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TV와 스크린을, 포스터와 달력을, 그것도 모자라 책받침까지 점령했던 누나들. 2014년을 살고 있는 일곱 명의 남자가 그 엄청난 누나들에게 뒤늦은 고백을 바친다.

김완선
김완선이 데뷔한 때는 1986년, 내가 눈 나빠진다고 TV 보지 말라는 잔소리를 듣던 바로 그 시절의 일이었다. 어리지만 무척이나 생각이 진보적인 나여서 김완선의 등장을 목격하자마자 벌떡 일어나 “저거야! 저게 내가 원하던 거야!”라고 외칠 수 있었더라면 나중에라도 길이길이 자랑할 만한 일이 되었을 터다. 하지만 불행히도 ‛뭐 저런 이상한 여자가 다 있지? 노래도 참 이상하군. 저런 건 분명 금세 묻혀버릴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김완선의 데뷔곡인 ‘오늘밤’은 산울림의 베이시스트 김창훈이 작곡한 곡으로 록의 에너지와 댄스의 섹시함이 ‛무심한 듯 시크하게’ 결합된 명품이었고, 김완선은 이 곡에 가장 걸맞는 디바였다. 놀랍게도 데뷔 당시 김완선은 겨우 열입곱 살, 데뷔 시기로만 보면 최근의 아이돌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어떤 소녀 아이돌을 그 자리에 대입한다고 해도 김완선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예를 들어 언제나 나를 감동시키는 전효성이 그 시기에 ‘오늘밤’을 부르고 있었다고 생각해보면, 역시 그 시기 김완선이 내뿜던 매력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지금의 아이돌들이 놀라운 베이글이거나 미려하고 아름답기는 해도, 김완선 같은 전위적이고 아방가르드하기까지 한, 상식을 넘어선 도발은 가지지 못한 것이다.

당시에는 김완선이 열일곱이라는 것만으로도 이슈가 되었는데, 그 도발적인 섹시함이 도저히 십대로는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 시절 김완선은 노래하는 내내 한 번도 웃음 짓지 않았으며, 시종일관 화면 밖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노려 보고 있었다. 그것은 섹시함을 넘어서 약간의 ‘야성’이라고 해도 좋겠고, 더 넘어서 ‘귀기’라고 표현해도 좋은 것이었다. 요컨대 이 순간의 김완선에게는 나중에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오라가 있었다. 지금의 아이돌들도 좋지만 그들의 표정이나 퍼포먼스 하나하나에는 ‛이렇게 하면 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겠지. 이런 점을 좋아하겠지’라는 예정된 프로토콜이 가득하다. 그때의 김완선에겐 그렇지 않은 생생함이 있었고, 그렇기에 그녀의 데뷔는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브라운관을 대표하는 섹시함의 화신으로 말이다. 깜악귀(눈뜨고코베인 보컬, 팟캐스트 ‘인디 돋는 밤’)

숀 영
이 글을 청탁받자마자 “숀 영으로 할게요” 라고 말했다. 담당 기자는 말이 없었다. 뭐, 예상했던 일이다. 당신이 80년대 이후 생이라면 숀 영이 누군지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테니까. 숀 영은 80년대의 가장 영롱한 스타 중 하나였다.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1982)와 데이비드 린치의 <사구>(1984)로 스타덤에 오른 숀 영은 <노 웨이 아웃>(1987)과 <월 스트리트>(1987)로 할리우드의 연인이 됐다. 나는 <블레이드 러너>에서 숀 영이 처음 등장한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녀가 화면에 등장하자 숨이 저절로 멈췄다. 얼마나 숨이 크게 멈췄던지 숨을 다시 쉬기까지 20여 초는 흐른것 같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숀 영은 안드로이드를 연기했다. 인간이 만들었고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은 아닌 존재다. 머리를 마치 포마드를 바른 것처럼 쓸어 올리고 두툼한 모피를 입은 채 담배를 피우는 숀 영에게는 거의 인공적일 정도로 병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건 80년대 다른 여배우들이 지닌 섹시함이나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숀 영은 마치 독일 표현주의 시대의 거장들이 흑백의 빛으로 빚은 핏기 없는 오브제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걸로 숀 영의 시대는 끝이었다. 그녀는 팀 버튼의<배트맨>(1989)에 주인공 비키 베일 역으로 캐스팅됐지만 리허설 도중 말에서 떨어져 팔을 부러뜨렸다. 촬영이 시급했던 제작사는 그녀를 자르고 킴 베이싱어를 캐스팅했다.

