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은 90년대를 추억하는 아날로그적 감성에 빠져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덩달아 90년대의 뷰티를 떠올리게 한다. 메이크업에 보다 대담해졌고, 화장품에 애칭이 생겼으며, 수입 브랜드에 목말라 엄마의 화장대를 훔쳤던 기억. 그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고, 지금의 뷰티 트렌드의 초석이 된 그 때를 추억한다.

대한민국이 90년대에 빠졌다. 영화 <건축학개론>을 시작으로 불기 시작한 복고의 바람이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 와선 말 그대로 열풍이 되었다. 사람들이 그때의 패션과 음악에 매혹된 것이다. 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격하게 공감하며, 그들보다 어린 이들은 처음 보고 듣는 것에 호기심과 매력을 느끼며 그 시절을 다시 소환하고 있는 중이다. 이쯤 되니 ‘그 시절의 뷰티는 어땠지?’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보면 수입 뷰티 브랜드들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도, 립스틱 컬러에 과감해지기 시작한 것도 90년대 즈음이었다. 하지만 메이크업을 보자면 다소 난감할 수도 있겠다. 눈썹산을 한껏 살린 가늘게 휘어진 갈매기 눈썹이나 립 라이너를 이용해 입술 라인을 본래보다 크게 그린 뒤 꼼꼼히 칠한 레드 혹은 일명 ‘팥죽색’의 검붉은 입술, 아이홀에 짙은 음영을 준 아이 메이크업 등은 당대를 뒤흔든 메이크업 트렌드였지만 내추럴 메이크업이 유행인 지금은 따라 하기에 다소 곤란한 모습임이 틀림없다.

지금은 말간 얼굴로 기억되며 시대의 미인으로 불리는 심은하, 고소영, 이영애, 김희선마저 한결같이 그런 얼굴이었다는 게 놀랍다. 그렇다고 90년대의 뷰티 트렌드가 모두 사라진 건 아니다. 레드와 버건디 립은 더욱 풍부해진 색감으로 이번 시즌 립 컬러의 유행 코드가 되었고, 엄마의 화장대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화장품들은 여전히 승승장구 중이다. 아날로그, 복고라는 범주에 포함되는 게 아니라 이제는 클래식 뷰티로 자리 잡은 것이다. 하지만 그 지점에 머무르지 않는다. 여자들에게 인기 만점이었고, 여전히 잘 팔리는 제품들은 브랜드의 시그너처 아이템이 되고 때로는 과감한 업그레이드를 단행하기도 한다. 새로운 혁신만이 능사는 아니란 걸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90년대에 20대였던 이들에게는 보면 볼수록 새록새록 추억이 돋으며, 지금 20대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분명 탐나는 물건인 뷰티의 위대한 유산을 모아봤다.

위대한 유산
엄마의 화장대 혹은 언니의 뷰티 파우치에 자리했던 아이템들은 이제 뷰티 브랜드의 시그니처 아이템이자 뷰티 클래식이 되었다. 이제는 모든 여자들이 욕망하게 된 바로 그 제품들.

1 DIOR 미스 디올 오 드 퍼퓸
무슈 디올의 첫 오트 쿠튀르에 그의 여동생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의 뮤즈인 미트자 브리카르의 “저기 미스 디올이 오네요”라는 외침은 디올의 시그처 향수의 탄생 으로 이어졌다. 1950년 하운즈투스 체크를 입고 리본 보타이를 맨 미스 디올 향수 디자인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리지널 미스 디올이 재스민과 장미, 네롤리의 조합으로 관능적인 향취를 여자에게 더해줬다면 2005년 모던하게 해석된 미스 디올 오드 퍼퓸은 오리지널의 묵직함을 조금은 덜어내면서 모던한 변신을 꾀했다. 100ml, 19만7천만원.

2 LANCOME 버츄어스 프레셔스 셀 마스카라
샤넬의 립스틱과 함께 여대생들의 파우치에는 랑콤의 데피니씰 마스카라가 자리했다. 전 세계에서 5백만 개 이상 판매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자랑했다. 눈이 선명하고 또렷해 보이는 데다 컬링 효과가 그야말로 남달라 90년대에는 3만원이 훌쩍 넘는 비싼 가격임에도 이 제품이 아닌 다른 마스카라를 쓴다는 건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단종되었지만 버츄어스 프레셔스 셀 마스카라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땀은 물론 유분에도 강해 눈 밑이 거뭇해지는 일이 거의 없고, 눈썹과 반대 방향으로 휘어진 비대칭 브러시는 짧고 다루기 힘든 아시아 여자들의 속눈썹을 근사하고 아찔하게 올려준다. 6.5ml, 4만원.

