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어난 제품을 남긴 1960년대 브랜드를 다시 소개하고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생활 디자인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또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긴밀한 소통을 중계한다. 나가오카 겐메이는 직접 디자인을 하지는 않지만 누구보다도 디자인에 관해 많은 일을 하는 인물이다. 편집매장이자 전시장이며, 학교이기도 한 디&디파트먼트는 그의 철학을 공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지난 11월 9일, 그 여덟 번째이자 첫 번째 해외 지점인 디&디파트먼트 서울이 이태원에 문을 열었다. 디자인을 통해 그 지역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겐메이는 이 새로운 공간이 한국과 일본 사이의 중요한 접점이 되길 바란다. 말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교감을 이끌어내는 흥미로운 통역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를 청했다.

‘명함을 받고 일주일 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휴지통에 버려라. 그 명함은 종이일 뿐이다.’ 나가오카 겐메이는 자신의 책인 <디자이너 생각 위를 걷다>에 이렇게 적었다.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하는 인연은 애써 챙길 필요가 없다는 경제적이면서도 단호한 인맥 관리인 셈이다. 그를 처음으로 인터뷰한 건 2012년 1월 이른 아침의 도쿄에서였는데, 이런 글을 읽은 뒤의 만남이다 보니 헤어질 때쯤에는 당연히 상대방에게 건넨 명함의 운명이 궁금해졌다. 일주일 후 사무실을 기습 방문해 휴지통을 뒤지며 강렬한 인상을 남겨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서울로 돌아오는 항공편은 당일 저녁이었다. 명함의 안부를 확인한 건 그로부터 1년이 더 지나서, 그러니까 올해 10월 초의 일이다. 서울에서 더블유와 다시 만나고 싶다고 겐메이 측이 먼저 연락을 취해온 것이다.

물론 서울 시청 앞에서 말춤이나 추다 가겠다는 한가한 방문은 아니었다. 그의 대표적인 프로젝트인 디&디파트먼트(D&DEPARTMENT)의 8호점이 곧 서울에서 오픈할 거라고 했다. 남다른 성격을 지닌 이 편집매장의 첫 번째 해외 지점이기도 하다. 엄격한 명함 관리법은 디자인에 관한 그의 태도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불필요한 새 것을 늘리는 일이야말로 겐메이가 극도로 경계하는 한 가지다.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이너’라는 별명은 그 행보를 효과적으로 요약한다.

“서른다섯 살 무렵 장차 디자이너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죠. 뭔가를 만드는 재능은 부족하다고 저 스스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도 디자인이라는 즐거운 일에는 참여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가치 있는 것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시스템을 확립하고자 나서게 된 거죠.” 2012년의 인터뷰 당시 들려준 이야기다. 디자인 숍이자 토론장이며 전시 공간이기도 한 디&디파트먼트는 그가 자신의 믿음을 전도하기 위해 설립한 일종의 전략 기지다. 도쿄, 오사카, 삿포로 등에 자리한 7개 지점에서는 가리모쿠, 아델리아 등 일본의 산업디자인이 정점을 찍은 1960년대 브랜드들을 돌아보고, 신상품의 홍수에 휩쓸려 보내기엔 아쉬운 양질의 지역 특산품을 소개한다. 다양한 제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롱 라이프 디자인(Long Life Design)’이다.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그래서 시대와 지역에 좌우되지 않고 가치 있게 쓰일 수 있는 보편적인 물건이라면 이곳의 진열대에 놓일 자격을 얻는다. 겐메이는 직접 디자인을 하는 대신 좋은 디자인을 독려하는 쪽을 택한 자신의 역할을 디자인 프로듀서라고 설명한다.

두 번째 만남 역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이른 오전이었다. 아직 디&디파트먼트 서울이 들어서기 전인 이태원 MMMG 건물 지하는 창고처럼 휑했다. 채 뜯지도 못한 상자들과 각종 소품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사이로 나가오카 겐메이가 걸어 들어왔다. 재킷부터 신발까지 온통 검정이었던 탓에 제멋대로 헝클어진 짧은 은발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디&디파트먼트의 마케팅 책임자인 마츠조에 미츠코가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둘은 업무는 물론 퇴근 이후의 일상까지 공유하는 동료이자 부부다. 통상적인 예물 대신 단정한 스와치 시계를 동일 모델로 나누어 착용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뭔가를 사면 길게는 20년 가까이 쓰는 것 같아요. 이 시계야 그렇게까지 오래된 물건이 아닙니다만. 하지만 브랜드의 역사는 벌써 30년 정도가 됐죠.” 그에게는 얼마나 비싼가, 혹은 얼마나 희귀한가보다 얼마나 오래가는 디자인인지가 더 중요한 질문인 듯했다.

 

서울 셀렉트는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오래도록 사용될 만한 한국의 디자인을 발굴하고 소개하려는 프로젝트다.

서울 셀렉트는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오래도록 사용될 만한 한국의 디자인을 발굴하고 소개하려는 프로젝트다.

