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트 쿠튀르의 세계가 다시 풍요로워졌다. ‘입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적어도 이번 시즌만큼은 디자이너들을 고뇌에 빠지게 만든 요인이 아닌 듯했다. 꿈꾸는 어른들을 위한 패션 놀이터, 그것이 바로 오트 쿠튀르다.

Maison Martin Margiela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의 오트 쿠튀르 라인인 ‘아티즈널’ 컬렉션은 최근 색다른 각도로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오늘날 대중문화를 이끄는 인플루언서 중의 인플루언서, 칸예 웨스트가 작년 말 자신의 투어에 아티즈널 마스크를 착용하고 등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마르지엘라의 오리지널 라인이나, 좀 더 캐주얼한 라인인 MM6에만 익숙한 젊은 세대들도 아티즈널 라인의 이름과,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값어치가 없다고 여겨지거나 간과되는 것들에서 가치를 찾아내 이를 최고급 수공예 기술로 재탄생시키는 것-를 알게 되었다.

이번 아티즈널 컬렉션을 통해 마르지엘라 디자인 팀은 과거의 유명 아티스트들이 디자인한 귀한 소재를 가지고 만든 옷에 쓰레기 더미에서 골라낸 듯한 싸구려 장식을 달아 독특한 아름다움을 창조해냈다. 바우하우스의 태피스트리를 잘라 만든 코트, 폴 고갱의 회화를 기반으로 짠 소재로 만든 큼직한 코트, 라울 뒤피의 그림이 그려진 1950년대의 소재로 만든 팬츠 수트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색색의 체인, 인조 진주와 단추, 종이 끼우는 클립이나 음료 캔에서 떼어낸 양철 탭 등으로 구성한 장식들은 오트 쿠튀르가 지향하는 ‘고귀한 희소가치’에 딱 들어맞는 장치였고, 아티즈널의 상징인 기괴한 마스크가 이번 시즌에도 어김없이 등장하여 의상의 존재감을 더욱 높여주었다.

Jean Paul Gaultier
실용적이고 현대적인 것들이 명백하게 우선순위를 차지해버린 요즘의 패션에서는 ‘드라마틱한’ ‘극적인’ ‘내러티브가 담긴’ 등등의 수식어를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갈리아노가 사라진 이래, 이런 수식어에 걸맞은 쇼를 펼치는 건 오직 장 폴 고티에뿐. 그는 이번 오트 쿠튀르에서 파리의 옛 정취가 물씬 담긴 정통 카바레 스타일의 무대를 만들었는데, 여기에 그간 자신의 패션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혹은 특별히 애착을 가진 룩을 골라 재해석하는 작업으로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크게 보면 이번 컬렉션은 ‘나비’가 주된 테마로, 고티에는 요즘 디자이너들이 하는 식으로(디지털 프린트나 수십 개로 쪼개진 패턴 등) 주제를 어렵게 꼬기보다는 직관적이고 극명한 방법으로 자신만의 ‘나비부인’을 그렸다. 날개처럼 펼쳐진 윙 슬리브가 특징인 볼레로와 어우러진 점프수트, 호랑나비의 날개를 수십 겹으로 겹쳐 만든 듯한 드레스, 모델들의 머리에 올려진 나비 모양 헤드피스가 이 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쉽게 풀어낸 경우다. 다분히 연극적인 의상들이라고 무시할 건 아니다. 만듦새 자체의 훌륭함은 ‘오트 쿠튀르’의 격에 절대 뒤떨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벌레스크 쇼 스타인 디타 본 티즈가 코르셋을 입고 피날레 무대에 오르자 쇼의 흥분이 절정에 달했고,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한동안 잊고 지낸 쇼의 환희를 만끽했다.

Armani Prive
작년에 아르마니는 레드 카펫용 드레스만을 모아 전시하는 ‘원 나잇 온리(One Night Only)’라는 이벤트를 뉴욕과 로마에서 열었는데, 이번 파리 쿠튀르 쇼에서도 전시와 함께 소피 마르소, 이자벨 위페르, 장 쯔이 등 유명 배우들을 포함한 전 세계 패션 피플 5백여 명을 갈라 디너에 초대해 아르마니 제국의 스케일을 실감하게 했다. 그만큼 아르마니의 드레스는 여배우들이 즐겨 찾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쿠튀르 라인인 ‘아르마니 프리베’가 2005년에야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프리베를 시작하던 당시, 전통과 현대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춰야 할지 난감했었다고 회상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쿠튀르는 상상과 창조력, 실험의 제국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실용성과 현실성을 바탕에 깔고 있다.” 작은 무늬들이 모여 줄무늬 효과를 내는 독특한 프린트의 볼륨감 있는 재킷과 팬츠 앙상블, 아라베스크 스타일의 장식이 들어간 동양적인 무드의 이브닝웨어가 특히 그런 면을 잘 표현했다. 한편, 이번 쇼의 테마인 ‘나이트’로 넘어가자 휘황찬란하게 아름다운 아르마니표 드레스들이 쏟아졌는데, 특히 가슴과 허리를 강조하는 뷔스티에 드레스의 다양한 변주가 놀라웠다. 곧 이어질 아카데미 레드 카펫에서 아르마니를 입기 위한 여배우들의 장외 경쟁도 그만큼 뜨거워질 전망이다.

