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듯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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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의 소설에서 고독은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인정하고 견뎌야 할 현실이다. 새 작품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의 등장인물들 역시 자기 몫의 외로움을 짊어진 채 잠시 스쳤다 결국에는 다시 멀어진다.하지만 쓸쓸한 사람들은 쉽게 주저앉는 대신 서로의 부담 없는 어깨를 빌려가며 끝내 삶을 버텨낸다. 그 담담한 모습은 헛된 희망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위로가 된다.

이제 거의 끝나가는 것 같아요.” 가벼운 한숨의 끝이 웃음으로 누그러진다. 열두 번째 책이자 다섯 번째 소설집인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이하 <다른 모든 눈송이>)의 홍보 스케줄 때문에 은희경은 매일같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종종걸음을 치는 중인 듯했다. 어느덧 일정이 마무리되어간다는 이야기에서 숙제를 끝내기 직전의 후련함 같은 게 읽힌다. 문득 그의 예전 작품을 머릿속으로 되짚어봤다. 평균보다 반 옥타브쯤 높은 목소리와 사근사근한 말투, 그리고 온화한 표정이 의외다 싶을 만큼 단호하고, 때로는 냉정하기까지 한 문장들이었다. <다른 모든 눈송이>에 담긴 단편들 역시 귀에 달콤한 거짓말이나 손쉬운 위로를 건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열아홉 소녀의 첫사랑은 차갑게 내동댕이쳐지고 만삭의 젊은 어머니는 신도시의 아파트 안에서 질식해간다. 이국의 낯선 환경도 공포스럽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고국 또한 생경하기는 마찬가지다. 은희경은 여섯 개의 글과 여섯 개의 고독을 나열하면서 그 사이를 가느다란 매듭으로 이어놓는다. 서로 다른 이야기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동일 인물이었음이 밝혀질 때 독자는 책이 그리고 있는 전체의 풍경을 엿보게 된다. 외로운 존재들이 이렇듯 스치며 살아가는 곳이 세상이라면 나의 고독 역시 특별히 잔인한 시련은 아닐 것이다. 담담한 결말은 헛된 과장이 없어서 더 믿음직스럽다. ‘힘들게 이루어낸 사랑에 대해서, 돌아갈 고향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비어 있는 의자에 이방인끼리 자리를 좁혀 앉는 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방인의 부축이란 사랑하는 이의 헌신이 결코 줄 수 없는 방심과 편안함을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을.’(‘스페인 도둑’) 은희경의 문장도 타인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는 담담한 위안이 된다. 소설을 쓰고 읽으며 작가와 독자는 가늘지만 단단한 고독의 연대를 맺는다.

<다른 모든 눈송이>에 실린 6개의 단편은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동일한 캐릭터를 각기 다른 이야기 속에서 목격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프랑스어 초급 과정’의 임산부와 극 중 화자인 태아는 ‘스페인 도둑’의 모자와 겹쳐진다. 이런 형식을 떠올리게 된 계기가 있었나?
첫 번째 이야기를 마쳤을 때 스스로도 결과물이 흡족했다. 단편이니까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일 텐데 이 인물의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가 이후에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 궁금해졌다. 대부분의 경우, 작가도 알고 쓰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쓴다. 두번째 단편을 쓰는 동안에도 캐릭터의 잔상이 떠오르길래 아예 연작으로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게다가 전체 이야기가 고독한 사람들의 자기 풍경인데, 그 풍경을 각각 독립적으로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도 내용과 잘 맞는 형식이었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고독의 연대가 효과적으로 담길 것 같았다. 장편으로 썼다면 장면들을 서로 연결하기 위해 개별 이야기의 완결성을 포기해야 했을 거다. 이번 책은 하나씩 이야기를 더해가면서 결국에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물론 정교하게 짜 맞추는 것 자체가 중요하진 않았다. 우연한 사건, 스침, 이런 것들이 우리 인생을 지금의 여기로 데려왔는지 모른다, 그런 이야기를 편하게 썼다.

단편을 쓴 순서와 목차의 배열이 동일하다. 장편은 아니지만 장편 못지않게 필연적인 순서와 흐름을 따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전체 구성을 짰다. 책 중간에 등장하는 뜨개질 에피소드가 내용적, 형식적으로 일종의 브리지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의 내용, 그리고 이후부터 결론까지 이어질 이야기를 서로 연결해주는 거다. 이 인물과 저 인물이 동일하다는 걸 밝히면 내가 의도한 새로운 풍경이 더 명확해지겠지만, 한편으로는 그걸 모르고 읽어도 된다는 게 연작의 장점 아닐까 싶다.

