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패션계, 게다가 이 작은 한국 시장에서 긴 시간 자신의 레이블을 지켜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예술성과 상업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중인 이 시대 디자이너들의 치열한 고민을 박춘무의 25주년 기념 아카이브 전시에서 엿볼 수 있었다.

디자이너 박춘무의 첫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 ‘스페이스 무’의 지하에 마련한 무 갤러리. 그곳에 25년간의 박춘무 아카이브를 전시했다. 마네킹에 디자이너 박춘무가 선별한 각 시즌의 시그너처 의상을 입혔다.

디자이너 박춘무의 첫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 ‘스페이스 무’의 지하에 마련한 무 갤러리. 그곳에 25년간의 박춘무 아카이브를 전시했다. 마네킹에 디자이너 박춘무가 선별한 각 시즌의 시그너처 의상을 입혔다.

박춘무의 옷은 ‘소매는 왜 꼭 여기 달려야 하지? 재킷은 왜 이렇게 생겨야 하지?’라는 질문에 의해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수학자 혹은 건축가적인 태도로 접근하지만 그 결과물은 더없이 감성적이다.

박춘무는 2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신의 레이블을 지켜온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디자이너 중 하나인 동시에 현재 홍콩의 I.T나 로스앤젤레스의 Kitson 같은 세계의 핫한 셀렉트 숍에 자신의 의상을 판매하고, 매년 세계 4대 도시를 돌며 8번의 전시를 하는, 그 누구보다도 역동적으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의 디자이너다. 11월 28일 늦은 저녁, 그녀는 자신의 기념비적인 컬렉션을 집대성한 아카이브 전시를 열었다. 데무 박춘무의 첫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 ‘스페이스 무’에서 디자이너, 에디터, 모델 그리고 그녀와 오랜 시간 함께한 팬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축하하는 이 작고 따뜻한 축제를 즐겼다.

1. 빙하를 주제로 삼은 2013 F/W 컬렉션의 패딩 베스트와 슬릿이 깊게 들어간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델과 디자이너 박춘무. 2. 디자이너 박춘무의 포트레이트를 담은 전시회 초대장.

1. 빙하를 주제로 삼은 2013 F/W 컬렉션의 패딩 베스트와 슬릿이 깊게 들어간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델과 디자이너 박춘무.
2. 디자이너 박춘무의 포트레이트를 담은 전시회 초대장.

먼저 데무 박춘무의 25주년을 축하드린다. 방대한 양의 아카이브에서 전시될 작품을 선별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겠다.
데무 박춘무가 25년이 됐고, 쇼는 18년 전부터 시작했다. 회사가 무척 힘들던 시기에 2년 쇼를 쉰 것 빼고는 매년 서울, 혹은 서울과 파리, 뉴욕을 오가며 쇼를 했다. 그러니 얼마나 양이 많았겠나. 쇼가 끝나면 의상을 모아 창고에 보냈는데 그 옷들이 쌓이다 보니 쉽게 관리할 수 있는 양을 넘어 없어지기도 하고, 손상도 심해졌다. 이번 전시를 위해 의상 20여 박스를 한꺼번에 손질했는데, 드라이클리닝 비용만 엄청났다. 비닐, 가죽 소재 등은 특히 손상이 심해 안타까웠다. 의상은 직감적으로 선별해냈고, 오히려 어떻게 배치할지가 고민이었다. 쇼를 할 때는 하나의 콘셉트 아래 여러 의상이 배열되니 문제가 없었는데, 다른 콘셉트의 쇼 의상을 한데 전시하려니 통일성과 일관성을 주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컬러별로 군을 나누는 것이었다. 다행히 색을 아주 많이 쓰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카이브를 네 가지 군으로 나눠 정리할 수 있었다.

준비가 끝난 전시 공간을 지켜보니 감회가 어떤가?
의상들을 한데 놓고 돌아보니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팔릴 만한 옷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더라.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정말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라는 것. 쇼 의상만큼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지만 외국에서는 컬렉션 피스를 그대로 팔아야 하니 항상 최종 순간에 어느 정도 타협을 보게 된다. 디자이너로서 그 순간이 가장 어렵고 고민스러운데, 그런 고민이 없다면 이 일이 재미없어질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된 의상들에서는 한결같이 공기 같은 양감과 수묵화 같은 색감이 느껴진다.

급변하는 패션계에서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색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내가 항상 나자신에게 집중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사람이 타고난 성향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업가로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상업적인 내셔널 브랜드의 길을 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작은 규모의 디자이너 레이블로 가지도 않은 것은 내 성향에 따른 것이다. 하나의 브랜드를 이끌기 위해서는 사업가로서 자신의 성향을 빨리 파악하고 그에 맞는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 돌아보니, 내가 데무 박춘무로 18년간 쇼를 하고, 예술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던 건, 내가 사업을 이 정도 규모로 키울 수 있는 상업적인 기질 또한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성향 때문에 반대로 원하는 것을 100% 하지 못한 것도 있다. 뭐가 좋고 나쁜 지보다 내가 얼마나 만족하며 사는지가 중요하다.