이를 갈던 숀 영은 팀 버튼이 <배트맨 2>에서 캣우먼을 연기할 여배우를 뽑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캐스팅이 되기도 전에 온갖 TV 쇼에 캣우먼 복장을 하고 등장했다. 이 노골적으로 절박한 몸짓에도 불구하고 팀 버튼은 미셸 파이퍼를 캐스팅했다. 숀 영은 대신 <에이스 벤츄라>(1994)에 남자 성기를 단 트랜스젠더 악역으로 출연했는데, 그건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몰락이었다. 이후 그녀는 잊혀진 스타의 모든 꼴불견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이베이에 자기 일기장을 팔려고 내놨다가 삭제하고,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에 자신이 캐스팅되지 않자 리들리 스콧에서 악담을 퍼붓고, 술을 마시고 시상식장에서 난동을 부리다 쫓겨났다. 나는 가끔 섬뜩한 상상을 한다. 숀 영이 만약 리버 피닉스처럼 젊어서 사라졌더라면, 그녀는 지금쯤 불멸의 아이콘이 됐을 거라는 상상 말이다. 젊음은 모질도록 짧고 목숨은 애처로울 정도로 길다. 80년대의 그녀는 인터뷰에서 “나는 젊고 아름답다. 그렇다고 나를 미워할 필요는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곤 했다. 나는 그 시절의 숀 영을 지금도 머릿속에 박제해두고 있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의 기억만으로도 영원히 아름다울 수 있다. 김도훈(<GEEK> 피처 디렉터)

종초홍
2013년은 내게 장국영의 10주기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면서 불현듯 함께 떠오른 존재가 있다. 바로 장국영, 주윤발과 함께 <종횡사해>(1991)에 출연한 종초홍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세 사람은 미국으로 건너가고, 부부 사이인 제임스(장국영)와 홍두(종초홍)는 무려 세 명의 자식을 낳고 산다. 홍두의 옛 남자친구이기도 한 아해(주윤발)는 농담처럼 그 집의 가정부로 지낸다. 1990년대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마지막으로 장식한 대배우들의 향수 어린 합작품이다. 홍콩 영화의 수많은 ‘여신’ 중에도 종초홍은 임청하와 함께 성숙한 연상의 여인으로 다가왔다. 그때만 해도 장만옥은 장난기 많은 말괄량이였고, 왕조현은 백치에 가까웠다. 장백지와 장쯔이는 등장도 하기 전이다. 굳이 임청하와 비교하자면, 종초홍은 기대고 싶은 누나인 반면 임청하는 좀 무서운 누나라고나 할까. <가을날의 동화>(1987), <타이거맨>(1989)의 그녀는 진정으로 아름다웠다. 영화 속에서 그녀를 평생 기다리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산골마을을 헤매던 주윤발의 마음이 딱 내 마음이었다.

하지만 종초홍은 <종횡사해>를 끝으로 사실상 영화배우 생활을 접었다. 이후 결혼한 뒤 가정 생활과 자선 사업에 충실했다. 종초홍 부부는 중화권 연예계에서 금슬 좋기로 유명했으나, 지난 2007년 남편 주가정이 대장암으로 세상을 떴고, 그들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 아해 역의 주윤발 또한 유산의 아픈 상처로 슬하에 자식이 없고, 장국영은 알다시피 가정을 꾸리기도 전에 역시 세상을 떴다. <종횡사해>의 결말과는 전혀 다른 우울한 현실이다. 그래서 ‘응답하라 종초홍’의 마음으로 잘 지내고 있는지 무척 궁금해하곤 했는데, 최근 홍콩을 찾았을 때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신작 DVD 타이틀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녀가 유명해지기 전 출연한 일종의 에로 영화들이 다수 출시된 것을 봤다. 그중에서도 과도하게 노출한 일부 DVD들을 괜히 다른 타이틀들 뒤에 숨겨놓고 돌아왔다. 굳이 더 지난 과거로부터의 응답은 싫었다고나 할까. 물론 그 DVD들을 다 사가지고 돌아오긴 했지만. 주성철(<씨네21>기자)

