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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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송라이터 짙은이 2년 만에 선보이는 신보 <디아스포라 : 흩어진 사람들>의 주인공은 정착하지 못한 채 먼지처럼 부유하는 너와 나 또한 우리다. 때로는 도망치며 가끔은 버티며, 그렇게 우리 모두의 삶은 계속된다.

짙은이 입은 데님 셔츠는 캘빈 클라인 진, 인디고 데님 팬츠는 A.P.C, 검정 프레임의 안경은 톰 포드 바이 세원 I.T.C 제품.

짙은이 입은 데님 셔츠는 캘빈 클라인 진, 인디고 데님 팬츠는 A.P.C, 검정 프레임의 안경은 톰 포드 바이 세원 I.T.C 제품.

<백야> 이후 꼬박 2년 4개월 만이다. 그동안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살았나?
지난 2월까지 1년 반 가까이 EBS 라디오 <단편소설관>을 진행하느라 유난히 시간이 빨리 흘렀다. 하루에 단편소설 한 편씩을 소화해야 하는 빠듯한 일정이라, 책에 빠져 살다 보니 어느새 1년 반이 훌쩍 지났더라. 이번 음반 <디
아스포라 : 흩어진 사람들> 작업을 시작한 건 지난해 늦여름 즈음부터다. 원래 긴 호흡의 정규 음반을 내려고 했는데, 주제와 맞지 않는 곡이 있어서 다섯 곡만 골라 EP로 묶었다. 조금은 쓸쓸한 노래들이다.

디아스포라는 원래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아가는 유대인과 그들의 삶으로부터 비롯된 정치 사회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이야기보다는, 디아스포라의 의미를 일상이라는 차원으로 가지고 내려오고 싶었다. 근래 들어 모든 사람들이 떠돌아다니는 느낌이다. 하루하루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어딜 가도 내 공간이 아닌 것만 같은 삶, 정치적 박해 없이도 끊임없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 그러한 삶과 현실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을 거다.

지난해 홍대에서 홍은동으로 이사한 것도, 일상의 디아스포라라 보아도 좋을까?
어딜 가도 만족할 만큼의 삶의 질을 누릴 수 없는 사회가 된 것 같다. 홍대도 예전같지 않다. 시끄럽고 비싸다. 더 이상 인디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라, 결국엔 짐을 싸서 떠나야 하는 상황이 닥치기도 한다. 홍은동을 선택한 건, 홍대에서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탔을 때 만원 이내로 갈 수 있는 저렴한 동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수 없이 밀려나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될 거야’와 같은 뻔한 위로를 담은 노래들이 아니라 반가웠다.
중요한 건 총체적인 실패, 혹은 지속 불가능성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원하는 세상에서 나의 자리를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당할 거라면 멋지게 당하자, 멋있게 도피하자, 아니면 싫다고 힘들다고 말이라도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웅장한 현의 선율, 선동적인 가사, 거친 보컬이 두드러지는 1번 트랙 ‘망명’은 짙은의 모든 곡을 통틀어 이질적이었다. 의도한 바인가?
일부러 그랬다. 오랜만의 음반이니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 음반 전체를 낯설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고, 첫 곡에서만이라도 무언가 보여주고 싶었다.

굳이 낯설어질 이유가 있을까?
글쎄, 그게 자연스러웠다. 더는 ‘Feel Alright’을 만들고 부를 때와 같은 예쁘고 행복한 정서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말 괴롭고 고통스럽다고 말하기도 싫었다. 내 나름의 정서를 만들어내고 싶었던 것 같다.

특히 기존의 감미로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직설적인 보컬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음악에 적합한 방식을 찾았던 거다. 그런데 사실은 언제부턴가 홍대 인디신에 만연한 연성화된 음악을 듣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에 비롯된 변화기도 하다. 내가 처음 이렇게 부르기 시작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난 그저 노래를 잘 못해서 그렇게 불렀을 뿐인데(웃음). 어쨌든 나라도 날것의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나 사실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아, 이래도 들을 테냐!’란 마음도 없지 않았다. 재미있었다.