디&디파트먼트는 아이템을 선정할 때 다음과 같은 기준을 따른다. 첫째, 만드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담긴 물건일 것. 둘째, 고객에게 권하기 전 반드시 물건을 사용해 볼 것. 셋째, 판매 후 5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도로 사서 팔 수 있을 만한 제품을 선택할 것. 넷째, 수리해서 계속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것. 마지막으로 다섯째, 꾸준히 생산을 이어갈 의지를 지닌 제작자의 물건을 택할 것. 서울점도 당연히 동일한 지침을 공유한다.

“일본 내의 숍과비교할 때 특별히 다를 건 없어요. 그 원칙이 지역과 상관없이 유효함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첫 해외점이니만큼 준비하는 동안 일본 내의 새 지점을 열 때와는 다른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나가오카 겐메이가 고개를저었다. “제게 이 프로젝트는 비즈니스가 아니니까요. 우리의 생각에 공감한 누군가가 동참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검토 끝에 파트너가 결정되면 어떻게 매장을 꾸려갈 것인지 하는 고민은 대부분 상대방 몫이 되죠.” 현재로서는 일본에서 들여온 제품과 한국에서 새롭게 찾아낸 제품이 7 대 3 정도의 비율인데, 차차 후자의 비중을 늘려갈 계획이다. 2012년 초의 겐메이는 통관에 따르는 가격 상승을 해외 진출의 가장 큰 걸림돌로 봤다. 그 고민에 대한 해결책은 찾았는지 궁금했다. “당시에는 일본에서 고른 상품을 어떻게 외국에 판매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지금은 구상이 많이 바뀌었어요. 서울 지점의 경우, 한국의 디자인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를 앞서 생각할 겁니다.”

닛폰 비전의 한국판인 서울 셀렉트(Seoul Select)는 국내의 디자인 중 그 생명력이 남다른 사례를 재조명하려는 프로젝트다. 겐메이의 원칙이 길잡이 노릇을 했지만 례를 조사하고 선정하는 작업은 한국 쪽 파트너인 MMMG가 주도했다. “큰 룰만 제시했을 뿐 이건 좋고 이건 별로라는 식의 구체적인 간섭은 하지 않았어요. 디&디파트먼트 서울은 나가오카 스토어가 아니니까요.” 도쿄점과 서울점은 한쪽이 주도권을 쥐고 다른 쪽을 이끄는 관계가 아니라고 그가 덧붙였다. 다만 각자의 지역에서 좋은 디자인을 고민하고 그 내용을 나누는 동지에 가깝다. “어느 나라에나 그곳의 디자인이 존재하죠. 디자이너라면 자신이 속한 상황과 환경에서 어떤 작업을 해나갈 것인지 깊이 있는 성찰을 해야 합니다.”

서울 브러쉬의 구두솔, 송월타올의 이태리타월, 삼화금속의 가마솥 미니, 태극당의 모나카 아이스크림, 국제아피스공업사의 만년필….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을 골고루 뒤져 골라낸 서울 셀렉트의 면면은 특별하거나 유난스럽지 않아서 더 흥미롭다. 이미 익숙하게 접했고, 심지어는 잊고 있던 물건이지만 새삼스러운 계기로 마주하니 그 디자인이 사뭇 달리 보였다. 결국 무엇을 보여 주는가만큼이나 어떻게 보여주는가도 중요한 전략인 셈이다. “맞아요. 제안하는 방식이 사람들의 생각을 좌우합니다.” 잠시 쉼표가 찍힌 듯하더니 곧 문장이 이어진다. “무조건 많은 걸 갖는 게 윤택한 삶을 뜻하던 시대는 지났어요. 대신 제대로 만든 제품을 선택하고, 그걸 잘 활용하는 일, 올바른 소비 방식을 제안하는 일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강의를 듣고 의견을 나누려는 인원이 부쩍 늘었어요. 생산자를 직접 방문하는 유료 투어 참여도 활발합니다. 하나의 상품을 구매하기 전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거예요.”

현상의 이면을 들추면 과잉과 과속의 시대를 사는 소비자들의 피로감이 읽힌다. 새로운 것이라면 사볼 만큼 사본 데다 더 이상 사야 할 만큼 새로운 무언가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구매 행태도 양극으로 갈린다. “100엔 숍에 들러 누가 만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뻔한 물건을 고르거나, 비싸더라도 완성도가 높은 제품만 택하거나 둘 중 하나죠.” 그는 자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전통 공예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부쩍 목격되고 있다고 말했다. 서서히 잊혀져가는 듯했던 장인 정신을 되새기려는 시도다. 일본에 닥친 일련의 심각한 재해도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가진 것들이 제로가 되는 경험을 몇 차례 반복했으니까요. 직접 겪은 일본인은 물론, 그 모습을 지켜본 전 세계인도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언제고 사라질 수 있는 물건 대신 무형의 가치에서 풍요를 추구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나가오카 겐메이의 비전을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최소의 것 안에서 최대의 만족을 찾는 디자인이야말로 그가 오래전부터 고민해온 내용이다. 디&디파트먼트는 고객들에게 어서 지갑을 열라고 부추기는 대신 한 번 더 고민하도록 권하는 희한한 가게다.

