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약하는 배우부터 새로운 실험을 선보인 웹툰 작가까지, 자신의 이름 자체가 곧 흥미로운 브랜드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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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이지 않는 소녀 – 배우 김현수

“마동석 아저씨하고는 <살인자>를 찍기 전, <더 파이브> 촬영장에서 먼저 만났어요.무섭게 생기셨는데 알고 보면 재미있고 무지 착하세요. <굿 닥터> 때 만났던 주원 오빠도 되게 친절하게 절 챙겨주셨고요. 왜 마동석 아저씨는 아저씨고 주원 오빠는 오빠냐고요? 서른 넘어가면 다 아저씨예요, 흐흐.”

좋은 배우는 후천적인 노력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좋은 아역 배우는 선천적인 재능에 빚지는 부분이 크다. 제아무리 조숙하고 영리한 아이라고 해도 계산과 전략, 혹은 야심에서 어른을 앞지르는 경우는 드물다. 인상적인 어린 배우들의 연기는 냉정한 이성 대신 솔직한 직관을 좇은 결과이자 타고난 매력이 빚은 마법일 때가 많다. 그래서 이들에게 출연한 작품이나 맡았던 캐릭터에 대해 묻더라도 썩 조리 있는 대답을 듣기는 어렵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했을 뿐인 아이에게 연기는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도가니> <무서운 이야기> 등의 영화를 거쳐 최근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 출연한 김현수에게도 그건 마찬가지다. 스스로 “낯가림이 심하다”고 말하는 소녀는 짧은 답변을 마칠 때마다 수줍은 듯 웃었다. 어쩌면 그렇게 잘 울 수 있는지 물었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이 번진다. “잘 모르겠어요. 내용이 슬프면 그냥…. (눈물이) 안 나오면 슬픈 상상을 해요.” 김현수가 세련된 기교나 정교한 표현을 구사하는 배우가 아닌 건 분명하다. 하지만 감정을 흔드는 연기는 수학보다는 화학, 그것도 화학 실험실에서의 예상치 못한 사고에 가까울 때가 많다. 이제 막 열다섯 살이 됐고,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은 그는 너무 많이 아는 연기자들이 할 수 없는 것들을 한다.

실질적인 데뷔작인 황동혁의 <도가니>가 대표적인 예다. 끔찍한 범죄에 짓밟히는 청각장애아 역할을 맡은 어린 배우는 카메라 앞에 무기력하게 서는 것만으로도 관객을 몰입시켰다. 주연을 맡은 새 영화 <살인자>에서는 정체를 감춘 채 살아가는 연쇄살인범(마동석)으로부터 섬뜩한 위협을 받는다. 미안한 말일 수도 있는데 이 배우는 훌륭한 ‘피해자’다. 금세 눈물이 맺힐 듯한 큰 눈과 비밀을 품은 듯한 표정을 가졌고 순간적으로 감정을 터뜨리는 집중력도 인상적이다. <별에서 온 그대>에서는 천송이의 아역뿐만 아니라 도민준이 조선시대에 마주친 소녀까지 1인 2역을 했다. “자신과는 다르게 싸가지가 없어서” 공감하기 어려웠다는 천송이 역할보다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허위 의식에 잔인하게 희생되는 어린 과부를 연기할 때 확실히 더 빛을 발하는 느낌이었다. 결국 그는 상대역인 김수현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며 사극 파트의 촬영을 마쳤다. “또래랑은 비슷한 장면을 찍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어른하고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좀….” 함께 비극적인 멜로 연기를 한, 그리고 이름도 엇비슷한 두 배우는 서로 띠동갑이라고 한다.

그런데 김현수를 괴롭히는 건 범죄의 희생양이 되고, 시부모의 욕심 때문에 목숨을 잃고, 살인마에게 쫓기는 끔찍한 간접 경험이 아니다. 얇은 옷을 입고 추운 계절에 하는 밤샘 촬영. 그에게 배우로서의 가장 큰 고충은 이렇게 요약된다. 지금껏 참여한 작품들의 센 설정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살인자>를 포함한 모든 출연작이 미성년자 관람 불가였다는 점을 언급하자 수업 시간에 만화책을 보다가 들킨 것처럼 흐흐흐 웃으며 말한다. “사실은 엄마랑 같이 전부 다 봤는데…. 시나리오 읽으면서 이미 내용은 다 파악하기 때문에 괜찮아요.” 배우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인지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친구들은 학교 끝나면 또 학원에 가서 10시까지 공부하고 그러니까요. 맨날 그러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성인이 된 뒤에도 연기는 계속할 생각인데, 그 무렵에는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은 바람이 있다. “지금까지는 가족과 함께 멀리 다녀온 적이 드물었거든요. 나중에 여행 경험이 쌓이고 나면 그 내용으로 책을 쓸 수도 있을 것 같고요. 뭐든 재미있는 걸 잔뜩 해보고 싶어요.”

