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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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상황에 대한 깔끔한 해설이고 가끔은 허를 찌르는 농담이다. 언젠가부터 한국 TV에서 자막은 카메라나 출연자만큼이나 당연한 요소가 됐다. 그중 가장 도드라진 ‘글발’은 과연 어떤 프로그램의 것이었까? 요즘 예능들을 자막만 뚝 떼어다 놓고 견주어봤다.

서바이벌 오디션 K 팝스타 시즌 3
프로그램 개요 YG, JYP, 그리고 안테나뮤직까지 한국의 주요 연예기획사 세 곳이 직접 심사에 참여해 가능성 있는 재목을 가리는 음악 서바이벌 오디션 쇼.

자막만 훑어보기 토크쇼나 리얼 버라이어티처럼 부지런히 농담을 치는 대신, 무대의 해설에 주력한다. 심사위원의 평을 요약하고 참가자들의 공연에서 주목할 만한 포인트를 짚어주는 게 자막의 일차적 용도. 시즌을 거듭할수록 경연의 질이 높아지고 있는 드문 오디션 쇼인데, 보다 보면 굳이 글로 된 설명을 덧붙여야 하는 걸까 싶다. <아메리칸 아이돌>이나 <엑스 팩터>가 자막 때문에 재미있는 건 아니니까.

좋거나 혹은 아쉽거나 ‘기타 하나와 목소리만으로 그 이상의 가득함이 느껴지는!’ ‘마치 대화를 하듯 가사를 주고받는!’ ‘감동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같은 문장은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강요하는 인상이다. ‘오랫동안 감정을 감추고 지냈던 소녀, 딱딱해진 감성의 벽을 부수는 또 한번의 도전’ 등 울먹거리는 코멘트도 다소 과하다. 한마디로, 상투적이거나 불필요한 말들이 너무 많다. 공연 전에는 ‘과연 소녀들은 심사위원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같은 자막이 습관적으로 붙는데, 긴장감 조성용으로도 큰 효과는 없다.

<K팝스타 시즌 3>의 자막을 더빙한다면 유명 프로듀서이자 <아메리칸 아이돌>을 거쳐 현재 미국판 <엑스 팩터>의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사이먼 코웰. 받아든 자막을 무시한 채 참신하게 거슬리는 비아냥을 애드리브로 난사할 것이다.

더 지니어스 : 룰 브레이커
프로그램 개요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연합과 배신이 꼬리를 무는 경쟁을 벌여야 하는 게임쇼.

자막만 훑어보기 이 프로그램만큼 자막이 절실한 포맷도 드물다. 매회 바뀌는 게임의 룰이 상당히 복잡하고 길기 때문이다. 귀로만 들어서는 3~4분간 이어지는 설명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별도의 재미를 얹어주지는 않지만 시청자가 내용을 좇는 데는 큰 도움이 되는 자막이다.

좋거나 혹은 아쉽거나 밥솥 사용설명서처럼 철저히 실용적이고 기능적이다. 그런 만큼 자막에서 나름의 특징이나 캐릭터는 읽히지 않는다.

<더 지니어스 : 룰 브레이커>의 자막을 더빙한다면 고문 호러 시리즈인 <더 쏘우>의 악당 직소. “자 이제 게임을 시작하지.”

꽃보다 누나
프로그램 개요 <꽃보다 할배>에 이은 두 번째 배낭여행 프로젝트. 윤여정, 김자옥, 김희애, 이미연까지 4명의 여배우와 짐꾼 이승기가 9박 10일간 터키와 크로아티아에서 겪는 좌충우돌을 담았다.

자막만 훑어보기 전반적으로 자막의 양의 상당한 편이다. 여행지 정보를 정리하고, 대사를 옮겨주는 것 외에도 캐릭터를 명확히 하고 스토리텔링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막을 적극 활용한다. 출연자들에게 워너비 여정, 로맨틱 자옥, 호기심 희애, 왈가닥 미연, 짐승기 승기 등 닉네임을 붙인 뒤 이를 자막으로 꾸준히 상기시킨 것도 하나의 예다. 덕분에 시청자들은 이 프로그램에서 각 인물이 맡을 역할을 수월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캐릭터가 잡히고 나니 드라마 역시 선명해졌다. 짐꾼보다 짐에 가까웠던 ‘짐승기’가 믿음직스럽게 성장해가는 과정은 <꽃보다 누나>의 주요한 스토리라인 중 하나다. 가끔은 대사만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산책을 나갔던 김희애는 그만 폭우에 발이 묶인다. 걱정이 된 이승기가 마중을 나가는데 망가진 우산이 자꾸만 그의 머리를 삼킬 듯 덮어버린다. 이 장면에서 제작진은 ‘식인 우산’이라는 설정을 자막으로 덧붙이며 농담을 건다. 촬영 이후, 후반 작업에서 만들어진 시나리오인 셈이다.