현악기 편곡 또한 새로운 도전이다.
‘망명’의 현악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공부한 뮤지션 정연승이 편곡했다. 그 친구에게 ‘너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봐. 러시아의 귀족이 쫓겨났어, 그때 그 심정을 만들어야 해’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러더라. 원래 자신의 음반에서 하고 싶었던 편곡인데 아무래도 데뷔 음반이라 그러지 못했다고. 이건 형 음반이니까 한번 과하게 해봤다고(웃음). 그런데 듣자마자 좋았다. 주위에선 너무 뮤지컬스럽다던가 과하게 웅장하지 않냐 라는 반응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2번 트랙의 ‘안개’라는 곡이 가장 좋았다. 가사 속 주인공들이 도망가려 하는 곳이 왜 ‘누구도 우리에게 질문하지 않는 처음 같은 곳’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망명’ 역시 ‘너는 질문을 했고, 나는 침묵을 했지’라는 가사로 시작된다. 우리는 너무 많은 질문 속에 살고 있다. 넌 꿈이 뭐냐, 뭐가 될 거냐, 결혼은 할 거냐, 애는 안 낳냐, 그리고 크게는 너는 좌파냐 우파냐, 친미냐 반미냐까지. 모든 걸 질문하고 거기에 답을 내려야 하는 피로가 있다. ‘안개’의 가사 속 커플 역시 불륜이네 어쩌네 말이 너무 많은 마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봤다. 만약 우리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간다면, 어떤 질문도 존재하지 않은 채 그냥 우리가 있는 현재 자체가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질문에 침묵으로 답하기보다는, 질문에 휘둘리게 된다.
맞다. 그저 질문일 뿐, 평가가 아닌데. “그 남자 정말 괜찮아? 정말 사랑해?” 그냥 물어볼 뿐인데, 괜히 흔들린다. 흔들릴 수밖에 없다.

30대 중반의 남자들 역시 그렇게 흔들리며 사는 건가? 친구들을 만나면 무슨 얘기를 나누나?
지쳐 있는 애들은 잘 안 만난다. 너무 힘들다는 얘기를 듣고 있으면, 속으로 ‘그래서 뭘 어쩔 건데? 때려치워, 때려치워!’ 생각하게 된다. 내가 늘 그럴 때면 때려치웠으니까. 그래도 내 친구들은 뭔가 해보려고 하는 것 같다. 망하더라도 에라 모르겠다 뭔가 해봐야겠다라는 마음. 그게 ‘트라이’의 정서다.

그런데 ‘트라이’의 가사를 보면, 버티기는 했는데 그래서 성공을 했는지는 쓰여 있지 않다.
심지어 가사 뒷부부에선 폭풍우가 치지 않나. 그래도 버티세요, 납작 엎드려서 버텨야 합니다(웃음). 어떻게든 고치려 하고, 눈물 흘리고 다시 정화 시키려 하는 요즈음의 세태가 싫었다. 어차피 점차 가난해져 가는 세상이라면, 무릎을 꿇더라도, 땀냄새가 풍기더라도, 고통스럽더라도, 버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말하고 싶었다.

짙은 역시 10년 가까이 음악을 놓지 않고 버텨왔다. 강력한 의지가 아니라, 우연히 운명이 이끄는 대로 음악을 택했다는 시작을 돌이켜보면 스스로 신기하지 않나?
예전엔 ‘음악은 취미로 하는 거야’라고 말하곤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다 허세였다. 사실은 정말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음악 아닌 다른 것들을 포기해왔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한 건, 막상 달려들어서 한 일의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정주의적인 시선도 싫었다. “힘들지 않아요? 음악 하면 돈도 잘 못 벌 텐데.”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응하는 방식밖에 알지 못했다. “잘 몰라요. 저 취미로 음악 하는 거예요. 취미로 하는데 잘되네요.” 사실은 다 거짓말이었지만, 어찌 보면 그러면서 나를 지켜왔던 것 같다. 몰입한 채 죽어라 열심히 했는데도 잘 안 되면 상처받으니까.

허세를 부려야 할 만큼 조심스러웠으면서도 어떻게 지금까지 음악을 하며 할 수 있었을까?
가치관의 문제다. 만약 한 달에 얼마 이상을 벌어야 하고, 얼마짜리 집 이상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면, 음악을 직업으로 가질 수 있을지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난 음악으로 돈을 못 번다면 안 쓰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앞으로 도 그렇게 음악을 할 거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음악이 돈이 되면 좋고,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마지막 곡 ‘히어로’에 이르러선 아프고 숨 가쁜 나를 웃음으로 쉬게 하는 히어로를 만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떠올렸다. 우리가 동굴 속에서 벽을 향해 결박된 채 살아갈 땐, 벽에 스치는 바깥 세상의 그림자를 실체라 믿는다. 이때 동굴에서 박차고 일어나 바깥 세상으로 나아간 초인이 그림자는 허상일 뿐이라고, 동굴 밖에야말로 살아 있는 나무와 새가 존재한다고 일깨워준다. 그럼에도 나는 때로 동굴의 안온함에 머무르고 싶다. 바깥 세상은 춥고, 힘들고, 험악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런 나를 계속해서 깨부수고, 결국 숨을 쉬게 해줄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히어로다. 그런데 사실 처음엔 여성으로서의 히어로를 이야기하려고 했다.

여기서 여성으로서의 히어로는 누구냐고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여자, 나를 동굴 밖으로 끌어내는 여자. 아무래도 난 기댈 수 있는 여자에 대한 판타지가 있는 것 같다(웃음).

에디터
피처 에디터 / 김슬기
포토그래퍼
맹민화
스탭
헤어 & 메이크업 / 이소연, 스타일링 어시스턴트 / 임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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