왼쪽부터 | 정효민 PD, 김지윤 작가, 김민지 PD

왼쪽부터 | 정효민 PD, 김지윤 작가, 김민지 PD

조금 야한 우리 연애 – JTBC <마녀사냥> 정효민 PD · 김민지 PD · 김지윤 작가

“얼마 전, 여자 후배가 인터넷 연결이 잘 안 되자 ‛선배, 나 지스팟 좀 켜줘’라고 했다며, 이것이 나에 대한 호감인가 고민된다던 남학생의 사연이 왔어요. 고민 끝에 결국 방송으로 내보낸 건 못 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스팟이란 단어가 나온다는 이유로,
전부 외설적이거나 선정적인 건 아니니까요. ” -정효민 PD

“2부 게스트로 초대하고 싶은 인물이라면 … 너무 많은데 10명 이야기해도 되나요?(웃음) 실제로 술자리엔 어린 친구, 나이 많은 친구, 친한 친구, 아직은 어색한 친구들이 모두 모이잖아요. 야한 얘기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해서 재미있고, 부끄럼 많이 타는 사람은 놀리는 재미가 있고. 그렇게 진짜 술자리처럼 다양한 손님이 놀러 오면 좋겠어요.” -김민지 PD

“방송에 나오는 시청자 사연 진짜로 오는 거 맞냐고 꾸며 쓴 거 아니냐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서운해요. 사연 게시판에는 파일 이름이 ‘마녀사냥 19’, ‘마녀사냥 20’인 음성 파일이 올라올 정도예요. 그만큼 여러 번 녹음을 해서 보낸 거죠. 오히려 사연이 너무 드라마틱하거나 어느 게시판에서 본 것 같을 때는이, 사연이 정말 자신의 이야기인지 사실을 확인하는 게 우리의 몫이라니까요” . -김지윤 작가

<마녀사냥> 첫방송이 나가던 날, 메인 작가 김지윤의 아버지는 딸의 첫방송을 지켜보다 말고 ‘흠…’ 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굴욕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 방에서 ‘띠리링’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초록색 포자가 터지는 효과음 말이에요. 혼자 보다 걸리신 거죠(웃음).” 반대로 김민지 PD는 부모님은 물론 친척들에게까지 재미있게 봤다는 연락을 받았다. “사실 <라디오스타>도 딸이 하니까 억지로 보셨던 거지, 도대체 뭐가 재미있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워하셨어요. 그런데 이번엔 달랐어요. <마녀사냥>은 누구나 아는 사랑 이야기를 다루니까요. 지식이 없어도 트렌드를 몰라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거죠.”

아슬아슬하게 ‘19금’을 넘나들면서 기존의 연애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과의 차별에 성공한 <마녀사냥>. 하지만 정효민 PD와 김지윤 작가는 ‘19금’이 목표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처음엔 15세 이상 시청자 등급이었잖아요. 지상파에서도 연애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은 많았지만, 19금 이야기를 처음부터 배제하느라 너무 말랑말랑하기만 하고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게 아쉬웠죠. 연애를 이야기한다면서, 연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적인 고민은 말할 수 없는 현실을 바꾸고 싶었어요.” 김민지 PD는 사연을 채택하는 데 있어서도 얼마나 세고 야한가는 중요한 기준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어느 날은 19금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만 할 때도 있어요. 19금의 수위가 반드시 재미와 비례하지는 않거든요. 사연을 채택하기 전 제작진끼리 모의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이야깃거리가 많은 사연인지를 고민해요. 괜히 야하기만 하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사연은 오히려 배제 대상에 가까워요.”

