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의 여행법

W

좋아하면 떠나게 되고, 그때 떠나서 보는 것은 남들과 같지 않나니. 한 가지 분야를 깊이 좋아하는 마니아들은 여행의 목표가 뚜렷하다. 술과 음식부터 클래식 음악과 서핑까지, 취미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여행하는 특별한 방식에 대해 들었다.

5년 차 서퍼의 파도 타기 여행

서핑은 내 생활과 관심사뿐 아니라 여행하는 방식도 바꿔놓았다. 2010년 서핑을 시작하기 전에는 어릴 때부터 가고 싶었던 리스트를 따라서, 혹은 충동적으로 여행하곤 했다. 서핑이 이미 내 삶의 일부분이 돼버린 지금은 파도가 없는 여행지는 리스트에서 뒤로 미룬다. 거의 매일 서핑 관련 영상을 보며, 영상 속에 나오는 그림 같은 파도에 마음 설레는 나는 언제나 좋은 파도에 목말라 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파도의 모양과 질이 다 다르기 때문에 경험해보고 싶은 곳이 많다. 지금까지는 필리핀 열흘, 캘리포니아를 6개월과 2개월씩 두 차례 여행했다. 보통 해 뜨는 시간에 맞춰 아침 일찍 바다로 나가 11시쯤까지 파도를 탄다. 햇볕이 뜨거운 낮에는 피부도 많이 타고 에너지 소모도 많아, 점심을 먹거나 숙소로 들어와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저녁엔 함께 간 친구나 그 지역 서퍼들과 시간을 보낸다.

내 인생 최고의 파도는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의 The Hook이라는 서핑 스폿에서 경험했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던 중 잠시 들른 산타크루즈에서, 크고 부드럽게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보드를 차에서 내려 바다로 뛰어들었다. 절벽 위에서 볼 때는 멀어서 파도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라인업 지점에 도착하자 머리를 훨씬 넘기는 힘 좋은 세트들이 밀려왔다. 머리를 넘는 큰 파도임에도 굉장히 부드럽고 힘이 좋아서, 평소에 하지 못했던 기술이 저절로 될 정도였다. 상어가 나온다는 얘기에 살짝 겁이 나기도 했지만 파도에 매료되어 해 질 무렵까지 정신없이 탔다. 파도의 길이가 200m는 족히 넘어서, 다 타고 나서 다시 라인업할 때 어깨가 제법 아팠던 기억이 난다. 서퍼로서 평생 잊지 못할 추억도 있다. 하루는 헌팅턴에서 서핑을 하고 있는데, 시커먼 물체가 주변 바다를 맴도는 거다. 한여름이었는데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겁이 났다. 알고 보니 돌고래였다. 파도가 제법 큰 날이었는데 사람뿐 아니라 돌고래도 파도를 가르고 점프를 하며 놀고 있었던 거다. 그 뒤로도 서핑을 하면서 물개나 돌고래, 먼 바다에서 고래가 지나가는 모습을 자주 보곤 했다.

캘리포니아 여행은 꿈 같은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날씨, 문화, 사람들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서핑이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고 있는 그곳의 비치 문화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캠핑을 하며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침부터 오후까지 서핑을 하고, 석양을 바라보며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마시멜로며 소시지 같은 것을 꼬챙이에 꽂아 구워 먹었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LA까지 600km 정도를 따라 내려오는 1번 국도는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해안도로로 꼽히는데, 나에게도 태어나서 본 가장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태평양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옆으로 끝까지 펼쳐지고, 절벽을 따라 구비구비 나 있는 국도를 따라서 내려가는데, 운전하는 내내 가슴이 벅차서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그 길 위 Big Sur라는 절벽 아래에 숨어 있는 서핑 스폿이 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원초적인 자연 속에서 파도를 타는 서퍼들을 보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서핑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었을까?’ 서핑이 내 삶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더욱 뜨겁게 느꼈다.

