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열린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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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1일, 비상한 관심과 기대를 모은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의 개관과 함께 서울 패션위크의 막이 올랐다. 미래적이고 진보적인 이 건축물 안과 밖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던 2014 F/W 서울 패션위크. 그 환희의 순간을 더블유의 카메라에 담았다.

3.24 Mon.

이석태 KAAL E.SUKTAE
1990년대의 그런지와 이석태 특유의 조형미가 만나면 어떤 화학 작용을 일으킬까. 답은 드넓은 챙의 페도라로 얼굴을 가린 도심의 방랑자! 블랙, 그레이, 아이보리 등 모노톤으로 제한한 색감과 건축적인 실루엣은 여전했지만, 웨어러블한 아이템들의 레이어드나 프린지 장식, 회화적인 프린트 등 이전 그의 컬렉션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요소들로 동시대적인 유연함과 느슨한 분위기를 더했다.

정혁서, 배승연 – STEVE J & YONI P
스티브 J와 요니 P 듀오는 그들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긍정적인 에너지만큼이나 밝고 희망에 찬 컬렉션을 선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흘러간다’는 메시지를 담은 쇼 노트에서 예고했듯, 이번 시즌 컬렉션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엉킨 쇠사슬과 체인 프린트, 카무플라주와 혼합된 플라워 프린트, 그리고 검정 패브릭에 더해진 스팽글 장식처럼 이번 시즌 그들이 낭만을 표현하는 방식은 조금 달랐다. 어둠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희망의 빛처럼 그 어느 때보다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낸 쇼.

홍은주 – ENZUVAN
그녀의 컬렉션에서는 언제나 동심이 짙게 묻어난다. 이번 시즌 그녀는 어른들을 흉내 낸 짙은 화장과 반짝이는 무거운 장신구로 치장한 티베트의 어린아이들에게서 영감 받은 컬렉션을 선보였다. 복잡하고 다양한 장식과 소재를 볼륨이 강조된 간결한 실루엣에 담아내는 솜씨는 여전했다.

박춘무 – DEMOO PARKCHOONMOO
박춘무는 이번 컬렉션을 준비하면서 브랜드를 시작한 25년 전을 회고했다. “‘무(無)로부터’라는 의미의 브랜드 명을 지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내게 무(無)는 항상 무한한 가능성과 의미를 가집니다.” ‘제로’를 도출해내는 더하기 빼기처럼 두 가지 상반된 소재(펠트와 실크), 흑과 백의 조합, 그리고 오래된 것과 모던한 요소가 혼재된 그녀의 룩은 초창기의 데무를 연상시키면서도 대단히 동시대적이었다.

박항치 – BAKANGCHI
Chic Shake! 디자이너 박항치는 노래 가사처럼 라임이 맞아떨어지는 이 문구를 이번 시즌 콘셉트로 삼았다. 패션계에서 남용되다시피 하는 단어인 ‘시크함’이란 고고하거나 심각한 것이 아니라, 이 문구를 발음할 때처럼 입안에 알싸한 탄산수가 퍼지는 것 같은, 바로 그 느낌이 아닐까. 액센트 컬러가 더해진 미니멀한 드레스나 레이스와 가죽처럼 의외의 소재를 조합한 그의 재킷은 간결하면서도 특유의 위트가 넘친다.

김재현 – LUCKY CHOUETTE
이번 시즌 럭키슈에뜨 컬렉션의 키워드는 젊고 패셔너블한 집셋(Gypset: Gypsy와 Jet-Set의 합성어)과 그들이 향유하는 하이퍼 컬처(다양한 문화의 혼합)다. “그들은 다양한 문화 요소를 뒤섞는 것을 넘어 개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에 따라 고유한 문화와 패션 스타일을 만들죠.” 디자이너 김재현의 설명. 그래픽적으로 변형된 다양한 체크 프린트, 쿨한 시즌리스 드레스와 페이크 퍼 점퍼 등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들을 마구 믹스 매치한 럭키슈에뜨 걸들에게서는 자유분방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3.25 Tue.

강기옥 – KIOK
디자이너 강기옥은 ‘Play Game, Play Life’라는 흥미로운 제안을 건넸다. 즉, 트럼프 카드 게임에서 영감을 받아 브랜드의 클래식한 아이덴티티를 21세기적 감성으로 쿨하고 위트 있게 풀어낸 것. 특히 눈길을 끈 러프하게 연출된 데님과 화려한 그래픽 프린트 룩은 하이엔드 스트리트 룩으로 젊은 고객들에게 각광받을 만했다.

이승희 – LEYII
이번 시즌 디자이너 이승희는 극도로 절제된 분할과 비율을 만들어내는 설치미술 작가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캐시미어, 실크, 울, 코튼 등 고급스러운 원단을 기본으로 감각적인 컬러 배합, 날렵한 커팅 기술을 활용한 미니멀한 의상을 선보인 것. 회색, 검은색, 화이트 같은 무채색 팔레트를 사용해 차분한 분위기를 이어갔고, 퍼플, 오렌지, 카키 등 포인트 컬러를 감각적으로 활용한 센스가 돋보였다. 그녀가 야심 차게 준비한 유니크한 클러치 역시 모던한 라인에 트렌드를 적절히 대입한 주목할 만한 아이템이었다.