무엇보다 슬금슬금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는 MC들의 솔직함과 서로간의 궁합은 <마녀사냥>의 가장 큰 원동력이다. 상대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지를 알려달라는 사연을 나누는 ‘그린라이트를 켜줘’ 녹화 현장에서 ‘이 사람 좀 불러보면 안 돼? 답답해, 얘기해주고 싶어. 이러다 마녀한테 당한다니까?’라는 대화가 오가는 것 역시, 시청자가 아니라 술자리에서 만난 친구나 동생을 대하는 자세에 가깝다. MC들이 스스로 즐거워하는 데서 <마녀사냥>의 힘이 나오는 만큼, 그들이 계속해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재를 던져주는 것이 김지윤 작가가 생각하는 가장 큰 고민이기도 하다. “너무 비슷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해서도 안 되고, 그저 멀리서 구경하듯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지나치게 특별한 케이스여서도 안 돼요. 코너든 사연의 내용이든 누구나 개입해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딱 그 정도 수위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던져주는 게 숙제인 것 같아요.”

얼마 전 종편 프로그램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시청률 3%를 돌파했지만, 그렇다고 더욱 자극적인 방향으로 밀어붙일 계획은 없다. “우리 프로그램은 호감과 비호감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어요. 아직은 대체적으로 호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다행이죠. 하지만 시청자들은 언제든 돌아설 수 있으니까, 조심하면서 만들고 있어요(김민지).” 정효민 PD의 외모만 봐서는 전혀 ‘섹드립’과 먼 삶을 살았을 것 같다고 운을 떼자, 김지윤 작가는 이 프로그램의 힘이 바로 거기서 나온다고 거든다. “정효민 PD가 ‘우리 같은 사람이 만들면, 적어도 수위 때문에 불쾌한 시청자는 없을 거야’라고 말하는 데 마음이 움직였어요. 이 프로그램의 관건은 시청자가 불쾌하냐 그렇지 않느냐거든요. 적어도 섹드립에 특화되어 있지는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다면, 상식 선에서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보기에 불편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었던 거죠.”

물론 제작진의 예상이 100% 들어맞지는 않았다. 시청자는 제작진의 예상보다 훨씬 더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길에 카메라를 세우고 시민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원생중계는 이제는 대놓고 성관계 시간이나 성기 사이즈 등을 묻고 답할 만큼 대담해졌다. “방송 초반 MC들은 조심스러워한 반면 길에서 만난 시민들, 특히 여대생들은 방송에 나갈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대담한 질문을 꺼내곤 했어요. 평범한 질문을 던지면 ‘이게 다예요?’라고 말할 정도로요. 방송을 거듭하면서 시청자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 셈이에요.” 2부 녹화 현장은 이미 방청 신청자가 줄 서 있을 정도로 인기다. 편집이 되지 않은, 실제 녹화 현장에서 오가는 더 센 수위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데 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인터뷰 내내 대답 대신 ‘핥핥핥핥’ 웃고 있던 정효민 PD에게 미방영분을 모아서 특집을 할 계획은 없느냐고 물었다. “글쎄요. 저희가 죽기 전에?(웃음)”

찌꺼기를 보라 – 시인 김경주

“물리적인 나이를 떠나 젊은 시를 쓰는 사람은 젊은 시인이죠. 늙는 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지만 확실히 시에는 젊은 긴장이 필요해요. 긴장이 사라지면 시가 허랑해지거든요. 말도 안 되는 언어의 중얼거림으로 세상을 관통하는 누군가는 늘 필요하다고 봐요.”

김경주를 만난 곳은 상수동의 대안문화공간인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였다. 1월 말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신간 <펄프 극장>의 출판 기념 전시를 열 거라고 했다. 주도해서 판을 벌리긴 했지만 전시장에 본인의 손을 탄 건 하나도 없다. 대신 다양한 분야의 동료 예술가들이 책의 주제나 감수성과 맞닿을 법한 작업을 내놓았다. 그럼 저자는? 비키니옷장 안에 앉아 있을 계획이다. 신년 운세부터 등단 궁합까지, 문학에 관한 신변잡기 상담이 그곳에서 이루어진다. “독자와 가까이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거죠. 흔하고 뻔한 출판 이벤트에 불려가 시간을 보내는 대신 이 책을 통해 저와 대화하려는 사람들을 직접 초대하고 싶었습니다.” 시인보다는 래퍼에 가까운 속도로 그가 바쁘게 문장을 쏟아냈다.

