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과 1994년에만 청춘이 존재했던 건 아니다. 비록 90년대보다 덜 풍요로웠으나 여전히 뜨거웠던 2000년대의 어떤 기록.

2002 그 여름의 광장, 그 겨울의 광장

2002년, 단짝 친구는 재수 중이었다. 그해 6월, 친구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야, 나 지금 집에서 빨간색 티셔츠 입고 설거지하고 있다.” 다행히 대학에 입학한 나는 역시나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악마 머리띠를 하고선,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 운동장과 강남대로 한복판 그리고 시청 광장을 휘젓고 있었다. 황선홍이 폴란드를 상대로 첫 골을 터뜨리거나, 안정환이 이탈리아전 연장전에서 골든골을 넣을 때마다 ‘2002년 월드컵부터 축구 본 여자’답게 눈물을 찔끔 거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업사이드’인지 ‘오프사이드’인지는 그해 처음 들어본 단어였다. 같은 해 수능이 끝나고 찬 바람이 불 즈음엔, 그 단짝 친구를 데리고 다시금 시청 광장으로 갔다. “야, 나도 대학생들 노는 것처럼 놀아보자”라기에 그랬다. 월드컵 4강 신화의 성지로 불리며 미래의 ‘서울 광장’이 될 꿈에 부풀어 있던 그 땅에, 종이컵에 촛불을 꽂은 사람들이 몰려들 즈음이었다.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미선이와 효순이를 추모하는 언니 오빠들과 촛불을 나누면서, 지금 이 순간의 정치사회적인 함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무언가 굉장한 역사의 한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달떴다. 홍명보가 스페인전의 마지막 승부차기에서 성공했을 때, 딱 그 마음이었다.

02학번. 이 모 교육부장관의 새로운 대입제도 도입과 세트로 묶여 영어 문법도 모르고 수학 문제도 못 푸는 ‘바보 학번’이라는 비웃음에 시달렸던 세대. 그럼에도 2002년을 스무 살로 살 수 있어서 좋았던 건,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뛰쳐나갈 수 있는 광장이 있어서였다. 어른들의 우려를 모르지 않았다. 바로 직전 해 9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쓰러졌고, 그해 말엔 역시나 바보라는 별명을 지닌 대통령이 당선되었으니, 아마 그 폭풍 같은 시대의 한가운데 선 청춘들이 불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뭐 그리 대단한 뜻을 품고 광장으로 향했던 건 아니다. 처음엔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었고, 그러다 보니 세상은 스무 살의 내가 아는 것보다 슬픈 구석이 있었고, 그럼에도 80년대의 청춘들보다는 신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란 희망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얼굴은 처음 봐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따뜻했다. 그들과 ‘단결’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진’할 마음 따윈 없었지만, 나는 나대로 즐겁게 살다가 가끔씩 이렇게 함께하는 것도 즐겁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다.

물론 졸업보다 먼저 세계 금융 위기가 찾아왔을 땐, 광장에서의 날들이 이력서 한 줄짜리도 안 된다는 절망에 낙담하기도 했다. 대학 4년 내내 술만 마시고 연애만 했어도 취업만 잘되더란 90년대 학번 선배들의 무용담이 부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즈음 대학에 입학한 후배들이 그러했듯, 나 역시 도서관에서 스펙이나 쌓을 걸 그랬나 슬그머니 후회한 적도 있다. 나의 마지막 광장이었던 2008년엔, 취업 준비생(그러니까 백수) 네 명이 쪼르르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시청 앞으로 향하며, 어떤 정치인이 ‘촛불집회는 실직자나 백수만 가는 것’이라고 했다던데 틀린 분석은 아니라며 반은 웃고 반은 울기도 했다.

지금은 백수를 탈출했지만, 여전히 그때 광장이 아니라 도서관에 갔다면 지금보다 통장 잔고가 묵직했을 거라고 툴툴대며 산다. 그러면서도 그 시절보다 더욱 외롭게 광장에 서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무거운 발을 대신해 통장을 연다. 잔고가 가벼워져서 마음이 벅찬 오묘한 경험을 할 때마다, 2002년의 광장에 서 있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를 생각한다. 너무나 풍요로워 혼자여도 충분했던 90년대, 반대로 지나치게 절박해서 다시금 혼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지금 사이에 껴 있을 수 있어서 운이 참 좋았다고. 그 시절의 광장 덕분에 세상에 대충 휘둘리고 싶을 때도, 눈 똑바로 뜨고 버틸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 누리는 이 별것 아닌 것조차, 온전히 나만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님을 몸으로 기억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언젠가 내가 그 광장으로 나설 수밖에 없을 만큼 절박해질 때 나를 위해 함께 서 있어줄 사람들이 있으리란 믿음, 그건 그해의 광장이 나에게 준 가장 든든한 통장 잔고다. –김슬기(<W Korea> 피처 에디터)

2005 우리는 모두 중2병 환자였다.