3 COSME DECORTE 모이스처 리포솜
소리 없이 강한 제품을 꼽으라면 단연 이 제품을 꼽겠다. 악건성에 가까운 피부 건조로 괴로워하는 아들을 위해 연구를 시작한 나이토 노보루 박사의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탄생한 이 제품은 1992년 출시된 이래 성분이나 패키지의 변화를 꾀하지 않았음에도 꾸준히 인기를 얻을 만큼 수분 공급에 있어서는 탁월한 기능을 발휘한다. 무엇보다 ‘토너, 로션, 에센스, 크림’이라는 당시의 스킨케어 순서를 뒤집어 세안 후 토너보다 먼저, 세안 후 가장 먼저 바르는 화장품으로 포지셔닝한 최초의 제품이다. 그 이유는? 리포솜 캡슐로 메마르고 좁아진 피부 속 수분 길을 먼저 뚫어줘야 다른 유효 성분들이 제대로 흡수되기 때문이라고. 60ml, 16만8천원.

4 CLINIQUE 드라마티컬리 디퍼런트 모이스처라이징 로션+
대부분의 여자들이 여대생이 되는 순간 화장품에 제대로 입문하는 첫 번째 브랜드는 크리니크가 아닐까? 특히 90년대와 2000년대 초중반에는 크리니크의 3스텝이 스킨케어의 하나의 공식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리고 2013년, 45년간 크리니크의 아이코닉한 제품이 된 노란 로션이 변화를 맞이했다. 기존의 고객은 물론 이탈 고객, 경쟁사 고객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임상 실험을 통해 포뮬러와 성분의 업그레이드를 단행한 것. 해바리기 씨드 케이크와 보리, 오이 추출 성분으로 구성된 배리어 리페어 콤플렉스가 피부 보습막을 강화시키며 환경적인 스트레스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덕분에 피부는 보다 더 촉촉해지고 피붓결은 매끄러워졌다. 125ml, 4만7천원.

5 MAYBELLINE 그레이트 래쉬
다양한 마스카라로 유명한 메이블린은 그 탄생 스토리마저 로맨틱하다. 1914년 미국 시카고의 화학자이자 약사였던 윌리엄스(메이블린의 설립자)가 하나뿐인 여동생의 성공적인 연애를 위해 석탄가루와 바셀린을 섞어 속눈썹에 발라준 것이 메이블린 마스카라 역사의 시작이다. 1971년 태어난 그레이트 래쉬는 슥슥 바르기만 해도 깔끔하게 속눈썹이 올라가고 눈매가 또렷해지며 가격마저 너무도 착해 촬영장에서 만난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의 메이크업 박스에서 어김없이 발견할 수 있는 제품이었다. 국내에서는 한동안 단종되었다가 2013년 12월부터 새롭게 론칭해 더욱 반갑다. 12.7ml, 8천원대.

6 YVES SAINT LAURENT 뚜쉬 에끌라
뚜쉬 에끌라는 출시된 지 22년이 되는 입생로랑의 뷰티 아이콘이다. 얼굴을 커버하는 제품이라곤 파운데이션 일색이던 때 혜성같이 등장한 이 제품은 눈 밑의 다크서클과 T존을 밝혀주고 팔자주름을 감춰줄 뿐 아니라 피부 톤까지 정리해주는 신통방통함을 가졌다. 고급스러운 광택의 골드빛으로 치장한 가벼운 패키지는 휴대가 용이해 여자들이 필요한 순간이라면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감쪽같은 수정 메이크업을 책임진다. 해마다 연말이면 입생로랑을 대표하는 오브제로 갈아입은 한정판을 선보인 덕분에 더욱 특별한 아이템이 되었다. 2.5ml, 4만5천원.

7 ESTEE LAUDER 어드밴스드 나이트 리페어 싱크로나이즈드 리커버리 콤플렉스
‘엄마의 화장대’ 하면 딱 떠오르는 것으로 이것만 한 것이 있을까? 1982년 태어난 이 ‘갈색병’은 브랜드의 탄생 역사에 비해서는 젊은 편이지만 에스티 로더를 대표하는 제품으로 당당히 자리 잡을 만큼 여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밤에 쓰는 화장품이자 스킨케어가 아닌 스킨 리페어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제품으로 어느덧 6세대 제품을 내놓았다. 크로노룩스 기술과 카타볼라시스 기술이 결합해 피부 자체의 개선 기능을 최적화한다. 게다가 수분 크림 저리가라 할 만큼 보습력도 탁월하니 지금처럼 건조한 계절에 더욱 손이 가는 제품. 50ml, 15만5천원.