<펄프 극장>은 쌉쌀하게 웃기는 블랙 에세이이자 실제 경험담과 허황한 상상력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팩션이다. 김경주가 이전에 발표한 시나 에세이와 비교하면 한결 가볍고 유쾌하다. 크리스마스 실, 비키니옷장, 밍크 담요, 술빵, 펜팔북… 단막극 같은 47개의 에피소드는 추억 속의 사물들에 관한 언급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화자는 밍크 담요나 술빵이 뭔지도 모를 외국의 아티스트들이다. 풍선껌을 즐겨 씹는 재수생 스톡앙리나 경남 마산의 초등학생과 펜팔이 된 롱포드 레이몬드의 사연을 읽고 있노라면 달변에 속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든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하기는 좀 부끄럽잖아요. 그래서 소설, 콩트, 혹은 단막극 같기도 한 프레임을 설정한 거죠.” 1980~90년대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펄프 극장>은 <응답하라 1994>가 아니다. 김경주는 노스탤지어 섞인 회고담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밝힌다. 그보다는 과거의 조각들을 동시대적인 농담거리로 삼고자 한다. “시대적 환기는 제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조리개를 확 조여서 당시를 들여다볼 생각이었다면 팩션이나 페이크 같은 장치 없이 정직하게 썼을 거예요. 그쪽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훨씬 유리할 테니까. 하지만 그보다는 80년대든 90년대든 지금이든 우리 주변에 찌꺼기처럼 꾸준히 흘러 다니는 것들을 다루고 싶었죠.” 시인은 펄프(pulp)라는 단어가 지닌 여러 뜻 가운데서도 ‘찌꺼기’를 특히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득 도시의 상수도 설계를 비유로 들었다. 미관상의 이유로 하수관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매설되곤 한다. 결국 보이지 않는 유기물과 무기물의 흐름이 있기 때문에 도시의 건강이 유지되는 셈이다. 김경주는 시대의 하수관들을 파내어 의미 있는 찌꺼기들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혼란스럽지만 즐거운 잡탕인 <펄프 극장>은 그 같은 시도 중 하나다.

펜 노동자라면 보통의 직장인들이 사무실에서 보내는 만큼의 시간을 매일매일 책상 위에 쏟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워낙 부지런히 쓰는 사람이다 보니 올해만도 3~4권의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그중에는 5년 만에 발표하는 시집도 포함되어 있다. 왜 시인이 시를 쓰는 작업이 특히나 더뎠던 걸까? “예전에는 1년 만에 다음 시집을 내놓기도 했어요. 그래서 제가 되게 쉽게 쓸 거라고 착각들을 하더라고요. 그렇지 않거든요. 에세이 연재야 6~7개씩 무리 없이 하더라도 시는 한 달에 한 편 쓰기가 어려워요.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우는 작업이니까요. 이번에는 먼저 머금고 싶었어요. 만 5년 정도 꽉 채운 뒤 나오는 시인데 전과 달리 굉장히 담백하게 쓰려고 했어요.” 1월 말쯤 출간될 시집은 아직 제목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결정된 바는 있었다. “굉장히 얇게 만들었어요. 대학생들을 가르치며 관찰했더니 시집을 끝까지 읽는 녀석이 드물더라고요. 얇게 만들어서 끝까지, 빨리 읽도록 하려고요(웃음).”

영화와 음악 사이 – 영화음악 감독 모그

“규모로 압도하기보다는 최소한의 악기만으로 꼭 필요한 만큼의 사운드만 만들어내는 쪽을 선호하는 것 같긴 해요. 영화는 소설보다는 시에 가깝지 않나 생각해요. 이야기든 음악이든 무조건 방만하게 집어넣기보다는 얼마나 압축적으로 전달하느냐가 관건이죠.