휘트니 휴스턴
무려 7곡이다. 1985년 실질적인 데뷔곡인 ‘Saving All My Love For You’로 빌보드 넘버원에 오른 이후 휘트니 휴스턴은 6곡 연속으로 빌보드 1위에 오르며 팝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당연히 2013년 현재까지 그 누구도 깨지 못했고,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깨지지 않을 기록임에 확실하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7곡이 끊이지 않고 1위라니, 1980년대 중반 휘트니 휴스턴의 전성기는 그렇게 시작부터 벼락처럼 찾아왔다. 휘트니 휴스턴은 여타 가수들과 비교해도 레벨이 달랐다. 폭발적인 고음, 신기에 가까운 완급 조절, 특출한 곡 소화력 등 훌륭한 노래꾼이 장착해야 할 그 모든 ‘음악적 어플’들이 그녀의 곡들에 다 내재되어 있었다. 가슴속 막힌 곳까지 뻥 뚫어주는 그의 ‘사이다 보컬’에 경탄을 금하지 못한 팬들은 그저 박수 세례를 보내기에 바빴을 뿐이다. 나 역시도 그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날을 잊지 못한다. <드래곤볼>에서의 ‘셀’로 비유하자면, ‘최초의 보컬 완전체’가 마침내 등장한 것이었다. 휘트니 휴스턴의 화려한 시절은 1980년대 중반 이후 10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후속 앨범들이 올린 성적이나 영화 <보디가드>(1992)가 거둔 신드롬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정도로 휘트니 휴스턴이 팝 음악사에 남긴 족적은 거대했다.

그래서일까. 세월의 많이 흐른 뒤 2010년에 관람했던 내한 공연은 눈물겨웠다. 파워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고 콘서트 내내 힘에 부쳐 하는 모습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해외였더라면 환불 소동이 났을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공연 내내 ‘언젠가 다시 휘트니 휴스턴의 리즈 시절이 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2년, 휘트니 휴스턴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누군가의 죽음을 다른 이의 책임으로 돌리는 게 윤리적인 행동이 아님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휘트니 휴스턴의 광팬으로서 이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게 다, 그놈의 바비 브라운 때문이다. 배순탁(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SBS 파워 FM 애프터클럽 DJ)

이선희
‘J 스치는 바람에’ 그 한 소절이면 충분했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충격적인(!) 파마와 커다란 안경, 푹 퍼져 있는 애매한 길이의 스커트는 아무 문제가 안 됐다. 어차피 TV도 부모 허락을 받고 봐야 하는 초등학교 2학년짜리는 그게 뭐가 이상한지도 몰랐으니까. 그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접 시청한 1984년의 <강변가요제>라는 이벤트가 멋있었고, 거기서 1등한 이선희는 그날부터 최고의 가수가 됐다. 가사의 뜻을 알 수 없는 아이에게도 ‘J 스치는 바람에’라는 멜로디는 너무나 쉬웠고, ‘J’라는 알파벳으로 시작되는 노래 제목은 어린 마음에 있어 보였다. 키는 작지만 엄청나게 노래를 잘한다는 게, 그때도 키 작은 꼬맹이였던 나에게 뭔가 동질감을 줬다는 건 좀 더 나이 들어서 알았다.

그 후 김완선이 나와도 이선희의 동그란 얼굴보다 예쁘지 않아 보였고, 세또래는 이선희에 비하면 힘아리 없는 애들일 뿐이었다.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여주인공(인기가 제일 많으니까!)이 돼서 소방차와 함께 어색한 연기를 하는 것도 마냥 좋아 보였다. 취향이 뭔지 정확히 알기 전,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예쁘고 섹시하고 같은 문제가 아니라 임팩트라는 걸 깨닫게 해준 순간이랄까. 다만 그런 감정 역시 변해가는 것이라는 것 또한 이선희를 좋아하면서 알았다. 1988년,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아이는 그때 <강변가요제>에서 ‘담다디’를 부르는 이상은을 본 다음 날부터 그녀의 춤과 노래를 계속 따라 부르고, 잡지를 사 모으기 시작했으니까. 아무래도 큰 무대에서 최대한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나오는 여자에게 페티시라도 있었던 건지도. –강명석(웹진 <ize> 편집장)

킴 베이싱어
무얼 해도 묘하게 ‘야하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다. 그건 치장과는 다른 범주의 영역이라,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해맑은 이가 그 동네를 좌지우지하곤 한다. 킴 베이싱어가 바로 그 동네의 갑이다. 전형적인 블론드 글래머라고 보기에는 작고 묘한 눈, 붓으로 그린 듯 얇은 눈썹, 도드라진 광대와 박 속처럼 고르고 또렷한 치아까지, 동양적인 매력의 얼굴을 가진 그녀는 물론 얼굴 아래부터는 판타지의 ‘전형을 완성한’ 글래머다. 나는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합성으로 만들어진 다소 조악한 영화 <쿨월드>(1992)의 비디오를 통해 그녀를 처음 만났다. 지금 보면 실소가 나오는 이 괴상한 영화에서 킴 베이싱어는 영화의 모든 흠결을 덮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특히 의상 담당자를 격하게 칭찬하고 싶은 하얀색 망사 드레스는 감히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극치의 여성적 매력’을 보여준다. 핀업걸인 동시에 팜므 파탈이고 때때로 미스테리와 스릴러라는 장르를 외피처럼 자연스레 둘렀던 이 여배우는 희대의 출세작 <나인 하프 위크>(1986)를 통해서 실크 슬립, 남성용 블랙 수트, 냉장고 그리고 나라는 소년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은 바 있다. 또한 <겟 어웨이>(1994)에서는 원작을 뛰어넘는 유일무이한 구성 요소였고, <L.A 컨피덴셜>(1997)에서는 자신의 기존 이미지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농익은 연기로 아카데미 트로피를 거머쥐기도 했다.

