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나 조지 클루니가 할리우드만의 특산품은 아닐 거다. 최근 한국에서도 카메라 앞 대신 뒤에 서고 싶어 하는 연기자가 부쩍 늘기 시작했다. 네명의 필자가 박중훈, 방은진, 유지태, 그리고 하정우를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서
들여다봤다.

유지태의 실험
감독이 됐다고 해도 배우로서 가져온 역사와 DNA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서 우리는 그가 배우로서 살아온 궤적을 볼 수 있다. 박중훈 역시 자신이 겪어온 세계의 속성을 연구해 <톱스타>를 만들었고, 하정우는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연기와 흡사한 리듬의 <롤러코스터>를 연출했다.

그런데 영화감독 유지태가 연출한 영화에는 배우 유지태가 드러나지 않는다. 액션, 로맨틱 코미디, 스릴러, SF, 심지어 홍상수 영화까지 정형화되지 않은 필모그래피 때문일까? 첫 작품인 <자전거 소년>은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연기 경험이 없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찍은 영화였다. 장르적으로 보자면 어느 산골소년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사실상 영화 만들기에 대한 실험이다.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는 지압을 하며 성적인 흥분을 느끼는 맹인 안마사가 주인공인데, 유지태에게는 이야기보다도 맹인의 내면을 영상으로 표현하는 과정이 더 매혹적이었을 듯싶다. ‘나도 모르게’ 떠오른 과거 연인과의 대화를 그린 <나도 모르게>나 사진과 영상을 결합한 이미지 실험인 <초대> 또한 영화감독으로서 품은 연출적인 욕구가 먼저 눈에 띄는 영화들이다. 심지어 장편 데뷔작인 <마이 라띠마>는 그가 만든 단편보다도 덜 장르적이다. 이주노동자 여성과 주민등록까지 말소된 신용불량 남자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유지태는 그들을 도시의 어느 구석에 기생하고 있을 법한 야생동물처럼 그려놓았다.

그에게 영화 연출은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일이 아니고, 배우 인생을 정리하는 결과물도 아니다. 배우 유지태는 그의 스타성을 유지하지만, 감독 유지태는 그의 영화적인 취향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있다. ‘레퍼런스’만을 좇는 지금의 충무로에서 볼 때 배우 겸업 감독인유지태의 행보가 유독 눈에 띄는 건 그 때문이다. 배우 유지태와 감독 유지태의 컬래버레이션이 그를 더욱 흥미로운 셀레브리티로 만드는 것도 당연하다. 물론 그의 실험을 관객들이 언제쯤 공감할지는 알 수 없지만. –강병진(<맥스무비 매거진> 기자)

박중훈의 의지
사실 신인 감독 박중훈의 <톱스타>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기 힘들다. <내 깡패 같은 애인>(2010)을 촬영하던 즈음까지 ‘박중훈 스토리’라는 이름으로 <씨네21>에 그의 회고록을 연재하며, 최소 한 달에 한 번 그와 긴 시간 속 깊은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감독이 되고자 하는 꿈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꿔볼 만한 꿈인 ‘감독이 되고 싶다는 욕망’보다 ‘감독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분명히 했다. 연예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 배우의 이야기라는 콘셉트도 명확했다. 말하자면 <톱스타>는 이후 디테일의 변화는 있었을지 몰라도 박중훈의 본래 의도를 충실히 담아낸 영화다. 사실 찰리 채플린, 클린트 이스트우드, 우디 앨런, 성룡 그리고 주성치에 이르기까지 세계 영화사를 통틀어 감독이 된 배우 혹은 감독과 배우를 겸하는 사람의 명단은 차고도 넘친다. 그런데 배우 박중훈의 감독 데뷔작 <톱스타>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바로 ‘배우가 만든 배우 영화’라는 점 때문이다. 그가 실제로 ‘톱스타’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다 보니 ‘사건과 실화’ 같은 자극적인 스토리라인을 당연히 예상해봄직하다.

그런데 <톱스타>는 그런 기대, 바꿔 말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무척 손쉬운 방법을 애써 비껴간다. 스스로 ‘가족과도 같은 선배’라 얘기하는 국민배우 안성기가 카메오 출연해 주인공 태식(엄태웅)에게 ‘절제’에 대해 얘기하고, 김수로가 연기하는 또 다른 영화 속 선배 배우는 시도 때도 없이 ‘본질’을 깨달으라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한 명(안성기)은 감독 박중훈의 실제 선배고, 또 다른 한 명(김수로)은 영화 속 선배이자 현실에서는 박중훈의 후배다. 말하자면 영화의 안과 밖, 선배와 후배 모두 쉬지 않고 신인 감독 박중훈을 향해 쓴소리를 날려대는 것이다. 힘든 길을 걸어가기로 자처한 박중훈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려는 의지로 느껴졌다. 물론 창작자의 선의와 다짐만으로 영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것은 식상한 기획 영화가 난무하는 지금의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필요한 그 무엇이다. –주성철(<씨네21> 기자)

방은진의 균형
방은진은 짧은 단어 하나에도 분명한 의미를 담아내는 또렷한 발음과 발성의 배우이자 의뭉스러운 고양이의 조심스러움부터 야생동물의거칠고 자연스러운 몸짓까지 한 몸에 소유한 ‘이미지와 표현력’의 연기자였다. 그런 그녀가 메가폰을 잡는다고 했을 때 궁금했던 건 역시 여배우 출신 여감독의 여배우 연기 디렉션이었다.