지난밤 술이 또 과했다. 아침에 일어나 밤새 켜져 있던 컴퓨터 앞에 앉았더니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불안한 마음과 함께 화면 보호기가 걷히고, 화면에는 낯 뜨거운 사진들이 떠오른다. 나는 지난밤 또다시 금단의 즐겨찾기를 클릭했나 보다. 바로 20대 초반, 피부보다 머릿결보다 애지중지하며 가꾸었던 나의 미.니.홈.피. 바야흐로 SNS의 시대다.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텀블러 등 온갖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아이돌이 공존하는 지금이 있기 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유일한 존재였던 시대가 있었듯, SNS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독보적인 강자 싸이월드가 있었다. 싸이월드가 이끌어낸 생활의 변화는 여전히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페북’에 올려야 한다며 식전에 감사기도 대신 사진 촬영을 하는 한국의 전통 식사 예절, 그 시작은 싸이월드였다.

지금이야 스마트폰 카메라로도 고화질의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당시엔 화소수 떨어지는 휴대폰 카메라를 대체하기 위해 누구나 다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여자친구와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던 그날, 그녀는 사진을 찍기 전에 스테이크에 나이프가 닿았다는 이유로 나를 미개인 취급했다. 지금도 밤이면 일명 ‘감성 트윗’이나 ‘감성 페북’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 시작 역시 싸이월드였다. 싸이월드는 전 국민의 ‘중2병화’를 이끌었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낮이나 밤이나 올릴 수 있지만, PC만 이용했던 싸이월드 시절엔 하루 일과가 끝난 심야가 되어서야 업로드를 할 수 있었다. 사진첩도 사진첩이지만, 심야에 쓰는 다이어리는 우리의 뼛속 깊숙이 잠재되어 있었던 감수성을 끌어내어 모두가 마치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가 된 듯 시도 아니고 일기도 아닌 우울하고 추상적인 글을 쓰게 만들었다.

2005년 스무 살이었던 나의 경우 그 내용은 주로 연애에 관한 것이었는데, ‘누군가가 읽을 수 있는 일기’에는 다분히 ‘누군가가 읽었으면 하는’ 의도가 담기게 된다. 그녀만 알 수 있는 내용을 문학적 용어로 하면 ‘낯설게 하기’ 기법을 사용하여 쓰게 되는 것이다. 그래, 우리는 싸이월드로 연애를 했다. 온갖 친구들의 미니홈피를 ‘파도타기’해서 그녀의 싸이월드를 찾아내고, 밤새 스토킹하다가 행여나 ‘이벤트’에 걸려 내가 방문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BGM 하나를 깔아도 그녀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는데, 특히 메인 화면에 내건 문구와 더불어 BGM은 ‘나는 이런 사람이오’라는 것을 어필하는 강력한 수단이었으므로 신중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여성의 경우엔 더욱 까다롭게 선곡했던 것 같은데, 일단 너무 시끄럽지 않아야 하고, 적당히 키치하면서도 반대로 마니악해서도 안 되며 잔잔한 감성을 전달 할 수 있어야 한다 정도가 기준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각광받았던 뮤지션이 요조와 같은 소위 홍대여신과, 소규모 아카시아밴드와 같은 감성적인 인디 뮤지션이었다.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형성되는 데에 분명이 이러한 풍조가 기여했으리라 생각한다.

어쨌거나, 전날 술에 취한 덕분에 오랜만에 스무 살 나의 흔적을 만났다. 지운다고 지웠는데 아직까지 남아 있던 옛 여자친구와의 사진이나, 그녀를 향한 중2 감성 넘치는 다이어리, 2005년을 강타했던 말도 안 되는 패션이 나의 손가락 발가락을 무참히 우그러뜨린다. 그럼에도 싸이월드에는 금세 휘발되어버리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는 다른 아날로그적 감성이 있었다. 아, 당시에는 첨단이었고, 디지털 시대의 상징이었던, 국문과 선배들이 그렇게 비인간적이라 욕하던 싸이월드가 지금에 와서는 촌스러운 아날로그적 기표가 된 것이다. –강백수(시인, 싱어송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