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 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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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트렌드를 제시하는 것만이 디자이너의 역할은 아니다. 컬렉션을 잘 살펴보면, 어려워만 보이는 이 옷들을 어떻게 입을 것인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스포츠웨어, 밤의 영역을 넘보다
스포츠웨어의 일부분-소재나 실루엣, 스트링을 비롯한 세부 장식들-이 하이패션으로 넘어온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시즌의 특징에 따라 약간씩 변형되곤 하는데, 이번 시즌은 스포츠웨어의 홈 그라운드인 운동장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나타났다. 즉, 데이웨어뿐만 아니라 격식을 갖춘 이브닝웨어까지 진출한 것인데, 전통적으로 ‘섹시&글램’을 내세우는 브랜드들이 스포츠웨어 트렌드에 합류하면서 분위기를 제대로 띄웠다. 실크 소재의 테크니컬한 메시와 가죽을 고급스럽게 접합한 톱과 조퍼스 팬츠를 선보인 구찌, 아주 짧은 길이의 복서 팬츠에 현란한 무늬의 톱과 ‘챔피언 벨트’를 연상시키는 큼직한 벨트까지 더한 에밀리오 푸치, 운동선수들의 압박붕대를 드레스 장식으로 사용한 톰 포드, 정교하게 가죽을 꼬아 운동선수의 러닝톱과 팬츠처럼 만든 발렌시아가, 주얼 장식의 베이스볼 점퍼와 선바이저, 플랫폼 샌들로 장식적인 스포티즘의 정수를 보여준 마르니, 윈드 브레이커와 트랙 팬츠를 여성스럽게 풀어낸 사카이의 컬렉션을 보면 포멀한 이브닝 룩으로 활용해도 손색없을 정도다. 즉, 이번 시즌 스포티즘의 관건은 얼마나 여성스러움을 잃지 않았는가의 여부로, 색색의 스트라이프 고무단을 레그 워머와 드레스의 진동둘레에만 적용한 프라다, 얇은 실크, 레이스 등 지극히 여성스러운 소재로 탱크톱과 점퍼 등 스포츠웨어 아이템을 만든 빅토리아 베컴베라 왕, 스텔라 매카트니 등 여성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그 미묘한 지점을 제대로 찾아냈다는 점이 흥미롭다.

1. 섹시한 파이톤 가죽과 검은색 고무단이 조화된 오픈토 부티는 구찌 제품.
2. 싱그러운 스트라이프와 금색 로고가 어우러진 베이스볼 캡은 쥬시 쿠뛰르 제품.
3. 역동적인 빨강 세라믹이 돋보이는 시계는 디올 워치 제품.

일상복으로 스며든 트라이벌 무드
작년 여름 먼저 선보인 오트 쿠튀르와 프리 컬렉션에서는 디자이너들이 지구본을 들고 뱅글 뱅글 돌리기라도 한 듯, 제3세계의 독특한 지역색에 집중한 룩이 다수 등장했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9월부터 시작한 정식 봄/여름 컬렉션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아메리카(물론, 미국을 제외한), 아시아, 특히 아프리카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이 뉴욕부터 시작해 밀라노를 거쳐 파리에서 폭발적인 힘을 과시했다. 아프리카 부족과 일본 사무라이의 교집합을 선보인 지방시나 이교(異敎)의 공주 같은 분위기를 펼친 발렌티노 등 처음부터 끝까지 노골적으로 이 무드에 집중한 하우스도 있는 반면, 피카소와 몬드리안을 마사이족의 전투복과 섞은 듯한 느낌의 알렉산더 매퀸, 아프리카의 영적인 요소와 현대 회화의 액션 페인팅을 버무린 셀린, 파리 밤거리의 쇼걸과 바이커족, 인디언 부족 등 다중적인 영감을 이용한 루이 비통 등 현대적인 방식으로 다양한 레퍼런스의 교집합을 영리하게 포착한 브랜드 또한 많았다. 어느 편이든, 과한 트라이벌 무드의 룩은 현실에서는 입기 어렵기 때문에 상업적인 부분을 고려해 개편하는 것이 불가피한데, 천연 소재의 재킷을 덧입은 드리스 반 노튼, 아스텍 무늬를 테일러드 팬츠에 응용한 이듄, 에스닉한 스커트에 테일러드 베스트만 스타일링한 오프닝 세레모니의 예처럼 팬츠, 셔츠, 재킷, 펜슬 스커트 같은 테일러드 아이템을 섞으면 아주 간편하게 모던한 느낌을 더할 수 있다.

1. 검정 태슬과 골드 메탈이 어우러진 이브닝 백은 알렉산더 매퀸 제품.
2. 에스닉한 프린트의 실크로 묶어 연출하는 플라스틱 뱅글은 에트로 제품.
3. 꽃과 새를 보석으로 표현한 반지는 부쉐론 제품.

예술, 큼직한 캔버스 위에 오르다
현대미술의 흐름을 패션에서도 오롯이 포착할 수 있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시대가 변한 만큼 그 적용 또한 예전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샤넬의 칼 라거펠트가 접근한 방식이 대표적인데, 단순히 유명 작품을 프린트로 응용하는 범위를 넘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체를 하나의 빈 캔버스로 보고 그 위에 작품을 빼곡히 채워가는 식. 아트를 테마로 했다고 해서 룩 전체가 ‘아트스러움’을 강조하지도 않으며, 함께 스타일링한 아이템은 데이와 이브닝을 가리지 않고 평소에 쉽게 응용할 수 있는 것들로 매치했다. 특히 힘있는 소재의 특징을 살려 볼륨감을 강조하는 룩이 많았다. 집업 스타일의 민소매 셔츠 드레스를 발목까지 오게 만들고 그 위에 컬러풀한 페인트로 추상화를 그린 듯한 느낌을 주는 카스텔바작의 맥시 드레스, 독특한 일러스트를 레글런 소매의 오버사이즈 풀오버에 적용한 안토니오 마라스, 넓은 옷깃이 특징인 오버사이즈 코트에 거친 페인팅을 넣은 셀린, 역시 오버사이즈 코트 위에 색색의 붓터치를 응용한 캘빈 클라인, 몸에 꼭 맞는 미니 드레스 위에 유화가 번진 듯한 셔츠형 재킷을 스타일링한 베르사체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 시즌 아트 트렌드를 대표하는 브랜드들은 대부분 무릎길이 드레스를 주요 아이템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드레스 표면 전체에 색색의 회화적인 효과를 내고 허리를 몸에 꼭 맞게 강조하는 경향이다. 한 피스 자체로 강렬하기 때문에 정갈한 클러치나 선글라스, 간결한 슈즈 등 일상적인 액세서리로 전체를 다소 눌러줄 필요가 있다. 크리스토퍼 케인, 샤넬, 디올, 질 샌더, 프라다, 겐조 등에서 모두 비슷한 스타일링을 발견할 수 있다.

1. 파란색과 노란색 삼각형이 큐브 모양을 이루는 토트백은 플리츠 플리즈 제품.
2. 빨간색과 하늘색으로 밧줄을 표현하고 전면에 빨강 산호를 장식한 바다 테마의 샌들은 샬롯 올림피아 제품.

에디터
패션 디렉터 / 최유경
포토그래퍼
JASON LLOYD-EV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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