이 리메이크한 <사브리나>가 받은 대접을 떠올리면 납득이 가지 않을까? 오드리 헵번의 역할을 넘겨받았던 줄리아 오몬드에게는 원작 팬들의 맹렬한 트집이 쏟아졌고, 결국 작품도 흥행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헵번에 비견될 만큼 절대적인 숭배를 누려온 또 한 명의 클래식 스타로는 그레이스 켈리를 꼽을 수 있다. 모나코의 왕비 자리에 오르며 스크린 밖에서까지 동화의 주인공이 된 그녀는 자신의 이름처럼(Grace) 범접할 수 없는 우아함의 상징이었다. “그레이스 켈리의 출연작 중에서는 <이창>을 가장 좋아해요. 히치콕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라고 생각하고요.” 새 영화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에서 이 화사한 전설을 연기한 니콜 키드먼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는 그녀의 스타일에 대해 자주 말씀하시곤 했죠. 우아함 그 자체였어요.” 귀족적인 기품이 남다른 배우로 꼽히는 키드먼에게도 켈리를 재현한다는 건 적잖이 부담스러운 숙제였을 것이다. 상대역인 레니에 3세를 맡은 팀 로스는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니콜이 그 역할을 수락한 건 정말 용감한 선택이었어요. 한 시대의 아이콘을 연기한 사람은 날카로운 평가를 감수해야만 하죠. 물론 그녀는 침착하게 잘해냈습니다.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으면 진정한 연기자라는 게 느껴져요.”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는 그레이스 켈리의 일생 중에서도 특정 시점, 즉 1962년의 사건들에 집중하는 이야기다. 히치콕 감독으로부터 <마니>의 타이틀롤을 제안받은 왕비는 자신에게 여전히 연기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음을 재확인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와중에 모나코가 프랑스와의 외교 분쟁에 휩싸인다. 결국 그녀는 한동안 접어둔 꿈과 새롭게 부여받은 책임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 니콜 키드먼은 중요한 결정 앞에 선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한 시나리오를 읽은 뒤 연기의 방향에 확신이 섰다고 말한다. “제 삶과도 닮은 부분이 많다고 느꼈거든요. ‘내 운명은 무엇일까’라는 질문과 맞닥뜨린 그녀에게 공감할 수 있었어요. 다른 이들보다 더 무거운 책임을 지는 사람을 종종 보는데 그레이스가 바로 그런 경우였죠. 이전까지는 마냥 신비로운 존재로만 여겼던 인물이에요. 하지만 이 역할을 맡으면서 그녀의 이면을 들여다본 것 같아요.” 감독인 올리비에 다한 역시 대중이 기억하는 화려한 그림자를 충실히 되살리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결국 모나코의 왕비 역시 그녀가 맡은 하나의 역할인거죠. 영화를 통해 이 인물을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왕비인 동시에 평범한 여성이기도 한 캐릭터를 그리고 싶었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그녀가 누린 특별하고 호사스러웠던 삶을 묘사하는 데 소홀한 건 아니다. 니콜 키드먼이 입고 등장하는 수많은 의상은 코스튬 디자이너 기기 르퍼지가 히치콕 영화 속 그레이스 켈리의 스타일에서 힌트를 얻어 제작한 것들이다. “거장에게 바치는 일종의 오마주예요.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허구를 뒤섞는 걸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고요.” 올리비에 다한이 들려준 설명이다. 화려한 의상을 입을 만한 출연작이 한동안 드물었다고 말하는 니콜 키드먼에게도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는 황홀한 경험이었다. “극 중에서 가장 동화적으로 느껴지는 요소가 바로 의상과 보석일 거예요. 촬영장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무언가를 매일 걸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쁘더라고요.” 특히 마음에 들었던 건 모나코의 호텔 밖으로 걸어 나가는 마지막 장면에 입은 드레스다. “옅은 푸른색 옷감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 있었죠. 준비를 마친 뒤 복도에 섰더니 다섯 살짜리 딸이 감탄을 하더군요. 너무 욕심이 나서 크랭크업 후에 제가 가져갈 수는 없을지 스태프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다니까요. 딱 잘라서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정준화
포토그래퍼
패트릭 드마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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