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이미지의 스웨터는 청초한 붓꽃이나 가느다란 사시나무 같은 여자에게나 어울리는 옷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스웨터들을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스웨터, 라고 소리 내어 이름을 부르면 늘 지점이 모호한 향수에 사로잡힌다. 아기의 피부에 보송하게 밀착된 니트 모포나 유치원 사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알록달록한 풀오버, 혹은 비슷한 생김새에 색깔만 달리한 할머니 옷장의 카디건처럼, 과거의 한 장면에는 늘 스웨터가 자리한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가죽을 걸쳐 입던 원시시대 이후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의류 제조법이라는 점이 주요한 이유일 것이고, 털실이라는 소재 자체와 이를 짜서 만드는 제작 특성상 나올 수 있는 디자인에는 한계가 있기에 그 생김새가 다채롭지 못하다는 점도 니트 웨어의 이미지를 낡게 만든 원인일 것이다.
편직물에 익숙한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스웨터 만들기가 꽤 까다롭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즌 스웨터는 ‘겨울 패션의 꽃’이라고 하는 코트나 모피 아우터 사이에서도 눈에 확 띄는 존재감을 과시하는 주요 아이템으로 활약했다. 펑크나 그런지, 커다란 볼륨과 클래식한 50년대 등 이번 시즌을 정의하는 주요 트렌드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아이템 역시 스웨터다. 캐시미어로 얇게 가공해 주로 이너웨어로 쓰이던 예년과는 달리 여러 종류의 원사를 풍성하고 폭신하게 짠 것이 대세다. 다양하게 디자인하기에 어렵다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스웨터가 이 천차만별의 트렌드 속에서 쇼핑 1순위 아이템으로 급부상하게 된 데에는 셀린과 생로랑의 영향이 컸다. 여자의 욕망을 부추기는 데 천부적 재능을 가진 피비 파일로의 방식부터 보자. 신축성 있는 소재로 허리를 조이고 아래로 내려 갈수록 넓게 펼쳐지는 피트&플레어 실루엣의 스커트를 메인 아이템으로 사용한 이번 셀린 컬렉션에서 도톰하고 간결한 짜임의 크림색, 회색, 남색 스웨터들은 이 나팔꽃 같은 스커트를 강조하는 최적의 파트너가 되어주었다. 래글런 소매가 눈에 띄는 크림색 스웨터는 손끝부터 1/3 지점까지만 다른 부분보다 두툼한 짜임을 넣어 마치 워머를 레이어링한 것처럼 보인다. 느슨한 남색 스웨터는 이보다 훨씬 볼륨이 크며 앞판보다 뒤판의 길이를 좀 더 길게 짜 넣었다. 무엇보다 손등을 덮을 정도로 과장되게 긴 소매, 소재는 다르지만 스커트와 같은 색감으로 톤온톤 스타일링을 하여 여성스러운 미니멀리즘을 ‘쉽게’ 풀어냈다는 점이 더욱 멋스럽다. 게다가 실제로 들어보면 무게가 꽤 나간다. 보송보송한 기존 스웨터의 이미지보다는 묵직한 코트 같은 느낌에 가깝다. 스웨터에 스커트만을 매치했지만 룩 전체가 완성도 높아 보이는 요인이 여기에 있었던 것. 한편 LA 그런지를 20년 만에 트렌드의 최전선으로 되돌려놓은 생로랑의 에디 슬리먼은 오프닝 룩부터 체크무늬 니트 카디건을 등장시킬 정도로 스웨터를 강조했는데 일부에서는 빈티지 가게에서나 건져 올릴 법한 아이템이라며 폄하했지만, 자세히 보면 금사로 별무늬를 짜 넣거나, 스팽글로 니트 특유의 꽈배기 짜임을 표현하는 등 공이 꽤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물론 그런지 콘셉트에 충실하게 좀 먹은 듯 낡은 분위기가 풍기긴 한다).