고기를 못 먹는 사람과 같이 고깃집에 가서 1시간 동안 밥을 먹는다면 서로 고역일 것이다. 서핑을 즐기는 친구와 함께 여행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관심사가 같고 목적을 공유하는 여행의 동반자가 있다면 더욱 즐거운 여행이 되는 건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서핑은 특히 그렇다. 아무리 파도가 좋은 곳에서 서핑을 한다 해도 혼자라면 한두 시간 정도 즐겁게 탈 뿐, 그 후로는 흥미가 떨어진다. 개인적인 운동 같아 보이는 서핑이지만 서퍼들은 파도를 기다리는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눈다. 시시콜콜한 일상부터 삶에 대한 진지한 얘기까지. 그러면서 관계는 더욱 친밀해진다. 파도를 잡았을 때 서로 소리 질러주고, 멋진 라이딩을 했을 때 엄지를 들어줄 수 있는 친구들이 함께할 때 서핑 여행은 더욱 완벽해진다. 세계 각국의 서퍼들을 만나보면 공통점은 벽이 없다는 거다. 서핑에 빠진 사람들은 4차원이 많아서 끼리끼리 통한다는 얘기도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서핑은 자연에 가까운 운동이다. 다른 동력 없이 보드 한 장만 있으면 어느 바다에서든지 즐길 수 있다. 찌들어 있던 일상, 휴대폰과 미디어를 육지에 던져두고 바다에 떠 있다 보면 스트레스를 벗어나 자연과 동화된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런 행복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바다 위에서 만나 어떻게 친구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서핑 여행은 그런 만남의 기회다. – 글 | 예수환(롱보드 프로 라이더)

하루키 전작주의자의 작가 탐방 여행

2002년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 되었으며, 자연스레 초기작부터 다시 찾아 읽으며 소위 전작주의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루키의 전 세계 인터뷰들을 찾아 번역하는 ‘finding-haruki’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글을 찾아 읽고 알아갈수록 하루키는 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작가 하루키의 행적, 그의 작품 속 장소,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촬영지 등을 찾아가는 하루키 여행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대학 생활을 춘천에서 했는데, 드라마 <겨울연가> 방영 이듬해부터 욘사마의 본가로 등장한 춘천에 일본 관광객이 엄청나게 몰려드는 걸 보며 나도 하루키 팬으로서의 여행을 마음에 품게 된 거다. 그 무엇을 좋아하든, 그 대상을 향해 찾아가고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은 자연스레 들기 마련이다. 하루키는 팬이 많은 작가다 보니 여행 전후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나도 가고 싶었는데”였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그 마음에만 그치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지만.

여행을 결심하고 약 한 달간 그의 에세이와 소설 등 작품을 모조리 다시 읽었다. 정독은 아니고, 가볼 만한 스폿이 있나 쭉 다시 훑어보며 리스트업을 해 나갔다. 그리고 일본의 하루키 팬들이 하루키를 찾아간 여행을 엮은 <하루키를 좋아하세요?>와 임경선 작가의 <하루키와 노르웨이의 숲을 걷다>란 책을 통해 보완했다. 그리고 일본의 작가, 영화감독 등의 작품 속 배경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정리해주는 사이트인 ‘도쿄쿠레나이단’의 도움이 많이 받았다. 그렇게 장소들이 쌓이고, 일자별로 세세하게 일정을 정리하다 보니 한신칸, 교토, 시코쿠, 도쿄, 홋카이도 등 일본 전역의 지역별로 체류일이 어느 정도 잡히게 됐다. 리스트업을 한 후 가장 시간 소요가 많았던 건 주소 확인 작업이었다. 구글맵과 일본 야후 사이트를 뒤져가면서 최종 리스트업을 한 다음, JR패스의 가장 긴 텀인 24일권을 구매하고 떠나게 되었다.

24일의 여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고베 산노미야의 영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극 중 ‘제이스바’의 로케이션 장소 ‘하프타임’이었다. 아주머니와 아르바이트 청년과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곳을 꼽자면, 단연 수도고속도로 3호선의 비상계단이다. <1Q84>에서 소설이 시작되는 위치이자 하루키식 패러렐 월드로 전환되는 지점이라는 의미, 그리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묘사되는 여주인공 아오마메의 비장한 등장이 인상적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던 장소다. 하지만 <1Q84>에 언급된 스폿을 소개한 일본 무크지에서조차 제대로 집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장소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산겐자야역에서 수도고속도로 3호선을 따라 시부야역 쪽으로 걷다가, 글쎄 소설 속에서 묘사한 이케지리 출구를 지나는 지점에 정말로 비상계단이 있는 게 아닌가!