송자인 – JAIN SONG
이번 시즌 제인송의 키워드는 바로 ‘매니시, 스포티, 시크’. 검은색 테일러드 재킷의 연이은 등장, 중반에는 화려한 꽃 프린트와 애니멀 그래픽 프린트, 그리고 자주색 레이스 드레스 파트. 정확하게 분리된 쇼 안에서는 자연과 도시, 상반된 것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번 시즌 무엇보다 인상적인 의상은 발끝에 닿을 듯 긴 오버사이즈 밀리터리 코트. 완벽한 테일러링 기술이 고스란히 드러난 아주 근사하고, 멋진 룩이었다.

김석원, 윤원정 – ANDY & DEBB
‘Fly Me’를 주제로 1950~60년대의 우아한 젯셋족의 라이프스타일에서 출발한 앤디&뎁 쇼. 쇼장 전면에 영사된 비행기가 암시하듯 승무원의 유니폼과 모던하고 미래적인 기내 실내 장식,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누비던 부호들의 룩에서 차용한 실용적인 아이템들이 등장했다. 특유의 구조적 실루엣이 돋보이는 코트와 미니 드레스, 성글게 짠 터틀넥 스웨터, 모자, 그리고 빈티지한 백 등이 어우러지며 감도 높은 컬렉션을 완성했다.

지춘희 – MISS GEE COLLECTION
“여성의 옷은 여성스러울 때 가장 아름답다”는 확고한 패션 철학을 지닌 디자이너 지춘희. 도회적 세련미를 절제된 감성으로 표현하는 미스지 콜렉션은 이번 시즌, 60년대 스페인에서 영감을 얻은 ‘La Danza(춤)’를 주제로 매혹적인 컬렉션을 펼쳤다. 열정적인 플라멩코 춤을 연상시키는 프릴과 레이스 장식의 극적인 드레스, 그리고 대담한 주얼리가 어우러진 컬렉션은 한 편의 드라마틱한 공연을 연상시켰다.

임선옥 – PARTSPARTS

결코 멈춰 있던 적이 없는 진보적인 디자이너 임선옥. 그녀는 이번 시즌 풍경, 자연, 우주가 보여주는 변형을 그녀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재해석했다. 네오프렌 소재와 메탈릭 원단같이 상반된 소재의 충돌, 모던한 디자인과 눈이 시리게 비비드한 색감이 충돌했지만 그 둘은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처럼 부드럽게 어우러졌다. 스포티즘, 퓨처리즘, 미니멀 등 다양한 것들을 한데 넣고 흔들었지만 결코 어지럽진 않았던 쇼.

장민영 – DEMIN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균열에서 컬렉션의 영감을 얻었다는 디자이너 장민영. 그는 퍼즐을 맞춰가는 형식으로 그 균열들을 재배치하며 특유의 견고한 미학을 완성했다. 그 결과 하운즈투스 패턴을 그래픽적으로 표현한 톱과 매끈한 가죽 스커트, 여성스러운 플레어 소매가 돋보이는 하프 코트, 그리고 부분적으로 시스루를 연출한 드레스 등 다채로운 의상이 탄생했다. 한마디로 과감한 시도와 동시대적 스타일링이 조화를 이룬 모던한 쇼.

양유나 – YUNA YANG BY CFDK
‘The Butterfly Mother’라는 독창적인 주제는 디자이너의 개성 어린 취향을 그대로 반영했다. 중국 마오족의 설화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그녀는 그들의 오랜 전통과 문화를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의상으로 재해석했다. 즉, 마오족의 전통 자수와 천의 직조법, 그리고 주얼리 디자인 등을 차용해 유나양의 시그너처인 레이스와 컬러 블록의 결합 등으로 풀어냈다.

3.26 Wed.

주효순 – PAUL & ALICE
폴&앨리스의 컬렉션에는 여자라면 누구나 향수를 느끼고마는, 시대와 성별이 모호한 정서가 흐른다. 과거의 것을 새로운 기법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으로 주목받는 디자이너 주효순은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인 아드리아나(마리옹 코티야르)를 염두에 두고, 그녀가 아이슬란드로 여행을 간다는 상상에서 컬렉션을 풀어 나갔다. 1920년대의 파리에 사는 아드리아나의 현재 모습을 상상하며 중성적인 터치를 가미하고, 노르딕 패턴과 시그너처 패턴인 사슴을 강조했다. 1920년대의 특징인 플래퍼 룩이 현대적인 풍성한 오버사이즈 실루엣으로 변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폴&앨리스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일 것이다.

