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과 1994년에만 청춘이 존재했던 건 아니다. 비록 90년대보다 덜 풍요로웠으나 여전히 뜨거웠던 2000년대의 어떤 기록.

2007 안녕, 나의 루저 친구들 옥탑방에서의 첫 끼는 라면이었다. 하남의 부모님 댁이 아닌 화곡의 내 옥탑방으로 퇴근한 첫 날, 짐만 덩그러니 놓인 방에 가구라고는 오직 TV 한 대였다. 티비를 틀자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이 나왔다. 윤은혜보다 먼저 잘랐는데도 따라 했다며 놀림을 받던 바가지 머리를 하고, 양은 냄비에 라면을 끓여 티비 앞에 앉았다. 홍대 거리와 그안을 떠돌고 있는 여름의 기운, 습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풍경을 라면을 먹으며 지켜봤다. 8월의 옥탑방은 더웠고, 땀이 났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우며 벌레까지 많은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5만원(50만원이 아니다)짜리 옥탑방에서, 3년을 살았다. 언론고시라 불리는 방송국 입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방송작가로 일했던 4개월을 제외하면 내내 백수였고, 아주 적은 돈으로 살아남는 법을 익혀야만 했다. 대학은 졸업했지만 직장은 없고, 아르바이트로 아슬아슬한 잔고를 지켜가며 ‘지망생’의 신분으로 버텨야 하는 삶. 돌이켜보면 그해, 2007년의 드라마들에도 꼭 나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고민하며 세상의 기준에서 ‘실패한’ 시간을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뮤지컬 배우 지망생 메리와 무협 소설가 지망생 대구(<메리대구공방전>)는 말할 것도 없고, <커피프린스 1호점>의 은찬 역시 자신의 꿈조차 알지 못하는 청춘이었다. 섬마을에서 에이즈에 걸린 딸을 키우는 미혼모와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가 그래도 살아보자고, 우리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보자고 노래하는 <고맙습니다>를 보는 동안 봄이 지나갔다. <한성별곡> 을 보면서는 실패한 왕의 뒷 모습에 내 첫 대통령의 그것을 겹쳐보기도 했다. “애쓴 만큼 얻을 수 있는 세상”(<한성별곡>)은 결국 오지 않을 것을 어렴풋이 예감하면서도, “우린, 그냥 어떻게든 살아”(<고맙습니다>)갈 거라고 말하는 드라마 속 사람을 만날 수 있어 홀로인 옥탑방도 외롭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는 대선이 있었다. 친구는 그래도 혹시 모른다며 주소지인 장성까지 기차를 타고 내려가 투표했지만, 결과는 모두가 예상한 대로였다. 그 시절 배운 것은 오직 하나, 앞으로 계속 더 나빠지리라는 것뿐이었다. 인생의 여름은 이미 지나갔다. 좋은 날도 있겠지만 매일 더 추워진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오래 품은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이루어진다 해도 현실은 남루할 테다. 그해가 지나고 그런 사람들을 드라마에서 보는 일은 힘들어졌다. 이미 충분히 초라한 ‘나’의 ‘현실’을 굳이 티비에서까지 보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그런 드라마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시장 논리가 방송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그래서 난 조금 더 외로워졌다. 그래도 그 시절을 지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 드라마들을 보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를 견디는 방법을 서툴게나마 배웠다. 이제 티비 속 그 누구도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진 않지만 뭔가 내 안에서 이만큼 키가 컸을 거야. 꼭 취직을 하고 통장 잔고가 늘어야 발전을 한 건 아니다”라고 메리처럼 말해주지 않는다.하지만 난 그런 말을 들었고, 또 기억하고 있다. 대구가 그랬다. “아무도 나에게 희망을 걸지 않을 때 버티는 게 진짜 빛나는 거”라고. 난 이렇게 바꿔 말하겠다. “심지어 나조차 내게 희망을 걸지 않을 때 살아가는 게 진짜 빛나는 거”라고. 그런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꿈을 지운 채 나이 서른 하나에 호주행 비행기에 올라, 여기서 돈을 벌어 리오넬 메시를 보러 바르셀로나에 가겠다는 꿈으로 버티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로 살고 있는 지금도, 덕분에 난 “내 안에서 이만큼 키가” 크고 있는 중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 윤이나(TV 평론가)