8 GUERLAIN 메테오리트 파우더
색색의 진주알을 모아놓은 듯 사랑스러운 모양새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구슬 파우더는 하나의 컬러로만 이뤄진 가루 파우더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생김새부터도 갖고 싶을 만큼 예쁘건만 사랑스러운 핑크빛 브러시로 구슬 파우더를 동그랗게 굴려준 뒤 얼굴에 바르면 피부 톤도 보정되고 자연스러운 광채까지 선사하니 어찌 탐하지 않겠는가. 해마다 선보이는 리미티드 에디션 역시 여자들의 구매욕을 자극한다. 30g, 7만8천원.

9 SULWHASOO 윤조 에센스
국내 브랜드에서 안타까운 점 중 하나가 쉽게 론칭하고 쉽게 단종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제품은 그런 편견을 완벽히 깼을 뿐 아니라 연령대를 막론하고 여자라면 써보고 싶은 화장품이 되었다. 1997년 출시 당시에는 너무 한국적인 이름과 패키지 때문에 엄마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엄마들의 화장대를 넘본 딸들의 입소문 덕분에 설화수 부동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국내에 부스팅 에센스의 개념을 확실하게 인식시켰으며, 이는 수많은 뷰티 브랜드에 영감을 주어 부스팅 에센스 출시 붐을 일으켰다. 효과 역시 두말하면 잔소리, 아시아인은 물론 뉴요커들까지 인정할 정도다. 60ml, 8만5천원.

10 CHANEL 루쥬 알뤼르(135호)
1990년대에 대학 시절을 보낸 여자라면 파우치 안에 더블 C 로고가 새겨진 블랙 패키지의 화장품을 하나씩은 담고 다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샤넬 하면 마릴린 먼로와 No.5를 떠올리겠지만 여자들이 정작 소유하고자 열망한 건 샤넬의 빨간 립스틱이다. 다홍빛이 도는 선명한 레드 컬러는 수많은 여자들이 샤넬의 빨간 립스틱만 한 것이 없다고 말하게 만들었으며, 매장에서는 지금까지도 수시로 품절되기 일쑤다. ‘샤넬 레드’는 샤넬에 대한 또 다른 동경의 대상이 된 것. 1924년에 시작된 샤넬 레드의 전설은 2006년 전환기를 맞이했다. 블랙과 골드, 레드라는 조합은 그대로되 볼펜처럼 클릭 한 번에 립스틱을 꺼내고 바를 수 있게 패키지는 보다 조형적으로 변모했다. 레드 립은 이제 진정한 클래식이 되었다. ‘레드는 생명의 컬러, 생기의 컬러예요. 저는 레드를 사랑해요”라는 마드무아젤 샤넬의 말을 언제나 기억할 것. 3.5g, 3만9천원.

11 SHU UEMURA 클렌징 오일 얼티메이트 8
브랜드마다 이름을 듣는 순간 연상되는 대표 주자가 있다. 슈에무라에서는 클렌징 오일이 그렇다. 올해로 48세가 되는 클렌징 오일은 ‘언젠가는 반드시 오일 클렌징이 대세가 될 것이다’라는 슈에무라의 예언을 입증한 제품이다. 1967년 ‘언마스크’라는 이름으로 처음 선보인 클렌징 오일은 여배우들 사이에서 오일로 화장을 지우면 지울수록 좋아진다는 입소문을 타고 ‘매직 오일’이라 불렸다고. 이후 이 제품은 다양한 성분을 담은 업그레이드 과정과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선보일 때마다 새로운 능력을 갖추는 명민함까지 더했다. 특히 2012년에 선보인 얼티메이트 8은 피부 톤, 결, 탄력 등을 케어하는 8가지 스킨케어 효과까지 담은 멀티 제품이다. 450ml, 12만8천원.

12 SISLEY 에뮐씨옹 에꼴로지끄
1980년에 출시된 이래 지금까지 판매 금액이나 수량 면에서 시슬리 제품 중 당당히 1등을 차지하는 효자 제품이다. ‘에센스 로션’이란 애칭으로 더 유명한데 피붓결을 부드럽게 해주고 유분과 수분 밸런스도 맞춰주니 환절기에 들뜨고 성난 피부를 진정시키는 데 그만이다. 그래서 면도 후 사용하는 남자도 많다고. 30년이 넘도록 한결같은 외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나 성분 중 인삼이 중국산에서 한국산으로 바뀐 것 외에 큰 변화가 없는데 그 올곧음이 오히려 신뢰를 주는 포인트다. 125ml, 22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