영화음악은 ‘영화’와 ‘음악’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 작업일까? 이성현이라는 본명보다 <정글북>의 주인공에게서 따온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모그(Mowg)는 전자라고 답했다. “일례로, 보통의 음악에 필요한 구조가 영화 음악에서는 얼마든지 무시될 수 있어요. 멜로디 라인, 화성, 혹은 일관적인 리듬마저 없는 스코어도 흔하고요. 곡의 완결성 보다는 극의 정서에 집중해야 할 때가 많죠.”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그 자체로 독립된 결과물보다는 빈칸에 잘 들어맞을 일부를 고민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베이시스트로 출발해 현재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바쁜 음악 감독 중 한 명이 된 모그는, 빈칸을 잘 채우는 것 못지않게 지나치게 뻔하거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퍼즐 조각을 피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잔혹한 누아르였던 <악마를 보았다>나 컴컴한 성장극인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에는 오히려 서정적인 멜로디를 곁들였다. 김준성과의 공동 작업이었던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도 시종일관 거창하기 일쑤인 사극 OST 특유의 클리셰를 피해가려는 시도가 읽힌다. 그는 기존의 작품들이 택했던 것과는 다른 방법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봤다. 평가 역시 섭섭지 않았다. 지난 4년간 청룡영화상에서는 세 차례, 그리고 대종상영화제에서는 한 차례 음악상을 수상했다. 물론 상이라는 게 한 사람이 거둔 성취에 대한 결정적 증명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현재의 위치를 가늠하게 해주는 단서인 건 분명하다.

가장 최근에 마무리한 작업은 <도가니>의 황동혁 감독과 두 번째로 합을 맞춘 <수상한 그녀>다. 젊은 시절 악극단원을 꿈꿨던 70대 여성이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20대의 몸을 되찾고, 다시 음악을 시작하게 된다는 설정의 코미디다. 김정호의 ‘하얀 나비’나 채은옥의 ‘빗물’ 등 흘러간 유행가들이 여럿 쓰였는데, 사실 초반에 고려했던 건 전설적인 디바인 김추자의 곡들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의 사이키델릭한 사운드가 지금의 관객에게 얼마나 와 닿을까 싶더라고요. 제 취향을 과시하는 자리는 아니니까 감독과 의논해가며 최대한 대중적인 코드를 담으려고 했어요. 어쿠스틱한 포크가 요즘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도 고려했고요.” 직접 노래를 부른 주연 심은경과는 남다른 인연이 있는 사이다. <헨젤과 그레텔>에 출연할 무렵부터 음악에 욕심이 있었던 어린 배우가, 공통의 지인 덕분에 알게 된 모그의 작업실에 꾸준히 찾아와 기타, 디제잉, 작곡 등을 배웠던 것이다. 그는 <수상한 그녀>에서 심은경이 무척 만족스러운 수준까지 노래를 해줬다고 칭찬했다. 그런데 정작 배우 본인은 이번 작품을 계기로 음악에 대한 꿈을 접은 모양이다. “은경이가 프로로서의 레벨을 요구받는 작업은 처음 해봤잖아요. 생각했던 것과 다른 부분을 발견하게 된 거죠.”

<수상한 그녀>에 마지막 음표를 찍고 난 뒤에도 스케줄은 여전히 빼곡하다. 이재규의 <역린>과 박흥식의 <협녀>를 동시에 작업 중이며 곧 <남자사용설명서>의 이원석이 연출을 맡은 <상의원(가제)>에 합류할 예정이다. 공교롭게도 모두 사극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들이에요. <역린>은 누아르고 <협녀>는 가슴 아픈 멜로에 가깝죠. 일단 촬영에 돌입해봐야 알겠지만 <상의원> 역시 희한한 작품이 될 것 같아요.”

그는 시대극인지 SF인지 영화의 외형을 따지기에 앞서 캐릭터의 내면이나 인물 간의 관계를 먼저 살핀다. 시나리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신선하되 엉뚱하지 않고, 수긍할 만하지만 뻔하지는 않은 결과가 얻어진다고 했다. 정글의 야수처럼 혼자 베이스를 연주하던 그는 영화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한결 신중하고 폭넓은 대화를 시도하게 됐다. “어렸을 때는 제 이야기에만 바빴어요.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혼잣말만 하는 기분이라 오히려 감흥이 떨어지더라고요. 지금은 외부와 소통하고 합의를 이뤄가는 작업에서 만족을 얻는 것 같아요. 아티스트라기보다는 프로로서의 만족이에요.”

