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각 분야에서 의미 있는 파장을 일으키며 주목받고 있는 이름들, 혹은 최근의 문화계를 흥미롭게 가속시킨 진짜 에너지들.

서울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총감독 최성민
백과사전이 ‘문자의 배열 상태, 혹은 레이아웃이나 디자인의 동의어’라고 정의하는 타이포그래피는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텍스트인 동시에 구체적인 메시지를 담는 디자인이다. 지난 8월 말에 개막해 오는 10월 11일까지 계속될 <서울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는 이 매력적인 주제에 관해 활발한 토론을 유도하고자 마련된 원탁이다.디자인 듀오 슬기와민의 일원으로 활동 중인 최성민은 토론의 출발점을 제시할 총감독 역할을 맡았다.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한 갤러러 팩토리의 단독전부터 BMW 구겐하임 연구소의 그래픽 디자인까지, 다양한 성격의 작업을 유연하게 섭렵해온 그는 관람객에게 명확한 답을 짚어주기보다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것 같다. “전문적인 문자 디자인으로서의 타이포그래피는 비엔날레 주제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보다는 문자를 매개로 하는 일반 예술로 접근하고자 했습니다.” 망라하기보다는 자극하고,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에 주목하고, 구경하기보다는 참여하는 전시. 최성민의 밑그림 위에서 타이포그래피와 문학의 관계를 탐색하는 ‘타이포잔치 2013’이다.

 2011년에는 작가로서, 그리고 2013년에는 총감독으로서 타이포잔치에 참여했다. 전시될 작업을 만드는  과 비교할 때 전시 기획은 어떻게 다른 경험이었나?
지금까지는 작가거나 관객이었을 뿐이다. 전시 기획은 이번이 처음이다. 뭔가 새로운 공부를 하진 않았기 때문에 기존 작업, 혹은 평소 관심 있던 주제의 연장선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냥 내 작업을 하듯 진행했다. 기본적으로 책 한 권 편집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어떤 요소를 어디에 배치할지 결정하는 일이니까. 물론 전시에서 보여지는 건 결국 작품이다. 내가 직접 만들지도 않았고 그중 절반은 신작이었다. 나와 큐레이터의 통제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었으며, 철저히 작가의 손에 맡겨야 하는 부분이 발생했다. 작업할 때와 다른 점이라면 그런 거다. 작가일 때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그게 어떻게 실현될지도 대충 짐작한다. 반면 전시 기획은 완전히 통제되지 않는 다른 사람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부딪치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한편으로는 재미있었다.

절반을 신작으로 구성했다고 했다. 참여 작가들에게는 어느 정도까지 구체적인 디렉션을 전달했나?
작가마다 조금씩 달랐다. 어떤 분, 예를 들어 안삼열 작가에게는 구체적으로 서체를 디자인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제껏 공개한 적이 없는 스케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마무리해 보내달라고 했다. 이호 작가는 서체 디자인을 공간과 연결지어 풀어줬으면 했다. 반면 막연한 키워드 정도만 제시한 경우도 있다. 일부는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다른 작품을 보내왔다. 사실 작업의 의뢰 단계보다는 작가 선정 단계에서 더 신중했다.

작가 선정의 기준은 무엇이었나?
‘타이포그래피와 문학’이라는 전시 주제에 맞춰 어떤 작업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일까 먼저 생각했다. 기존작은 작가가 아닌 작품을 보고 선정했고, 우리 이야기에 꼭 맞는 것만 골라서 배치했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러나 신작 작가 선정 때는 주제 적합성을 면밀히 따져야 했다. 그리고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신선한 인물이기를 바랐다. 그 외 다루는 매체와 분야, 순수 미술적, 혹은 상업 디자인적 성향, 그리고 출신지까지 고려했다.