처음 쓴 단편을 표제작으로 삼았다. 이 이야기의 출발점은 무엇이었나?
내가 낯가림이 심하고 낯선 장소에 가면 지나치게 긴장을 한다. 엇비슷한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모종의 강렬한 공포가 반복되는 기분이다. 최초의 순간은 처음으로 혼자 지내게 되어 지방의 집을 떠나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같다. 그 두려움의 원형이 꾸준히 삶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그런 경험이 없었고 계속 부모님의 보호 아래 지냈다면 낯선 장소에서 혼자 지내는 일에 이렇게까지 공포를 느끼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감정이 뭔지 한번 써보고 싶었고, 그래서 이 소설이 시작됐다. 그런데 쓰다 보니 의외로 내가 의젓하게 적응을 해나가려고 애썼으며, 또 나름의 방법을 발견한 것 같더라. 결과적으로 작품도 고독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게 아니라 고독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방식을 찾는 내용이 됐다.

예전부터 작품 안에서 꾸준히 신도시라는 공간을 언급해왔으며, 이번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도 과천, 일산 등에서 오랜 기간 거주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적지 않은 시간을 그 안에서 지냈음에도 여전히 신도시는 소설가 은희경을 건드리는 공간인 듯하다.
신혼과 작가 생활을 모두 신도시에서 시작했다. 그때도 서울에 처음 왔을 때 경험한 감정의 원형이 반복 가동되는 느낌이었다. 예전 작품인 <아내의 상자>에서 묘사한 불모와 불임의 이미지는 다 신도시에서 얻은 거다. 하지만 그래서 신도시가 싫은 거냐고 묻는다면, 싫고 좋고를 따지기 어려울 만큼 익숙해졌다고 답하겠다. 이식된 느낌, 고독, 단절, 편의성, 지속 불가능성 등이 이제는 내 삶이 조건이 됐다. 고독을 극복하려 들기보다는 이게 내 삶의 조건이니 같이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을 쓸 때마다 새로운 공간을 찾게 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공간에서부터 이야기가 출발할 때가 많나?
첫 장편인 <새의 선물> 때부터 그랬다. 인물의 동선까지 미리 구상하면서 썼다. 그게 정해져야 캐릭터의 행동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공간, 시간, 인물의 성격 등 얼개를 미리 짜놓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까 상상하면 소설이 풀린다. 공간 묘사에 공을 많이 들이는 건 그런 이유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도 도움이 된다. 여전히 낯선 곳을 두려워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부딪칠 때마다 뭔가 탄성을 얻는다.

낯선 경험에서 두려움과 자극을 함께 얻는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낯선 방에 혼자 앉아 있으면 막막하고 두렵긴 한데 한편으로는 초심이라고 할까? 내 인생에서 처음 맞는 순간 같은 기분이 들어서 자유로워진다. 여행을 가서 주변을 살피고, 산책로를 알아보고, 가게를 익히고 이런 일은 늘 막연하게 두렵다. 그냥 밖에 나가지 말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걸 할 때 가장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그런 걸 해내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뭔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게 나를 확인하는 작업이 되어버렸다.

<다른 모든 눈송이>는 주로 어디에서 많이 썼나?
토지 문화관, 제주도, 뉴욕…. 많이 돌아다니면서 썼다. 공간을 찾아 다니는 게 내가 작가로서 따르는 패턴이 됐다. 낯선 곳에 글 작업을 하러 가면 그 장소가 입력이 돼서 다른 소설을 쓸 때 튀어나오곤 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의 화법도 자주 취한다. 표제작인 ‘다른 모든 눈송이…’는 1976년 겨울에 십대의 마지막을 맞은 주인공들을 이야기하다가 문득 32년 뒤의 봄으로 시제를 옮겨 마무리한다. ‘T 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역시 회고담에 가깝다. 거슬러 올라가면 초기작이었던 <새의 선물>도 마찬가지다.
이번 작품은 단편의 탈을 쓴 장편이라서 더욱 그랬다. 시간의 흐름,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인생의 여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간이 제일 강력한 폭력이라고 할까? 물론 나쁘게 말해서 폭력인 거고 소멸의 과정으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 어떤 아름답고 가치 있고 행복한 것도 시간 앞에서는 다 깨진다. 그래서 시간이 개입된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래야 인생의 양감과 크기를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결과 구축된 화자는 아이지만, 어른의 시점으로 한 번 필터링된 아이다. 단순히 조숙한 것 이상의 입체적인 겹이 생기는 듯하다.
가르치거나 이미 결정된 것을 보여주는 식의 화법이 싫어서 어린아이의 시점을 선호한다. 그런데 이번 소설에서는 다양하게 써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13살짜리뿐만 아니라 70대 할머니도 화자로 등장한다. 좀 더 사실적인 서사를 시도한 셈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은희경의 10대는 어떠했나?
작품 속에 다 있다. 소설이 내 억압을 풀어주는 것 같다. 쓸 때마다 내 속에 있던, 하지만 있는지조차 몰랐던 인물들이 튀어나온다. 10대 시절의 나는 예측 가능한 일상을 심심하게 따르는 애였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뒤늦게 ‘속으로는 이렇게 불운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을 통해 내 인생이 솔직해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