셀린과 생로랑뿐만이 아니다. 시즌 트렌드의 척도를 가늠할 때 제일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브랜드에서 예외 없이 스웨터가 들어가는 룩을 주요하게 배치했다. 드리스 반 노튼과 스텔라 매카트니, 데스켄스 띠어리에서는 셔츠 위에 남자친구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커다란 스웨터를 매치해 ‘빅 볼륨’과 ‘맨즈 웨어시크’라는 두 가지 주요 트렌드를 모두 소화해냈다. 벌써부터 외국에서는 보이프렌드 재킷이라는 단어만큼이나 보이프렌드 스웨터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을 정도다. 니트 소재 특유의 가녀리고 여성적인 느낌은 잠옷 스타일의 슬립에 최상급 캐시미어 스웨터를 매치한 루이 비통, 폭 좁은 미디스커트에 정숙한 카디건을 매치해 복고풍 여대생 룩을 만든 로샤스, 손목이나 네크라인, 가슴 부위 등의 짜임을 달리해 여성의 풍만한 상체를 관능적으로 표현한 이자벨 마랑 등의 컬렉션에서 발견할 수 있다.

1. 보송한 표면의 아이보리 스웨터는 이자벨 마랑 제품. 78만원.
2. 뒤집은 듯한 짜임에 큼직한 볼륨이 돋보이는 연분홍 스웨터는 폴&조 제품. 79만원.
3. 앞판에 다이아몬드 형태의 짜임을 넣은 캐멀색 스웨터는 버버리 프로섬 제품. 2백만원대.
4. 래글런 소매처럼 컬러 블록을 이용한 디자인의 스웨터는 질 by 질 스튜어트 제품. 29만8천원.
5. 두 가지 색의 원사로 와일드한 무늬를 넣은 큼직한 스웨터는 스포트막스 제품. 가격 미정.
6. 앞판에 색색의 밍크 소재를 덧댄 스웨터는 펜디 제품. 9백19만원.

하나 더, 이번 시즌 스웨터를 언급할 때 빠져선 안 될 독특한 현상 중 하나는 요즘 대세인 쿨한 스트리트 룩, 특히 티셔츠나 맨투맨 셔츠의 자리를 스웨터가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판에 반짝이는 홀로그램 타일처럼 무늬를 낸 알렉산더 왕의 회색 스웨터나 로맨틱한 꽃무늬 맥시 스커트와 스타일링한 지방시의 스팽글 스웨터,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의 노란색 그물 스웨터, 메탈릭한 표면이 근사한 3.1 필립 림의 스웨터와 랙앤본의 커다란 하운즈투스 무늬 스웨터 등은 이전 시즌이라면 분명히 그래픽적인 맨투맨 셔츠가 들어갔을 법한 룩에 배치되어 있다. 래글런 소매, 그리고 소맷부리와 허리에 고무단을 덧대는 맨투맨 특유의 디자인 요소가 스웨터로 옮아간 것을 보면 이들이 목표하는 지점을 분명하게 캐치해낼 수 있다. 알렉산더 왕이 빅 패션 하우스의 디렉터로 간 것은 가방보다 티셔츠를 위해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며, ‘가질 수 있는 럭셔리’의 선봉장으로 티셔츠의 파워가 거세진 이 시기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티셔츠만큼 쉽게 입을 수 있는 아이템이자 브랜드 입장에서는 티셔츠보다 좀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스웨터를 선택한 것은 꽤 영민한 전략인 셈이다. 역시, 왕과 티시의 두뇌 회전은 요즘 물이 제대로 올랐다. 사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여전히 니트 웨어를 어렵다고 여긴다. 미쏘니와 소니아 리키엘 정도를 제외하면 니트로 유명한 브랜드 가운데 토털 컬렉션을 열 정도로 디자인을 계속 개발하는 브랜드를 찾기도 힘들다. 