여행을 통해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더 뚜렷하게 느끼는 기쁨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하루키가 상상으로 장소를 지어내기보다 직접 다녀본 곳을 (어시스턴트가 조사를 할 수도 있겠지만) 묘사한다는 건 더욱 확신을 갖게 된 점. 그리고 하루키가 성장한 아시야시에서 한 작가를 키워낸 도시로서의 자부심과 애착을 갖고 지역의 대학, 철도 등과 연계해 많은 문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 여정의 기록을 펴낸 책 <하루키를 찾아가는 여행>을 하루키가 현재 체류하고 있는 하와이의 대학 사무실로 보낼 예정이다. 매년 10월 노벨문학상이 발표되는 날 서울의 한 장소를 정해 하루키 팬들과 함께 응원하는 모임을 갖고 싶다. 그리고 많은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하루키 마라톤 대회를 열고 싶다. 1회는 교토의 가모가와강에서 할 거다. 하루키의 전 세계 번역본이 그득한 핸드드립 카페를 열고 싶은 구상도 가지고 있다. 하루키 트립은 앞으로도 계속될 나의 꿈이다. – 글 | 신성현 (<하루키를 찾아가는 여행> 저자)

식도락 지상주의자의 미식 여행

언제부터 맛있는 음식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항상 제철 음식을 찾아 드시던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이곳저곳의 골목 산책을 좋아했고 그 골목길 어딘가에 부조처럼 새겨진 오래된 식당을 좋아했다. 이국적인 도시의 아치와 선들, 이해할 수 없는 문자로 쓰인 간판 사이로 어렵게 식당을 찾아 다니는 과정은, 나에게 여행 그 자체였다.
식당 방문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다. 미슐랭 가이드북은 세 개의 별을 받은 레스토랑을, “이 식당을 방문하기 위해 여행 일정을 짜도 되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번 나의 나파밸리 여행도 사실 그랬다. 오랫동안 시도한 토마스 켈러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프렌치 런더리(French Laundry) 예약에 성공했기 때문에 시작된 여행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켈러는 뉴욕에도 퍼 세(Per Se)라는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을 가지고 있다. 온갖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들의 천국인 뉴욕에 살고 있으면서 굳이 왜 6시간을 날아가 욘트빌이란 작은 마을에 있는 식당까지 가야 하는 걸까? 그저 그곳의 음식이 맛보고 싶기 때문이다. 마치 산악인들이 “그곳에 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몇 가지 테마를 구상했다. 기착지인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그간 부침이 좀 있었던 마이클 미나(Michael Mina)나 꾸준히 사랑받는 개리 당코(Gary Danko) 같은 올드 스쿨 오트 퀴진과 최근 몇 년간 집중적으로 조명받고 있는 베누(Benu), 새종(Saison)과 같은 신예 레스토랑을 비교해보는 것, 세계 최대 규모라는 이곳 차이나타운에서 몇 가지 다른 지방의 중국 음식을 먹어보는 것, 서부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굴 종류와 북태평양에서 잡히는 던저니스 크랩(Dungeness crab)을 맛보는 것, 그리고 목적지인 나파밸리에서는 캘리포니아산 싱글 올리브로 만든 다양한 올리브 오일을 맛보는 것, 카베르네 쇼비뇽이 주축인 보르도 스타일의 나파밸리 와인을 테이스팅하는 것, 프랑스 샴페인과 동일한 방식으로 생산하는 캘리포니아의 스파클링 와인을 테이스팅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렌치 런더리가 있는 욘트빌에서는 토마스 켈러의 식당을 모두 방문해보는 것 등등이었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만 4개, 미슐랭 가이드북의 별로 환산해보면 프렌치 런더리(3개), 베누(2개), 부숑(1개), 개리 당코(1개)로 총 7개의 별을 맛보는 꽤 야심 찬 계획이었다.

프렌치 런더리의 음식은 기대 이상이었다. 좋은 식당의 음식에서 내가 기대하는 바는 사실 단순하다. 이미 잘 알고 먹어본 음식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경험하거나,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음식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최고의 식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곳들은 보통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낸다. 이 지역 최고의 스파클링 와인 슈람스버그(Schramsberg)로 시작된 식사는 9개의 셰프 테이스팅 코스 하나하나가 감탄하며 먹을 수밖에 없는 완벽한 요리였다. 특히 프렌치 런더리의 대표적인 메뉴 ‘굴과 진주(Oysters & Pearls)’는 굴의 부드러운 맛과 캐비아의 강렬한 맛의 대조가 사바용(sabayon) 소스를 매개로 절묘하게 하나의 맛으로 수렴하는 놀라운 요리였다. 메추리(Quail)는 엽조(Gamebird)의 강한 향이 완벽하게 요리되어, 긴 피니시를 가진 피노누아를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서빙되었고, 메인으로 나온 양고기는 거의 레어 상태였지만 겉에 지방 부분을 살짝 붙여 다른 템퍼로 익혀서 고소한 지방의 맛이 살코기의 육즙과 함께 부드럽게 입안에서 녹아 내렸다. 모두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재료였지만,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요리였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뉴욕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불필요한 자부심 없는 편안한 분위기였다. 재킷을 입어야 하는 포멀한 레스토랑이었지만 식사 중간에 와인 잔을 들고 테라스로 나와 서쪽 포도밭으로 해가 지는 풍경을 보거나, 해가 진 정원에서 디저트를 먹을 수도 있었다. 4시간에 걸친 만찬은 단순히 식사라기보다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행복한 경험이었다.