글에 자신을 많이 반영하는 편인가?
일단 시간과 공간은 내가 경험하고 아는 걸 써야 한다. 엉뚱한 걸 상상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역사소설은 엄두가 안 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에 담긴 게 꼭 내 이야기는 아니다. 쿤데라가 말한 대로 소설가는 자기라는 집을 허물어서 그 벽돌로 다른 집을 짓는 직업이다. 아무튼 디테일은 나와 내 가족의 경험일 때가 많다. 현실에서는 하나의 에피소드지만 소설 안에서는 다른 생명을 얻고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사실 내가 소심해서 남의 이야기를 못 써먹는다.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될까 봐. 이렇다 보니 나 혹은 가족의 사연을 주로 가져온다. 소설가가 집에 있으면 가족들이 ‘털린다.’

냉정하다고 해야 할까, 분명 이야기에 단호한 구석이 있다. 짝사랑은 응답받지 못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도 곧잘 꺾인다. 캐릭터들에게 희망이나 해결책을 쉽게 던져주지 않는데 물론 그들 역시 만만하게 주저앉는 사람들은 아니다. 작가가 독자와 캐릭터를 손쉽게 위로하지 않고, 무엇보다 위로 자체를 조심스러워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현실이 그렇다. 쉽게 해결되거나 극복될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내 이야기에서는 인물이 변화한다. 갑자기 문제를 풀어주는 대신, 자신의 방식대로 현실을 장악하도록 만든다.

올해로 등단 20주년을 맞았다. 10년째와는 어떻게 다른 느낌인가?
10년째에는 그래도 새삼스러운 느낌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 다만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내 좌표를 알게 된 것 같긴 하다. 이런 건 잘 쓸 수 있어, 혹은 난 이거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내용이 정리가 됐다.

그 내용들이 궁금하다. 어떤 순간에 자부심 혹은 한계를 느끼게 되나?
난 천재형 작가가 아니고 전복적이거나 충격적인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다. 지금껏 성실한 소설가였으며 앞으로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이 자리에서 내가 가진 걸 계속 다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작이라면 다작이라고 할 만큼 지난 20년간 왕성하게 써왔다. 하지만 써지지 않아서 막막했던 순간도 분명 겪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극복을 하나?
단편이든 장편이든 새 작품을 쓸 때마다 ‘나는 정말 재능이 없어, 이래서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몰라’ 이런 생각을 꼭 한다. 그러다가도 다 마친 뒤에는 ‘나 진짜 잘 쓰는구나…’ 혼자 이러는 거다(웃음).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 과정을 작품마다 반복한다. 지난 장편인 <태연한 인생> 때가 생각난다. 계간지에 연재 중이었고, 더는 미룰 수 없는 시점이 왔는데 도통 글이 나오질 않았다. 극도로 절박했기 때문에 그냥 내가 제일 잘 아는 것, 즉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쓰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내 안의 예민함과 집중력을 전부 동원했더니 갑자기 문장이 터졌다. 심지어는 너무 탄력을 받아서 다음에 쓸 것까지 줄줄 쏟아냈을 정도다.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건 이 이야기였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일단 내 안에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그걸 찾아내는 과정이 소설 구상이 아닐까 싶다.

작품마다 새로운 시도를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결국 하게 되는 이야기는 애초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뜻일까?
할 이야기를 했다, 혹은 못했다와는 다른 문제다. 그보다는 ‘딴 걸 했다’에 가깝다. 그래서 재미있다. 한 명의 작가가 문장도 좋아지고, 세상을 보는 통찰력도 키우고 경험도 쌓이고, 그러면서 차분히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다. 자신의 계획을 파고들다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 것, 그게 문학 같다. 그래서 작가들이 지치지도 않고 지겨운 줄도 모른 채 꾸준히 쓰지 않나 싶다.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정준화
포토그래퍼
목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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