무엇보다 킴 베이싱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그녀의 벌어진 입술이다. <연인>의 제인 마치도 부러워할 단단한 그녀의 윗니들은 해서는 안 될 말을 담고 있는 비밀처럼 늘 하얗게 반짝이곤 했다. 아마도 그래서 희대의 섹시가이인 <최종분석>의 리처드 기어, <나인 하프 위크> 미키 루크, 남편이 된 <겟 어웨이>의 알렉 볼드윈과 심지어 배트맨과 제임스 본드까지 그 비밀을 그렇게 알고 싶어 안달한 게 아닐까 싶다. 하긴 동방의 한 나라에서 시시때때로, 예의 없이 그녀를 탐내곤 한 나와 같은 소년들도 몇백 만트럭 있었을 테니, ‘김 배신자’ 누나가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감히 내가 그녀를 쉽게 잊을 리 만무하다. 추억에 응답해 이제야 고해성사하자면, 메그 라이언에게는 미안하지만 <프렌치 키스> 블라인드 뒤에는 늘 <나인 하프 위크> 포스터가 어떤 밤을 위해서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첫사랑이 대신할 수 없는, 옆집 누나가 흉내 낼 수 없는 ‘나의 사랑 엠마누엘’. 그녀의 환갑을 축하한다. 진명현(영화 프로그래머)

강수연
아홉 살 때였나?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내 꿈이 양궁선수였던 시절. 우리 집에 비디오가 생겼다. 친구들을 불러 와서 엄마에게 소리 지르며 말했다. “엄마, 우리 집에 비디오 있지?” 친구들은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엄마는 애들이 비디오를 쳐다만 봐도 망가진다고 했다. 엄마는 수요일마다 낮에 외출했다 꽃꽂이를 배우러 다닌 것 같다. 집에서 가구를 뒤지며 놀던 나는 이상한 팩을 발견했다. 뜯어보니 풍선이었다. 콘돔이었다는 걸 알리 없었다. 그리고 옷장의 옷과 옷 사이에서 비디오 테이프 케이스를 발견했다. 사진이 붙어 있었다. 어른 여자 사진. 치마가, 요즘말로 얘기하면 시스루였다. 허벅지가 다 보였다. 그리고 가슴이 저고리를 찢을 것처럼 도드라졌다. 머리가 아팠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밀려왔는데, 그 감정은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엄청 좋았다. 그리고 불안했다. 테이프를 비디오에 넣었다. 한 아저씨가 예쁜 누나를 만졌다. 허벅지도 만지고 가슴도 만졌다. 나는 엄마 말고는 여자를 만져본 적이 없었다. 아저씨가 너무 좋아했다. 누나도 좋아했다. 그래서 그날 처음으로 생각했다. 빨리 어른이 돼서 여자를 만져야지.

저녁에 아빠가 나를 불러서 앞으론 절대 혼자서는 비디오를 보지 말라고 말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계속 누나가 생각났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허벅지와 가슴만 기억났다. 며칠 동안 누나의 허벅지와 가슴을 떠올렸다. 또래 여자 친구들은 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누나를 볼 수 없었다. 내가 보는 TV 프로그램에는 누나가 안 나왔다. 그래서 꿈을 바꿨다. 영화배우로. 누나와 영화를 찍기 위해. 중학생이 되고 나서야 누나의 이름을 알았다. 강수연이었다. 고등학생 때 TV에서 강수연을 봤다. 누나가 아니었다. 또래 여자 친구들이 더 좋아졌다. 하지만 아홉 살 때부터 지금까지 내 이상형은 가슴이 크고 허벅지가 하얀 여자다. 아, 아저씨의 이름은 이대근이었고 영화 제목은 <연산군>(1987)이었다. 이우성(시인, <아레나 옴므> 피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