웹툰의 신 – 웹툰 작가 하일권

“<방과 후 전쟁활동>의 화자이자 기록자인 ‘김치열’은 사실 어느 학교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인물이죠. 딱히 나서지도 못하고, 도피하지도 못하고, 그저 애들 사이에 끼여 하루하루 꾸역꾸역 살아내는. 독자들이 치열이가 되어 함께 느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죽음을 예고하는 건 허구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방과 후 전쟁활동>은 허구로서의 특권을 내려놓는다. 미확인 구체와의 전쟁을 위해 갑자기 군인이 된 고등학생들의 138일을 기록한 이번 작품에서, 아이들은 그 어떤 복선과 전조도 없이 무참히 죽거나, 반대로 누군가를 죽인다. 엑스트라부터 죽어 나가고 주인공은 살아남는 뻔한 공식이 성립될 틈 또한 없다. “전쟁이란 건 그런 거니까요. 누구를 죽여야겠다 또는 살려야겠다는 계획은 없었어요. 내가 자의적으로 상황을 만들기보다는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두면서, 처한 상황에서 당연한 선택을 하기로 했죠. 그저 당시 구체 앞에 서 있는 캐릭터가 죽는 셈이에요.”

전쟁은 그 이름 자체만으로도 잔혹하지만, 고등학생들이 총을 든 풍경은 더욱 가혹했다. 특히 고3 학생들을 상대로 가산점을 들먹이며 전쟁에 참여하기를 종용하는 기성 세대의 모습엔 부인하기 어려운 실제가 겹쳐진다. 가산점에 목을 매며 점점 살인자로 바뀌어가는 인물인 ‘국영수’를 향한 작가의 애틋한 마음 역시 그 때문일 것이다. “후반부 즈음 댓글을 보니, 국영수가 절대악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더군요. 제가 잘못 그렸나 봅니다(웃음). 영수는 일반적인 고등학교 입시 생활에서는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조용히 공부만 하는 학생이었겠죠. 그랬기에 전쟁이 닥쳤을 때 가장 큰 혼란을 겪으리라 예상했고요. 물론 영수의 마지막 선택은 충격적이지만, 영수에 맞서는 남은 아이들의 선택 역시 그에 못지않게 잔인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번 만화를 정작 고등학생들은 (공식적으로는) 볼 수 없게 됐다. 연재 도중 19세 이용가 등급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웃기게 됐죠. 그래도 다른 루트로 봤겠지만요(웃음). <방과 후 전쟁활동>을 잔인하고 폭력적이라고 평한 기사 때문이었는데, 정말 내 만화를 제대로 보고 학생들이 봐서는 안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전쟁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잔인한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러한 장면보다는 학생들이 처한 상황 자체가 더 잔인한데 말이죠.”

전작이었던 <목욕의 신>이 데뷔 이후 최고 히트작이란 걸 감안하면, 조회수에 대한 부담이 없을 수 없는 <방과 후 전쟁활동>에서 기존에 일관되게 고수해온 장기를 버렸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다. 컷과 컷 사이에 엄청난 여백을 넣어 스크롤을 내리며 읽도록 한 연출법은 쫀쫀한 컷 구성에 자리를 내주었다. 수많은 작가가 그러한 연출법을 사용하게 된 지금, 스크롤 연출이 식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번엔 소모적으로 팍팍 내리면서 읽기보다는, 그림을 오래 두고 볼 수 있었으면 했어요. 내레이션 역시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고, 처음부터 정하고 시작했어요. 지겨워졌으니까요. 대신 학생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시점으로 그려나가기로 했죠. 다만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아이들의 인터뷰 영상을 택했습니다.”

주로 30여 회로 완결되던 기존의 작품과 달리, 1년여에 걸쳐 총 51회의 연재를 끝낸 것 역시 하일권으로서는 새롭고 고된 경험이었다. 특히 아이들의 슬픈 결말을 구체화하기 시작한 즈음부터는, 작가 자신도 우울한 감정을 견디기가 힘들어 빨리 끝내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저야말로 새드엔딩을 싫어하는 독자예요. 막 욕하면서 왜 이렇게 끝냈냐고, 너무하다고 하죠. 하지만 작가로서는 해피엔딩이 무책임한 결말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무작정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하기엔, 뭘 다 행복하게 살아요. 사실 그렇지 않잖아요.” 그럼에도 독자들에게 슬픈 결말은 작가 자신에게도 버거워, 다음 작품은 밝은 걸로 일찍이 정해두었다. 아주 빠르면 오는 5~6월 즈음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쉬고 싶지만, 백수로 오래 있을 순 없잖아요. 이제 결혼했으니까(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