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할배 할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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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이 더욱 아름다운 할배 할매들에게 바치는 젊은 8인의 달뜬 편지.

백남준
40세, 지금 여기, 시간을 쓰고 죽음을 먹고사는 미술가. 그렇게 살아가는 나는 다른 삶을 끊임없이 살펴야 하고, 나의 삶을 알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지 않을 도리가 없으며,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을 알기 위해 철학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잘 안다. 그건 시간의 이미지를 만드는 직업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인간을 연구하고 지향하는 한 사람으로 늙어죽기를 원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인간적 향기와 감동을 주는 선배 미술가로 나이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은 역시나 백남준이다. 내가 6개월간 머물며 작업했던 뉴욕은 백남준의 흔적과 역사를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었던 곳이다. 세계 예술계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사람을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았던 사람, 특히 한국인이라면 “고향 생각은 감상적이기는 하나 자극이 되어 좋지!”라는 말을 되뇌며 신분의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반가워하고 대화했던 사람. 그는 권력적, 정치적 기회주의를 지양(止揚)하며, 늘 젊은 후배 작가와 같이 작업하고 전시하고파 했던 겸양의 유명인이었다. 후배작가들이 전시와 발표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의 영광된 자리를 양보하고, 늘 젊은 작가의 고민을 함께 나누던 그의 삶의 흔적을 볼 때마다 만나게 되는 진향(眞香)의 별. 비록 생전에 그를 만나지 못해무척이나 한스럽지만, 그 별의 진내음만으로도 감동받기에 충분했다.

베니스에서도 그렇다. 대체로 2년에 한 번씩 뜨거운 여름이 되면 베니스에 간다. 물론 비엔날레를 보기 위해서지만, 그때마다 백남준이 자신의 드로잉 100점과 바꾼 한국관을 떠올린다. 국가관들이 모여 있는 자르디니 안에 더 이상의 입주 허락이 불가능하자, 백남준은 한국관을 세우기 위해 이탈리아 정치인과 베니스 시장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100점의 드로잉과 허가서를 맞바꿨다. 그가 자신의 작품과 바꿔 얻어낸 그것이 지금의 나를 비롯한 젊은 한국 작가들의 희망과 자긍심이며, 한국 미술계의 오늘은 그가 만들어준 미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끝까지 권력과 부조리와 싸우는 것은 예술가들뿐’이라면 말하며 권력을 향해서는 독설을 퍼붓고 비웃다가도, 후배 작가들과 한국에는 더없이 사랑을 주었던 백남준. 그가 보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나도 당신처럼 살고 싶다는 연서를 적게 된다. 나는 아직도 당신이 아프다고. – 김기라(설치 미디어 작가)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쉼보르스카는 내게 항상 할머니의 얼굴로 남아 있는 폴란드 시인이다. 그녀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그녀는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였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시선집 <끝과 시작>이 그녀를 만난 시작점이었다. 그녀가 평생에 걸쳐 써온 시들을 연대별로 묶은 이 시집을 나는 아직도 종종 읽는다. 특히,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서로 다를지라도……”(<두 번은 없다>)와 같은 구절에서 드러나는 성찰은 내게 더 집요해질 것을 요구한다. “몰라, 정말 모르겠다/마치 구조를 기다리며 난간에 매달리듯/무작정 그것을 꽉 부여잡고 있을 뿐”(<어떤 사람들은 시를 좋아한다>)과 같은 구절을 읽으면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걸어가는 나의 여정을 곰곰 되새기게 된다. 그녀는 오랫동안 썼지만, 많이 쓰진 않았다. 한 편을 가지고 몇 달간 물고 늘어지는 치열함을 발휘했던 시인이다. 늙을 때까지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맨 치열한 시인이었다. ‘젊은 시’나 ‘젊은 시인’과 같은 수사가 유행처럼 쓰이는 이 시대에 나는 그녀야말로 젊은 시를 쓴 젊은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머리와 가슴을 둘 다 울리는 그녀의 시는 그렇게 나왔다.

“온 힘을 다해 찾는다/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단어를 찾아서>) 그녀의 데뷔작을 읽을 때마다 기진맥진해진다. 나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시를 쓸 때마다 언제나 처음 시를 쓰는 것 같은 심정이다. 스킬이 는다고 해서 자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더듬는 심정으로, 배우는 심정으로 첫 단어를 쓴다. 쓰고 지운다. 다시 찾는다. 그녀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한 말에서부터 나는 다시 시작한다. “시인은 자신이 쓴 작품에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또다시 망설이고, 흔들리는 과정을 되풀이합니다.” 늙어서도 자기 갱신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녀를 그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불가능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어리석지만, 어리석어서 유일하게 매혹적인 일이다. – 오은(시인)

데이비드 보위
데이비드 보위를 떠올릴 때마다, ‘구여친’ 생각이 난다. 그녀는 나보다 한 술 더 뜨는 보위의 팬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나이 든 보위의 목소리가 좋아서’가 그 이유였다. 록 역사에 명반이라 공인된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보다, 보위가 노년에 발표한 음반 <Reality>가 더 좋다던 여자였다. “나이 든 남자의 목소리는 꽤 섹시해.”

