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상혁을 채우고 있는 생각의 단편들.

나만의 왕국
– 전 직장에서 퇴직 의사를 밝혔을 때 모든 이들이 이유를 물었다. 그때마다 왠지 부끄러웠지만 “작아도 나만의 왕국을 만들어보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모두 조용히 고개를 끄떡였다.
– 거창하고 웅장한 왕국을 세우겠다는 포부에서 시작한 건 아니다. 내 취향만으로 온전히 채운 브랜드, 그저 나의 왕국을 만들고 싶을 뿐,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 그간 빅 쇼를 수차례 치르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다. 규모가 작더라도 나의 생각을 한결같이 ‘속삭이는 듯한’ 쇼를 하고 싶다고.
– 마흔이 넘어서 ‘드디어’ 홀로서기에 나섰다. 사실 내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후배 디자이너들과 나란히 어깨를 부딪치며 경쟁하는 게 왜 쑥스럽고 부담스럽지 않겠나. 그런데 한편으론 오히려 그게 좀 재미있을 것도 같다.
HEICH ES HEICH. 아직은 작은 내 ‘왕국’의 이름이다. 원래는 한상혁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할까 고민했는데 결국 이니셜인 HSH를 발음 나는 대로 적은 후 앞뒤 밸런스를 고려해서 지었다.

디렉터와 디자이너
– 크리스 패션에서는 ‘파리 게이츠’라는 캐주얼 웨어 브랜드의 ‘디렉터’인 동시에 ‘HEICH ES HEICH’라는 개인 브랜드의 ‘디자이너’다.
– 그간의 경험상 한국에선 디렉터의 역할과 디자이너의 역할이 하나가 되긴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가장 큰 이유는 디자이너로서 완성한 컬렉션 상품이 판매보다는 마케팅만의 역할에 그치기 때문이다. 또한 디렉터는 항상 시선을 주변에 두고 브랜드에 새로운 유행을 접목시켜야 한다면, 반대로 디자이너는 자신의 정체성에 반하는 것을 수용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 지금의 목표는 디자이너와 디렉터 두 가지 역할을 완전히 분리하여, 한상혁이라는 디렉터와 MR. HEICH라는 디자이너의 삶을 동시에 유지해가는 것이다. 물론 이 두 영역은 서로에게 순기능을 하기도 한다. 따로 떨어져 있지만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기도 하다.
– 과거 본과 엠비오에서 칭찬받은 이유는 브랜드 안에서 디자이너가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것과 브랜드의 디자이너가 패션을 문화로 표현했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한국 안에서 디자이너와 디렉터의 삶을 잘 조율, 후배 디자이너들의 롤모델이 되고 싶다.

해외 진출
– 사실 본에서 엠비오로 영입되는 과정에서 세운 목표는 해외 진출이었다. 결국 여러 가지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그래 죽기 전에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에 퇴사를 결정했고, 이제 내 브랜드를 통해 그 오랜 목표를 이루고 싶다.
– HEICH ES HEICH는 글로벌한 브랜드로 육성하려는 생각에서 시작한 브랜드다. 이미 엠비오에서 마지막 두 시즌 동안 컬렉션 상품을 해외에 갖고 나갔는데, 하비 니콜스와 오프닝 세레모니 등에서 관심을 보이고 바잉을 했다. 컬렉션 제품을 판매한, 최초의 경험이다. 이제 두번째 경험을 시작할 차례다.

새로운 패러다임 그리고 발명
– 퇴사 이후 여러 브랜드의 제안이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은 ‘가능성이 보이는 시장’인지의 여부였다. 사실 내가 본과 엠비오를 통해 처음 만든 패러다임은 남성복 캐릭터에 널리 퍼져 있고 더는 새롭지도 않다. 이젠 또 다른 패러다임을 열 만한 시장에서 디렉팅하길 바란다.
– 요즘 나는 평일 밤 10시 드라마 PD에서 주말 6시 예능 PD가 된 기분이다. 이젠 파리게이츠라는 새로운 무대에 선 지금, 캐주얼 시장에서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삶에 대한 ‘발명품’을 제안하고 싶다.
– 내년 3월 서울 패션위크에서 여성복에 도전한다. 하지만 ‘여성만’을 위한 옷은 아니다. 남성과 여성이 공유할 수 있는 옷이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