좋거나 혹은 아쉽거나 ‘식인 우산’ 에피소드처럼 자막으로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을 고민했다. 평범한 해프닝을 장르적인 이야기로 살려낸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한편으로는 자막이 시청자보다 앞서서 출연자들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도 많았다. 윤여정에게 ‘너무 멀고 강하게만 보이던 사람. 열흘간 여행에서 여린 마음을 알게 된, 이제는 승기의 소중한 누나’ 등의 해설을 곁들이고 이승기에게는 ‘그를 바꾼 건 단 열흘, 스스로의 노력이 그를 자라게 했습니다’ 같은 문장을 선물한다. 너무 착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직접적인 요약 정리의 멘트들이 오히려 해당 장면의 뭉클함을 반감시킬 때가 있다.

<꽃보다 누나>의 자막을 더빙한다면 초록색 지붕집의 빨강머리 앤. 수다스럽고 유쾌하고 상상력 풍부하고.

마녀 사냥
프로그램 개요 연애를 하며 겪을 수 있는 온갖 상황을 남자의 시점에서 들여다보는 토크쇼. 신동
엽, 성시경, 샘 해밍턴, 허지웅이 진행을 맡고 있으며, 2부에는 한혜진, 곽정은, 홍석천 등이 합류해
다른 시각의 의견을 보탠다.

자막만 훑어보기 시청자 사연부터 진행자 간의 갑론을박까지 오가는 말이 워낙 많은 쇼다. 자막은 출연자들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옮기거나 알기 쉽게 요약하는 정도에 그친다. 거침없이 까발리고 가끔은 못된 척도 하는 19금 예능이지만 자막 활용법은 모범생에 가깝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좋거나 혹은 아쉽거나 무리하게 대화 사이를 비집고 들지 않는 자막의 경제적인 사용에 오히려 점수를 주고 싶다. 굳이 트집을 잡자면 출연자들에게 일부러 어색한 CG를 덧입히고(외국인 남성 흉내를 내는 성시경에게 스냅백을 씌우고 금목걸이를 걸어준다거나) 튀는 서체를 돌발적으로 삽입해 주의를 끄는 식의 연출이 언뜻 <라디오스타>를 연상시킨다는 것. 제작진 중 한 명인 김민지 PD가 이 프로그램 출신이다.

<마녀사냥>의 자막을 더빙한다면 <연애의 목적>의 유림(박해일). 음흉하게 잘 살릴 수 있을 듯.

정글의 법칙 i n 미크로네시아
프로그램 개요 원시의 자연 환경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태평양의 섬나라 미크로네시아에서 김병만 족장과 예지원, 박정철, 시완, 엑소의 찬열 등이 자급자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하드코어 리얼 버라이어티.

자막만 훑어보기 <정글의 법칙> 시리즈는 종종 예능보다는 교양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느껴진다. 안전한 상황 설명에만 머무르는 자막만 봐도 <무한도전>의 무인도 특집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지금도 나쁘지는 않지만 좀 더 아이디어를 발휘해도 괜찮을 듯하다는 생각은 든다. ‘국물 한 입에 피곤함에 감긴 눈도 번쩍’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정도의 코멘트는 <6시 내 고향>에서도 충분히 봤던 것들이다.

좋거나 혹은 아쉽거나 크게 거슬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상적이지도 않다. 자막을 전부 지워버린다 해도 눈치를 못 챌 것 같다.

<정글의 법칙 in 미크로네시아>의 자막을 더빙한다면 전직 SAS 대원이며 생존의 달인인, 그리고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맨 vs 와일드>와 <최악의 시나리오>를 진행했던 베어 그릴스의 목소리를 빌린다.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정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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