25년 전, 데무로 자신의 브랜드를 처음 시작할 때를 회상해보면 어떤가? 어떤 각오였나?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어 완전히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쇼는 그야말로 악평을 들었다. 한 에디터가 ‘옷도 아니다’라는 헤드 카피로 기사를 썼는데,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컬러가 유행할 때 흑과 백만을 이용하고 패턴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나는 항상 남들이 예쁘다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꽃이 예쁜 건 당연한 건데, 내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아스팔트 한구석이 멋져 보이고.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때처럼 ‘옷도 아닌’ 옷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그런 마음이 아직 남아 있는 게 나에게는 동력이다.

언급한 대로 박춘무의 미학은 아방가르드하다고 일컬어지는데,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을 어떻게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일 수 있는지?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고객이 분명히 있다는 걸 오랜 경험을 통해 확신하기 때문이다. 패션에는 정답이 없다. 유행에 따라 몇몇 트렌드가 일시적으로 주목받을 뿐, 그 어느 곳보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곳이 바로 패션계다. 아직도 맞춤복만 입는 사람이 있고, 전통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도 여전히 존재한다. 내 옷에서 브랜드 라벨을 밖으로 크게 내보이는 건 상상도 못하지만 90년대에는 그게 유행이었고, 요즘 또 리바이벌되고 있고. 그게 패션의 재미있는 점이고, 난 항상 그 안에 내 자리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자리가 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하는 것뿐이지.

3. 25주년 아카이브 전시회장 전경.4. 모델 장수임이 입고 있는 화이트 니트 드레스는 2008 F/W 시즌 작품.

3. 25주년 아카이브 전시회장 전경.
4. 모델 장수임이 입고 있는 화이트 니트 드레스는 2008 F/W 시즌 작품.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장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새로운 것을 향한 호기심과 열정, 그리고 고객들의 반응에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 스스로 컬렉션이 성공적이라고 판단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데무 박춘무의 매출은 항상 거의 똑같은데, 이렇게 마니아층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두 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있었기 때문이다.

데무 박춘무를 수식하는 말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멋지다 또는 특이한데 멋있게 입었다는 말. 사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 그렇게 보이려고 옷 입는 것 아닌가?

옷을 입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남 눈치 안 보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신감. 오늘은 이 옷을 한번 이렇게 뒤집어 입어볼까, 오늘은 추우니까 이렇게 껴입어볼까. 그런 시도가 남들과 다른 멋진 룩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커팅 후 단 정리를 하지 않는 디테일만 해도 지금은 흔한 것이지만 내가 처음 시도했을 때는 이해받기 힘든 것이었다. 팬츠 수트에 스니커즈를 신는 것 또한 예전에는 말도 안 되는 패션이었고.

영감은 어디서 얻나?
25년간의 아카이브를 돌아보니 거의 모든 컬렉션의 테마가 자연이었다. 하늘, 돌, 바다 속, 공기. ‘예쁜’ 자연 말고, 일상 생활에서 접하는 자연 현상에서 영감을 얻곤 한다. 비 오는 풍경, 칠흑 같은 밤, 해뜰 무렵, 무섭게 넘실대는 짙푸른 바다 같은 것.

컬렉션을 보면 동양적인 부분도 크다.
80년대에 파리에서 컬렉션을 할 때 아주 동양적이라고 했다. 그땐 동양이라면 일본밖에 모를 때인지라 다들 나를 일본 디자이너라고 생각했다. 내가 한국적인 것으로 승부하려는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내가 살아온 곳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정서가 옷에 묻어나는 것 같다.

이상적인 여성상이 있나?
인간적으로 일하고 성취하는 여자, 에고이스트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자신의 행복과 만족이 우선인 사람. 희생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기보다는 자신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 매 순간 내가 행복한 길을 스스로 선택해야 실패했을 때 누구 원망할 일도 후회도 없기 마련이다. 그게 자신 있게 사는 삶이고 그렇게 살아야 주위 사람도 행복하다고 믿는다.

디자이너로서의 치열한 삶 속에서 자신을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가족이다. 가장 솔직하게 나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가족이 나를 인정해주는 것. 다른 사람들이야 입바른 소리도 할 수 있지만 가족은 그렇지 않다.

25주년 기념 전시회와 함께 공개된 첫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 ‘스페이스 무’는 당신에게 어떤 공간인가?
2년 전 오가닉 소재로 쇼를 한적이 있는데, 이 쇼에 대한 반응이 너무 좋아 이번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과 함께 오가닉 라인을 론칭했다. 오가닉 소재의 쿠션, 타월, 향초 같은 리빙 용품과 함께 현재 스페이스 무의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의상들이 그것이다. 앞으로 ‘스페이스 무’는 새로운 라인에 대한 고객의 반응을 테스트하는 실험실이자 고객과 가장 가까이에서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곳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모든 것은 자신 안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하고. 트렌드나 시류에 민감해질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예민해지라는 말을 하고 싶다. 브랜드의 상업적 규모라든지 옷의 스타일도 나의 성향에 맞춰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즐겁고 행복하게 일하는 것.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를 떠나 그렇게 인생을 보내는 게 의미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