젊은 날의 보위는 록의 아이콘, 화려하고 반짝이며 양성적인 글램 문화의 대변자, 멋진 작곡가이자 보컬이었다. 그렇게 입고,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면서, 그런 노래를 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70년대를 넘기지 않고 죽었더라면, ‘최강 전설 로커’의 영원한 표본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보위는 그 이후로 40년 이상 죽지 않고 살아 있고, 총 30장에 이르는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록은 젊은 음악이고, 유성처럼 타오르는 것이며, 그래서 모든 밴드는 덜 다듬어진 1, 2집 때 최고의 시기를 보낸 후 쇠락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 <24시간 파티 피플>은 보위를 젊을 때 죽겠다고 해놓고 아직 살아있는 배신자로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2013년 현재, 부산 출신 뮤지션 김태춘 씨와의 대화 한 대목을 슬쩍 언급해보자. “요새는 나이 들어서도 활동하는 뮤지션들이 멋져 보이지 않아요?” “그렇데이.” “보위나 에릭 클랩의 신곡은 전성기에 비해서 퀄리티도 안 떨어지고.” “맞습니더. 중요한 건 퀄리티가 안 떨어져야 한다는 거 아입니꺼.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아찔하지요.” 젊을 때 반짝 잘하는 건 어찌 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 계속해서 자기 관리를 하는 게 훨씬 어렵다는 걸 알아주는 시대가 왔다. 요절해서가 아니라 창작력의 쇠퇴로, 정신적 허무감으로 활동을 그만둔 뮤지션이 얼마나 많은가. 그걸 노련미로 보충해가면서 끊임없이 생산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용필형도 그렇고 보위형도 그렇다. – 깜악귀(눈뜨고코베인 보컬, 팟캐스트 ‘인디 돋는 밤’)

우디 앨런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들은 자신에게 혹시나 있을지 모를 창작의 전성기가 한시적이지 않을까 걱정한다. 상업적인 예술, 쇼비즈니스 세계에서 자신의 상품 가치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많은 데이터, 그리고 기술의 발전 속도와 맞물린 감각의 급류 안에서 조바심을 내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긴 여정을 그리는 창작자는 항상 부럽다. 그들은 운이 닿은 자일 수도 있고, 늙지 않는 감각의 소유자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40여 편이 넘는 필모그래피를 지니고 어느덧 여든 가까운 나이가 된 우디 앨런은 얼마 전 <블루 재스민>이라는, 또 하나의 정점을 찍는 영화를 만들었다. 한 여자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우디 앨런 특유의 화법대로 단순하고 경쾌하게 진행되지만, 그 장면 하나하나엔 다양한 삶의 통증이 새겨져 있다. 젊은 시절 스탠딩 코미디 바에서 유약한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근심을 털어놓던 우디 앨런. 그에게 영화적인 전성기를 가져다준 것 또한 바로 그 콤플렉스로부터 비롯된 고통과 애착이었다.

실제로 꾸준히 사랑받은 그의 영화와 달리, 이 결핍 많은 남자는 등고선이 너울 치는 삶을 살았다. 쪽 팔린 순간도 많았다. 우디 앨런과 미아 패로 그리고 순이의 스캔들은 전 지구적이었다. 운 만큼이나 불운 또한 많았던 이 사내는 사실 유행에 빠르게 대응하는 감각과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근래의 그의 영화를 보자면, 그에게 가장 많은 자극을 주는 토대는 타인의 영화가 아니라 자신의 영화들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뿌리로 두고 너울 쳤던 삶을 양분 삼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같은 이야기를 변주하며 점점 깊게 간다. 희망도 깊게 말하며 고통도 깊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결국 자신의 사연을 잊는다. 하지만 우디 앨런은 자신의 고통도 애착도 잊은 적이 없다. 영화 안에 담고 끝없이 되돌려 이야기하며 그 이면을 찾는다. 관찰 대상을 점점 깊게 보며 여전히 단순하게 말할 줄 안다. 그렇게 우디 앨런은 운과 기술적인 감각에만 의존하지 않고, 여전히 애정을 찾고 고통을 보고 스스로의 범위를 넘는 방식으로,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가장 긴 전성기를 지닌 감독이 되었다. – 김종관(영화감독)

에디터
피처 에디터 / 김슬기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 HONG SEUNG P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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