좋은 레스토랑의 서비스에서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이런 ‘환대받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샌프란시스코의 개리 당코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식당이라는 점에서 서울로 치면 힐튼의 시즌스 같은 곳이다. 비록 미슐랭은 별을 하나만 주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 사람들의 리뷰를 모아 점수를 주는 자갓 서베이에서는 음식과 서비스, 인기 면에서 프렌치 런더리를 포함한 이 지역 모든 레스토랑 중에서 1위를 지키고 있는 전통의 레스토랑이다. 뉴욕의 어느 레스토랑도 음식과 서비스에서 동시에 29점을 받은 곳은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 레스토랑에 대한 샌프란시스코 사람들의 사랑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실제로 이곳에서의 식사는 유쾌함의 연속이었다. 소믈리에는 오랜 시간을 우리 테이블에 머물면서 이 지역의 다양한 하프 보틀 와인을 추천해주었다. 특히, 메인으로 나온 들소(Bison) 요리와 소노마 밸리에서 생산된 올드 진판델의 조합은 더없이 훌륭했다. 마지막 디저트인 에스프레소와 마카롱 아이스크림 샌드위치까지 이어지는 긴 식사 시간 내내 너무나 편안했고, 선물로 받은 작은 케이크를 들고 호텔로 돌아갈 때까지 이런 따뜻함이 내내 남아 있었다.

올드 스쿨의 따스함과는 대조적인 차갑고 냉철한 베누의 음식도 인상적이었다. 프렌치 런더리와 뉴욕의 퍼세에서 8년을 일했고 한국인이 메인 셰프라는 사전 정보가 그려놓은 막연한 기대를 여지없이 깨버리는 음식들이었다. 누군가는 이곳의 음식을 퓨전(fusion)이라고 게으르게 평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음식은 사실 서로 다른 어떤 것을 합쳐놓았다기보다는 모두 해체해서 다시 조합한 것에 더 가깝다. 그래서 기괴하기도 하고 때로는 재기 발랄하기도 하다. 메추리알로 만든 송화단을 포타주(potage)와 함께 먹는다거나, 김치 국물을 건조해 만든 필름에 굴과 돼지고기를 조합한다. 샤오롱바오에 아주 신 람빅(Lambic) 맥주를 매칭하고, 아나고를 쿠키처럼 만들어 크림 프레셰(creme fraiche)에 찍어 먹기도 한다. 16개의 음식은 샤크스핀과 던저니스 크랩이 들어간 중국풍의 수프로 마무리되었다. 그가 훈련 받았던 프렌치의 전통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이런 요리를 설명하지 못한다. 한식, 일식, 중식의 바탕 위에 서양의 요리법과 재료로 완전히 재발명된 이 요리는, 거의 40%에 가까운 인구가 아시아인이 되어버린 샌프란시스코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 음식은 뉴욕이든 어디든, 절대 다른 곳에서는 먹을 수 없는 이 도시만의 음식이라는 사실을.

여행에서 식사란 누군가에게는 그저 ‘한 끼 때우는’ 어떤 것이겠지만 다른 이에겐 여행의 전부가 될 수도 있다. 대자연의 웅장한 풍경과 역사적인 건축물을 보는 것보다, 골목 안 작은 테이블에 앉아 낯선 향신료의 냄새를 맡으며 입안에서 씹히는 감촉에 집중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이제는 사라진 오래된 제국의 수집품을 전시해놓은 미술관, 박물관보다 그 지역의 해산물과 육류, 야채를 창의적으로 수집해놓은 작은 접시 하나를 지켜보는 것이, 나는 더 흥미롭다. 어느 지역의 음식을 자연과 문화와 사람이 만드는 소우주라고 한다면, 마드리드에 가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 이과수 폭포의 천둥과 같은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 하늘과 땅이 구분이 안 되는 우유니 소금사막에서 밤하늘을 보고 싶은 마음, 그리고 코펜하겐의 노마(Noma)에서 북극의 재료로 만들어진 12개의 테이스팅 코스를 먹고 싶은 마음은 사실 하나의 마음이다. – 글 | 신현호(맥주와 음식을 좋아하는 뉴욕 거주 직장인)

에디터
황선우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