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드뮐미스터와 로베르토 카발리는 떠났고, 피에르 가르뎅은 돌아왔다. 과연 욕망 넘치는 디자이너에게 적당한 은퇴의 시기는 언제일까?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이 시대의 전설이 된 이들이 몸소 보여준 그 무한한 한계점에 대해.

슈퍼맨이 돌아왔다. 올해로 아흔두 살의 슈퍼 노익장을 자랑하는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이 얼마 전 패션쇼를 진두지휘한 것. 중요한 건 이번 쇼가 단순히 피에르 가르뎅의 이름을 건 쇼를 선보인 지 6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막심즈 라 누이(Maxim’s La Nuit)’라는 피에르 가르뎅의 독자적인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론칭하는 기념비적인 자리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선보인 건 자신의 시그너처와도 같은 1960년대 스페이스 룩의 동시대적이고 획기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른 살롱 드레스(컬렉션의 이름이 암시하듯 우아한 밤을 위한)를 선보였다. 그렇다면 이 결과물은 그와 함께 나이 들어간 VIP들을 위한 배려일까, 아니면 현대적인 패션 코드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에 올인한 노장의 고집일까. 앞으로 이 컬렉션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수 없지만 그다운 과감함이 돋보이는 결정인 건 확실하다. 그 순간 그가 2012년 7월호 더블유 코리아와의 인터뷰를 통해 남긴 말이 떠올랐다. “내게 가장 궁금한 것은 과거가 아닌 내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날 설레게 하는 것은 내일이고. 그런데 지금 내게 언제까지 내일이라는 게 올까. 허허.” 그러고 보면 더는 내일이 없을지도 모를 어느 날, 티끌같은 아쉬움이라도 남기지 않기 위해 패션 시장에 다시 한번 도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다른 행로를 걷는 이도 있다. 질 샌더는 1968년 창립한,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질 샌더 하우스로 귀환한 지 얼마 안 돼 다시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 아쉬운 이별의 이유는 질 샌더를 소유한 기업 대표와의 불화설로 짐작되고 있지만 중요한 건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패션계를 은퇴할지 여부다. 그녀보다 조금 아래 연배인 로베르토 카발리는 최근 당차게 은퇴를 선언했다. 바로 자신이 일궈 온 이탤리언 글램 왕국의 디자인 지휘권을 다른 이(예전 DVF의 오른팔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이반 미스펠라레)의 손에 넘겨주기로 한 것. 그러곤 자신은 한참 연하의 여자친구와 함께 남은 여생을 신나게(해변에서 라이딩을, 요트에서 칵테일과 태닝을 즐기며) 보낼 거라고 하니 그에게 은퇴란 어찌 보면 브랜드와 자신을 위한 윈-윈 전략일지도 모른다. 서울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준 카스텔바작 역시 잠정적으로 서울에서 보기 힘들 듯. 카스텔바작을 인수한 국내 기업에서 전개한 카스텔바작 캐주얼 라인을 접기로(단, 파리의 카스텔바작 컬렉션 라인은 유지한 채) 결정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리니 말이다. 풍부한 유머 감각과 아티스트로서의 감성을 지닌 그가 디자이너로서 또다른 활로를 찾을지는 좀 더 지켜볼 일.

그러고 보니 노장의 힘, 하면 역시 칼 라거펠트가 떠오른다. 어쩌면 로봇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벌이는 이 활화산 같은 디자이너에게 정년이 있을까, 있다면 언제일지는 용한 점쟁이도 예지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몇 해전, 생 로랑의 타계와 알렉산더 매퀸의 안타까운 죽음을 목도한 패션계로선 그를 잃는다는 건 은하계의 빛나는 행성이 하나 사라지는 거와 진배없을 일이니, 그저 그의 무병장수를 기원해야 할 듯도 하다. 또 하나의 빅 이슈는 앤 드뮐미스터의 은퇴 선언. 지난 9월 말, 파리에서의 마지막 쇼를(그 당시엔 공개하지 않은 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들은 앤 드뮐미스터가 떠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쇼장에서 굿바이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에서 사임을 결정한다는 건 자신보다는 브랜드의 미래를 위한 선택일까. 멋졌던 마지막 쇼를 되새기며 이제 마르지엘라 없는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처럼 그녀의 디자인팀, 혹은 다른 누군가가 일궈갈 앤 드뮐미스터라니. 그 새로운 모습에 대한 기대보다는 그녀의 부재가 더 아쉽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로서 패션사에 과연 어디까지 그 이름을 남기는 것이 옳은 결정일까. 자신의 찬란했던 지난 ‘리즈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 영광의 굴레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대신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가르침을 겸허히 실천하는 게 옳은 것일까. 아니면 내 열정이 다하는 그날까지,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는 신념으로 자기를 불태우는 노장 디자이너로서의 삶이 정말 빛나는 것일까. 중요한 건 그 모든 결정은 결국 브랜드의 미래를 내다보는 선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 이상으로, 오랜 시간 후세에까지 자신의 패션 가치를 굳건하게 전할 브랜드를 남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후회 없고 멋진 패션 유산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