Christian Dior
“멋진 쇼로 판타지를 충족시키면서도 현실적으로 입을 수 있는 옷을 제공해야 하는 것. 디자이너라면 패션의 양면성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크리스찬 디올(오트 쿠튀르는 여전히 ‘크리스찬 디올’이라는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의 쿠튀르 무대는 라프 시몬스의 모던함이 정점에 올랐음을 증명한 기념비적인 쇼였다. 쿠튀르에 반드시 요구되는, 엄청난 수작업이나 화려한 패션 테크닉을 표현하다 보면 아무래도 시대착오적이라고까지 보이는 과장된 결과가 나오게 마련인데, 이번 컬렉션에서는 최고급 기술에 현대적 디자인이 절묘하게 조화된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최고급 옷감을 정교하게 자르고 겹쳐 완성한 커팅 기술이 돋보인 가운데, 데이 웨어로는 쿠레주와 파코 라반을 연상시키는 60년대식 시프트 드레스와 디올을 대표하는 바 재킷의 변형된 디자인이 주로 나왔고, 이브닝 웨어에서는 미니에서 맥시에 이르는 다양한 길이의 드레스와 함께 옷감 표면에 주얼리 같은 인조 보석을 장식한 점프수트도 등장했다. 특히 물방울, 눈, 하트 등으로 표현된 프린트와 엠브로이더리로 장식한 운동화(샤넬 쿠튀르에서도 등장했다), 가느다란 리본 펜던트 목걸이 등은 젊은 고객층을 의식한 현실적인 장치로 호평을 받았다.

Atelier Versace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패션을 어렵게 풀어나가는 데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아틀리에 베르사체 컬렉션 역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비교적 쉽게 포착할 수 있다. 이번 시즌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패션과 음악의 아이콘인 그레이스 존스, 그리고 또 하나는 코앞으로 다가온 레드 카펫을 위한 드레스 시리즈!

먼저 그레이스 존스를 모티프로 한 의상들은 존스의 트레이드마크인 후드 달린 드레스나 재킷 등으로 표현되었는데, 물론 그레이스 존스의 것(후드 달린 드레스를 존스에게 처음 입힌 디자이너는 아제딘 알라이아였다)을 그대로 차용한 것은 아니고, 도나텔라가 매 시즌 발표하고 있는 여러 패널로 나뉜 몸에 꼭 맞는 드레스를 변형한 것들이다, 투명한 튤 소재 위에 검정 크리스털 조각을 그래픽적으로 배치해 마치 타투처럼 보이도록 한 장식 효과는 최근의 트렌드를 영리하게 반영한 디자인으로 관심을 모았다. 마지막은 역시 초록, 오렌지, 보라, 빨강 등 톡톡 튀는 색감으로 구성된 레드 카펫용 실크 드레스 시리즈! 새로울 것은 없지만 역시 베르사체다웠다.

Valentino
발렌티노의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와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듀오는 이번 쿠튀르 시즌,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에 도전했다. 바로 55곡의 오페라에서 영감을 받은 55벌의 쿠튀르 의상을 선보이는 것. 한 브랜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55곡에 달하는 작품 세계를 표현하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가능하긴 했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표현한 오프닝 드레스에는 이 곡의 악보를 그래픽적으로 프린트해 넣었고, 비제의 ‘카르멘’은 엄청난 주름이 잡힌 브론즈 컬러의 튤 드레스로, 푸치니의 ‘라보엠’은 크레이프 소재의 시스 드레스에 우아한 남색 캐시미어 케이프를 매치한 룩으로 표현되었다. 그렇다면 대자연을 노래한 폰키엘리와 퍼셀, 생상의 명곡은? 아담과 이브, 커다란 치타와 사자, 뱀과 공작새, 백조, 코끼리, 심지어 고릴라까지 등장한 다양한 정글 모티프 시리즈라는 결과를 낳았다.

오페라를 테마로 한 쇼답게 극적인 눈요깃거리로는 나무랄 데 없었다. 각 작품에 쓰인 테크닉도 놀라웠다. 하지만 “보면 몰라? 오트 쿠튀르잖아!”라고 스스로의 존재감을 요란하게 외치는 이 작품들은 옷장에만 고이 모셔두어야 어울릴 것 같았다.

Giambattista Valli
지암바티스타 발리가 오트 쿠튀르 쇼를 펼쳐 보인 지 벌써 여섯 시즌이 지났다. 레디투웨어 런웨이의 베테랑이자, 정식 쿠튀르 스케줄에 이름을 올린 디자이너로서는 비교적 젊은 그는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쿠튀르’를 만들려고 노력해왔다. 쇼장에는 은은하게 빛을 내는 거대한 금속 조형물이 런웨이 한가운데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현대적 감각이 옷에도 그대로 묻어 나오는 듯했다.

무엇보다 오트 쿠튀르 쇼에서는 보기 드물게 조형적으로 모양을 잡은 미니 드레스가 주를 이뤘다(프런트 로에 앉아 있던 미로슬라바 듀마 같은, 젊고 다리까지 예쁜 상류층 고객에게는 더욱 반가웠을 것이다). 브로케이드 소재의 미니 드레스 위에 소재와 패널, 반짝이는 엠브로이더리의 배치를 통해 각기 다른 컬러 블로킹 효과를 주면서 모든 룩마다 캐릭터를 달리한 점도 흥미로운 요소였다. 실크와 새틴 소재의 리본 모양 스커트나 컬러 블록 효과의 스커트 같은 룩들은 2012년 라프 시몬스의 디올 데뷔 쇼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지만, 소재와 톤, 장식의 조합은 워낙 요즘 패션의 대세이며 발리가 지속적으로 추구한 터라 딱히 유사성을 지적하기는 어려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