디자인이 우수하고 실용적이기까지한 업무용 중고 제품도 디&디파트먼트 서울에서 판매된다.

디자인이 우수하고 실용적이기까지한 업무용 중고 제품도 디&디파트먼트 서울에서 판매된다.

문득 궁금해지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나가오카 겐메이 본인도 철저하게 계획적인 소비자일까? 충동구매의 유혹으로부터는 아예 순결한 성자인 걸까? “아, 충동구매라면 저도 많이 해봤습니다(웃음). 경험이 쌓일수록 쇼핑의 기술은 나아지는 것 같아요. 나이를 먹으면서, 그리고 생활 방식을 고민하면서 돈을 쓰는 일에도 어떤 깊이가 생깁니다. 제대로 된 소비를 배우고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는 건 거의 30대 이후죠. 20대까지는 아무래도 충동구매가 많고요. 저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20대 이후로는 지름신과 소원해졌다는 이야기인데… 하지만 최근 몇 개월 사이 덜컥 구입했다가 후회한 물건이 전혀 없다면 그 말은 아무래도 믿기가 어려웠다. “사실 옷은 있어요. CD와 DVD도….” 마침내 인터뷰이가 실토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어떤 시대를 살든 그 안에는 빠르게 변화해야 하는 것과 쉽게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기 마련이죠. 그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분들은 제가 새로운 걸 무조건 부정한다고 오해합니다. 그건 절대 아니에요. 균형이 가장 중요하며 그걸 지켜야 건강한 삶이 가능하죠. 예를 들어 패션은 빠르게 변화할 수밖에 없는 분야고, 그 안에서 최선을 골라야 해요. 하지만 생활용품에는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합니다.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의식하는 자체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쇼핑에 관한 겐메이의 조언이다.

내친 김에 디&디파트먼트 서울에서 판매될 제품 중 특히 추천하고 싶은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오랜 전통을 지녔지만 젊은 층이 보기에도 충분히 흥미로울 물건을 다양하게 소개하려고 해요. 일본 제품 중에서는 차 보관용 상자가 어떨까요. 원래의 용도와 상관없이 요즘은 소품을 담거나 명함을 보관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아이템입니다. 이런 응용이 바람직한 것 같아요.” 서울 셀렉트 중에서는 삼화금속의 가마솥 미니에 특히 관심이 간다고 했다. “일본에도 비슷한 제품이 있거든요. 하지만 미묘하게 달라요. 그런 은근한 차이가 재미있더군요.”

디&디파트먼트 서울의 오픈을 마무리한 뒤에도 나가오카 겐메이의 계획은 여전히 빼곡하다. 일단 교토 대학 내에 내년 4월에 들어설 새로운 지점을 준비하는 작업이 구체적으로 시작됐다. “디&디파트먼트는 단순한 편집 매장이 아니라 학교이기도 해요. 예전부터 소비자 및 생산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디자인에 대해 숙고하며 그 의견을 공유하는 자리를 꾸준히 마련해왔습니다. 그런 학습 공간으로서의 개념을 더욱 발전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마침 교토 대학 측에서 제안이 들어왔죠. 개인적으로도 기대가 큽니다.” 그 밖에는 호텔을 만드는 아이디어 역시 고민하고 있다. 현재 그는 디자인에 초점을 맞춰 일본의 47개 현을 소개하는 여행 단행본 시리즈인 <디 디자인 트래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호텔 오픈은 그 먼 연장선상에 있는 아이디어처럼 들렸다.

“숙박을 함으로써 그 지역에 대해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다고 봅니다. 잠만 자는 데 그치지 않고 나름의 식문화부터 특산품까지 집약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더욱 도움이 되겠죠.” 겐메이가 생각하는 건 쇼트 스테이, 미디엄 스테이, 그리고 1~3년 정도의 롱 스테이까지 체류 기간에 따른 프로그램을 디&디파트먼트가 제안하는 방식이다. 언제쯤 거기 숙박할 수 있을지를 묻자 그가 슬쩍 웃었다. “저도 얼른 묵고 싶습니다만… 아무래도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할 테니까요. 아직 정확한 일정은 서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이층침대 하나 달랑 놓여 있고 1박에 1천~2천엔 정도 가격이 매겨지는 평범한 객실은 만들지 않으려고 해요. 일본 각 지역의 특색을 잘 녹여낸 공간이었으면 합니다. 영업 부진에 시달리는 지방의 비즈니스 호텔을 사들인 뒤 개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나가오카 겐메이는 디자인이 그 지역과 환경에 대해 웬만한 문서 자료 이상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언젠가는 <디 디자인 트래블 서울>도 꼭 만들고 싶다는 말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서울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이 이곳의 개성이나 전통을 보다 깊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죠. 디&디파트먼트 서울이 두 나라 사이에서 단지 언어를 중계하는 것 이상의 통역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