직물과 니트의 제작 방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직물로 된 옷은 패턴이 있고, 디자이너의 의도에 따라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가게 하여 원단을 잘라 봉제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니트도 물론 패턴이 있기는 하지만 이에 기반해 프로그램을 짠 다음 마치 스캔을 하듯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짜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되었을 경우 수정할 수 있는 여유 시접분이라는 것도 없기에 처음부터 다시 짜서 만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터가 이처럼 풍성하게 등장하는 원인은 실용주의, 즉 잘 팔리는 옷을 만들어야 하는 요즘의 패션 시장에 기반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개념이 중요해지면서, 소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어요. 디자이너들이 디자인 그 자체를 실험적으로 많이 바꿀 수 없다면 결국 소재의 독특한 사용이나 믹스 매치로 색다른 요소를 줘야 하거든요. 그 지점에서 니트는 저처럼 직물을 주로 다뤄온 디자이너들에게는 신선한 소재이면서 동시에 소비자가 원하는 실용성에 대한 수요를 만족시키기 딱 좋은 소재라는 거죠. 사실, 스웨터처럼 편한 게 또 있겠어요?” 소재에 특히 공을 들이는 것으로 알려진 스튜디오 K의 디자이너 홍혜진의 설명이다. 실용적이면서도 디자이너의 시각이 들어간 신선한 스웨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이번 시즌 특히 나일론이나 트위드, 가죽, 심지어는 모피 등 완전히 다른 소재를 니트와 믹스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색색의 토끼털이 패치워크된 끌로에의 스웨터, 풍성한 깃털 프린지와 레이스를 밑단에 더해 스웨터 드레스를 만든 사카이, 최상급 밍크를 경쾌하게 염색해 스웨터 앞판에 배치한 펜디, 소매 부분만 모피로 처리한 막스마라, 퀼팅 처리된 패딩 소매와 체크 니트를 덧붙인 페이 등 스웨터 특유의 ‘올드’한 느낌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은 이번 시즌 전반에 걸쳐 풍성한 결과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좋은 스웨터’를 고르는 노하우는? 다른 옷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좋은 소재를 고를 것. 특히 털실은 ‘살아 있는’ 유기체여서 알러지 유발 가능성이 적은 자연 소재를 골라야 한다. 두 번째는 짜임의 방식. 옷을 뒤집어서 봉제를 보면 그 옷의 ‘등급’이 판가름 나듯, 좋은 스웨터는 뒤집었을 때 보풀이나 잘못 짜인 부분, 니트 끝을 잘라서 꿰맨 부분을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스웨터 소장 본능에 불을 붙이는 마지막 팁. 모든 소재 중에 니트가 가장 ‘원가 자체가 높은 옷’이라는 점! 일반 직물보다 원사의 비중이 높아 브랜드 이름값, 광고와 마케팅, 유통 등에 지불해야 하는 ‘부대비용’이 적다. 한마디로 제값을 하는 옷이라는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스웨터의 투자 가치에 대한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1. 네크라인, 소매, 앞판과 소맷부리 등 거의 모든 부분의 짜임을 달리한 스웨터는 르 모이네 트리콧 by 슈퍼노말 제품.
2. 느슨한 짜임 방식으로 만들어 색이 비칠 정도로 얇은 스웨터는 에잇 세컨즈 제품. 4만원대.
3. 소매의 흰 앙고라 소재와 다른 색을 섞어 그래픽적인 느낌을 준 스웨터는 소니아 리키엘 제품. 1백65만원.
4. 두툼하고 견고한 짜임의 녹색 스웨터는 쟈뎅 드 슈에뜨 제품. 79만8천원.
5. 퀼팅 처리된 패딩 소매와 타탄체크 무늬의 니트를 덧붙여 만든 스웨터는 페이 by 분더숍 제품. 1백만원대.
6. 색 배치가 독특한 스웨터는 카이 아크만 제품. 16만9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