몇 편의 단편을 거쳐 2005년 엄정화라는 휴화산과 함께 폭발한 방은진의 감독 입봉작<오로라 공주>는 특히 기대하던 그 부분이 도드라지게 뛰어난 영화였다. 하드고어에 가까운 서슬 퍼런 복수극이자 좀 더 현실적인 금자씨였던 <오로라 공주>에서 방은진은 엄정화를 러닝타임 내내 숨 돌릴 틈없이 밀어붙였다. 둘의 호흡은 비탈길을 굴러 떨어지듯 조마조마하면서도 짜릿한 데가 있었고, 그 묘한 긴장감은 <오로라 공주>를 독특하고 매끈한 장르 영화로 완성시킨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7년 만의 두 번째 장편 <용의자 X>에서 방은진은 이요원의 또 다른 얼굴을 발굴해냈다. ‘완전한 사랑’이라는 감옥에 갇힌 이요원은 비극적인 캐릭터를 마른 나무와 같이 소화했다.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앙상하고 버석거리는 이요원의 캐릭터는 중반부 이후 작품에 불을 지피는 장작처럼 타올랐고, 감독 방은진은 감정의 최고치를 보여줄 수 있는 후반부를 온전히 여배우 이요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그가 만든 두 편의 장편 영화는 스릴러와 미스테리라는 남성 감독의 전유물 같은 장르물이었다. 남성 감독들에 뒤지지 않는 힘과 속도를 가졌고 거기에 캐릭터의 감정선과 배우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조율하는 균형잡힌 연출력을 가진 방은진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은 ‘칸의 여왕’ 전도연과 함께하는 <집으로 가는 길>이다. ‘대한민국이 외면한 실화’라는 문구를 달고 있는 이 영화는 해외에서 마약 사범으로 몰린 평범한 주부의 수난기를 다룬다. 배우가 스크린을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와 최적, 최고의 감정을 수놓는 명배우 전도연과 매 작품마다 성큼 한 걸음을 내딛는 감독 방은진의 호흡으로 완성된 시너지에 궁금증이 커질 수밖에 없다. –진명현(영화 프로그래머)

하정우의 색깔
하정우가 영화제 수상 공약으로 내건 국토 대장정을 정말 떠난다고 했다. 그러려니 했다. 그걸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개봉하겠다고 했을때는 슬슬 기가 찼다. 하정우가 지인들과 5km를 걷든, 577km를 걷든 우리가 그걸 왜 굳이 극장에서 봐야 하나. 그런데 완성된 <577 프로젝트>를 보고는 유레카를 외쳤다. 그가 직접 기획하고, 공동 연출 수준으로 달라붙어 만든 이 다큐멘터리는 희한한 재미로 꿈틀댔다. 확실히 누군가에게는 그저 무용담 혹은 농담에 그치는 이야기도 하정우를 거치면 캐릭터가 되고 영화가 된다. 그에게는 그만한 추진력과,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재주가 있다.

첫 연출작 <롤러코스터> 역시 그런 그의 능력에서 출발했다. 이 영화는 하정우가 배우 류승범의 일화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당시 기내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킬킬대며 상상하던 하정우는, <베를린> 촬영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시놉시스를 썼다. 초반부터 속사포 대사와 뚱딴지 같은 상황을 늘어놓는 <롤러코스터>는 얼마간 꽤 당황스럽다. 그러다 서서히 그 리듬에 익숙해진다. 이 영화는 관객이 웃어주고 반응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이건 뭐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이들을 한 방향으로 계속 몰아간다. 어리둥절하게 파티에 온 손님을 철저하게 계획된 쇼로 만족시켜 돌려보내겠다는 야심이자, 대단한 뚝심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개인기를 발휘하는 대신 하정우가 만든 틀 안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이 영화의 모든 캐릭터는 욕하는 하정우, 여자 하정우, 어수룩한 하정우 등으로 나뉘어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기이한 느낌을 준다. <롤러코스터>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를 하정우가 연기하는 것으로 상상해보라.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정우는 첫 연출작부터 인장을 확실히 찍었다. 두 번째 연출작 <허삼관 매혈기>에서도 이 기세는 이어질 수 있을까? 동명의 원작 소설이 1970년대 중국 문화혁명기에 피를 사고파는 사람들의 슬프고도 우스꽝스러운 풍경을 담은 것임을 상기할 때, 영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같다. –이은선(<매거진 M>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