곽현주 – KWAK HYUN JOO COLLECTION
스냅백을 뒤로 돌려 쓴 21세기 호두까기 인형이 뛰노는 영상이 장내를 뒤덮는 장면만 봤을 때는 몰랐다. 이 흥겨운 광경은 디자이너 곽현주의 치열한 고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디지털과 소셜미디어가 패션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세계적인 현상은 곽현주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고, 스트리트 웨어의 범람으로 인해 스스로도 완전한 하이엔드를 꿈꿀 수가 없노라고 고백했다. 이 출발점을 통해 곽현주는 밀리터리 룩에 기반한 힙합 전사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네오프렌과 페이턴트, 인조 시어링 등으로 이루어진 아우터가 돋보인 가운데 아주 꼭 맞거나 아주 커다란 실루엣이 반복적으로 등장해 곽현주 특유의 관능미에 젊은 감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한상혁 – HEICH ES HEICH
남성복의 스타 디자이너 한상혁이 남성복과 여성복을 아우르는 토털 레이블, 에이치 에스 에이치(Heich Es Heich)로 서울 패션위크에 컴백했다. ‘뉴 어덜트’라는 주제로 절제된 어른스러움을 보이는 겉모습과 쾌락을 추구하는 내면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는데, 빨강, 검정, 회색 등 제한된 색상 속에서 소재의 조합을 통해 구현한 세련된 감각이 돋보였다. 등판 지퍼가 열리는 턱시도, 태슬을 가죽 속에 감춘 로퍼 등 감춰진 디테일 역시 엠비오 시절보다 훨씬 성숙해졌다.

루비나 – RUBINA
늘 새로운 것에 목말라하는 디자이너 루비나. 그녀는 이번 시즌 아름답고 절대적인 자연 속 에너지를 현대적 감성과 함께 버무렸다. 프린지, 자수, 퍼, 커다란 판초나 머플러를 메탈릭 원단, 패딩 점퍼, 모직 소재의 모던한 재킷과 자연스럽게 조합시켰고, 모자이크처럼 뒤섞이며 스며드는 다채로운 장식, 질감이 다른 패브릭을 연결해 민속적인 느낌과 현대적인 색채이 이루어내는 공명을 실험했다. ‘크로스오버’라는 키워드를 세련된 방식으로 풀어간 쇼에서는 연륜과 도전 정신이 동시에 느껴졌다

강나영, 강민조 – MAG & LOGAN
맥 &로건은 세 시즌 연속 ‘스토리텔링’이라는 독특한 콘셉트의 컬렉션을 이어가고 있다. 할머니에서 손녀에 이르는 여성 3대의 이야기 중 마지막 주인공으로, 이번 컬렉션은 진정한 사랑을 믿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강한 여배우의 모습에서 사랑에 흔들리는 여린 여성의 느낌까지 상반된 이미지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 듀오의 의도였는데 이 점은 풍성한 오간자 블라우스와 드레스에 가죽 라이더 재킷을 입는 등 주로 스타일링 기법으로 구현되었다. 오트 쿠튀르 출신답게 원석과 비즈의 섬세한 사용이 쇼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계한희 – KYE
흑과 백의 조화, 쇠사슬과 밧줄을 형상화한 입체적인 문양을 통해 극과 극의 이미지를 보여준 디자이너 계한희. 색과 물체의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피함으로써 새로운 것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게 이번 시즌 그녀가 전달하고자 한 중요한 메시지다. 흑색과 백색의 혼합을 통해 새로운 그러데이션 프린트를 만들었고, 엠보싱으로 양각된 쇠사슬과 밧줄 프레임으로 전혀 새로운 프린트를 창조한 것이 바로 그것. 흔하고 익숙한 색과 네오프렌, 인조가죽, 폴리에스터 같은 가벼운 소재를 가지고 고급스럽고 진지한 컬렉션을 만들어낸 그녀의 비상한 감각이 물에 오른 듯하다.

신장경 – SHIN JANG KYOUNG
언제나 런웨이와 의상에 판타지를 부여하는 디자이너 신장경. 그는 이번 시즌 강인하지만 우아한 여성성을 의상에 녹여냈다. 콘셉트를 대변하는 거대한 털모자, 탄탄한 원단과 견고한 테일러링 기술을 토대로 완성한 코트는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쇼 중간중간 등장한 여우털, 밍크, 비버털로 만든 풍성한 퍼 코트는 고급스러운 색감과 세련된 실루엣 안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드레스보다 빛났던 코트의 승리. 이번 시즌 그의 쇼는 이렇게 정리되지 않을까?

김동순 – KIMDONGSOON ULTIMO
전통적인 편안함과 현대적인 세련미의 조합은 디자이너 김동순이 평생에 걸쳐 시도해온 주제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러시아 문학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슬라브 민족의 열정과 자유로움, 로맨틱한 서정성을 바탕으로 풀어 나간 이번 컬렉션 역시 외면과 내면의 아름다움이 조용한 조우를 이뤘다. 직선적인 라인과 길고 가느다란 실루엣 속에 마치 마트로슈카 인형을 보는 듯한 볼륨감이 러시아 민속풍의 장식과 어우러져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과시했다.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최유경, 송선민, 이지은, 정진아, 패션 에디터 / 박연경, 김한슬
포토그래퍼
정지은(Jung Ji 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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