2011 나는 병맛이오, 잉여로소이다.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나를 더 잘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거울아 거울아 지금의 나를 만든 해가 언제니? 2011년이 응답했다. 본격적으로 기자 시험을 준비한 건 2010년이었다. 이명박 시대의 ‘멘탈’이 그런 결심을 굳히게 했다. ‘부자’가 되고 싶어 도덕성에는 눈을 감은 사람들, ‘막연한 희망’ 때문에 타인에게 삶을 맡기는 수동적인 자세, 그런 사회가 슬펐다. 하지만 슬퍼하는 사이 금세 2011년이 됐고, 대학을 졸업했지만 나는 여전히 ‘준비생’ 혹은 ‘지망생’이었다. 소속 없는 삶 때문에 자존감은 낮아지고 불안감은 커가던 그 시절 <슈퍼스타K 3>를 통해 장범준을 알게 됐고, 그렇게 디시인사이드 버스커버스커 갤러리에 입갤하고 말았…. 하루에도 몇 시간씩 어떤 온라인 공간에 소속됐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다. 일간베스트 및 개념글을 섭렵하며, ‘병맛’ 돋는 글들에 푹 빠졌다. ‘병신 같은 맛’의 줄임말인 ‘병맛’을 이해하려면, 2009년부터 연재된 웹툰 <이말년 월드>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승객 한 명이 버스 요금통에 담배를 넣는 바람에 버스에 불이 붙는다. 손님은 느닷없이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고 하고, 운전기사는 “그래야 내 손님이지” 맞장구를 치며 버스를 ‘명박산성’으로 몰아간다. 그러곤 다 죽는다. 그렇게 무엇이든 ‘기승전병’으로 끝나는 ‘병맛’은 정해진 ‘기승전결’을 갖춰야만 인정해주었던 기성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무엇이었다. 나 역시 “야, 요즘 장범준 다른 밴드 한다더라?”라는 제목을 보고 놀란 마음으로 클릭해보면 “내 허스밴드^^”라고 적혀 있어도 그 자체로 즐거웠다. 그러고 그 수많은 병맛글 속에서도 충분히 장범준의 진짜를 찾을 수 있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수년간 자작곡을 쓰고 거리에서 노래하며 연주하는 시간을 보낸 것이 곧 자신의 이력이 된 사람을 따라 걷고 싶었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언론사에 입사하려 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꼭 언론사에 입사해야만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직접 글을 쓰고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나와 같이 ‘준비생’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자신을 서사화할 기회를 제공하는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하고 준비생의 삶은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잉여’라고 자조한다. 어떤 조직이나 회사가 자신을 선택하지 못했기에 취업 시장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질식하지 않기 위해 바르작대는 몸짓은 세속적인 기준에서 쓸데없는 일이기에 잉여짓이라 판정받는다. 타자화의 대상이 된다. 이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2012년 2월 잉여를 위한 잉여에 의한 잡지 <월간잉여>를 창간했다. 곧 <월간잉여>가 2주년을 맞는다. 유희열은 말했다. “다 같이 망가지면 망가지는 게 아니다.” <월간잉여>를 통해 같이 망가지고 자조하며 외롭지 않았다고 말해온 독자들이 있었다. 잡지를 통해 다양한 삶의 문제와 인생관을 공유했다. 2년 동안 체감한 것은, 적어도 지금은 ‘부자’라는 획일한 욕망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업률이 높아지고 빈부 격차가 커진 현실은 슬프지만, 그로 인해 청년들은 욕망을 다양화하고 다른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병맛’ 동영상을 직접 찍어 올리다 작가가 된 사람, 음악을 직업으로 가진 채 오래오래 살아남기 위해 악기를 공유하거나 돈을 모아 공연장을 대관하는 협동조합을 만든 사람, 세상의 속도가 아닌 자신의 속도로 살아가기 위해 직장을 뛰쳐나와 햇빛을 보고 텃밭을 가꾸는 삶을 택한 사람 등 다양하고 주체적으로 잉여짓하는, 아니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을 보며 우리가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물론 앞날은 여전히 불안하고 막막해 보인다. 그러나 지금 의미와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하며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다 보면 죽을 때 후회는 덜 남겠지. 몇 년 혹은 몇십 년 뒤, 지금을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분투했던 청년들의 시대로 기억하길 바라며 나 역시 버텨가겠다. 버티다 보면 장범준을 인터뷰하게 될 날도 오겠지. –최서윤(<(격)월간잉여> 발행인 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