콘서트에 가더라도 아는 노래가 나와야 재미있는 법이다. 유명 작가를 배제하기로 한 결정이 일반 관객에게는 불친절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사실은 선택의 문제였다. 예산 안에서 작가 20명을 초대할 수 있는데 10명은 스타고 10명은 신선한 이름이면 균형이 맞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여력이 안 됐다. 1~2명의 스타와 18명의 조연이 되면 그 갭은 메우기 어렵지 않겠나. 그럴 바에는 작품의 질에 집중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리고 나는 유명 작가들을 근본적으로 불신하는 편이다. 성의가 부족한 경우가 많아서다. 또 전시 맥락에서 볼 때는 제 아무리 유명한 작가라도 특별히 좋은 작품을 내놓는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전체 흐름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2013 타이포잔치의 타이틀은 ‘슈퍼텍스트’고 내용적으로는 타이포그래피와 문학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에 대해 좀 더 설명해준다면?
타이포그래피와 문학이라는 주제는 조직위원회에서 주어졌고, 그 주제를 다룰 만한 사람으로서 내가 발탁됐다. 주제를 어떻게 해석할지부터 결정해야 했다. 타이포그래피와 문학을 별개의 두 영역으로 보고 그 사이의 교집합을 찾는 방식은 피했다. 대신 타이포그래피 자체에 문학적 기능은 없을까, 그리고 문학 자체가 시각적일 수는 없을까를 생각했다. 그렇게 접근하면서 둘 사이의 접점을 묻고 싶었다. 이런 까닭에 전시에서 문학을 직접 다룬 작품의 비중은 크지 않다. 둘째로는 타이포그래피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고민했다. 서체 디자인이나 출판물 레이아웃 등 전문적인 영역에만 머무는 건 너무 좁은 해석이라 비엔날레라는 장기적 관점의 행사에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문자를 매개로 하는 각종 예술을 망라하고, 더 나아가 문자가 직접 등장하지 않는 작업에까지 이야기를 넓혔다.

기획자가 아닌 감상자 입장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작업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어렵다. 감상자로 이야기한다 해도 결국은 기획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특정 작품을 지목할 수는 없다. 그런데 기획자도 사람이라 우리가 더 좋아하는, 자원을 더 많이 배분하고 싶은 작업은 물론 있었다. 그게 아마 전시에서 보일 거다.

슬기와민의 작업에서도 타이포그래피는 주요하게 다뤄지는 요소다. 그래픽 디자이너 입장에서 타이포그래피는 다른 것 보다 특히 흥미롭게 느껴지는 도구인가?
오히려 훨씬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학교에 다닐 때는 일러스트레이션이나 브랜딩이 아닌 타이포에 관심을 갖는 게 뭔가 의미 있는 선택처럼 보였다. 문자를 읽고 쓰는 데 더 관심이 있다고 선언하는 셈이니까. 지적 허영일 수도 있는데 당시에는 그런 피상적인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슬기와민은 독창적인 활자체를 개발하기보다는 이미 흔하게 쓰이는 기존의 서체를 디자인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택한다. 전자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건가?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게 2005년이었는데 우리의 제한된 경험 안에서 판단 하기에 한국의 디자인은 문자를 너무 이미지처럼 소비하는 것 같았다. 문자가 이미지로서 예쁘지 않은 것 같으면 아예 조그맣게 구석으로 밀어내버린다든가. 허영심이나 사대주의 때문에 디자이너들이 영어를 많이 쓰는 건 아닐 거다. 그냥 로마자가 더 그림처럼 보여서다. 아무튼 그런 분위기에 의식적으로 반발한 측면이 있다. 글자를 글자답게 보여주고,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혹은 아름답진 못해도 최소한 흥미로운 작업을 하려고 했다. 이제는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 같지만.

여러 언어권을 경험했고, 그 언어들을 타이포그래피로 작업하는 한국인 디자이너다. 한글을 디자인의 재료로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오히려 외국 디자이너에게 물어보면 더 좋은 답이 나올 거라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민족주의자가 아닌 다음에야 어떤 의미 부여를 하기는 힘들다. 다만 이런 건 있다. 타이포그래피는 결국 의사소통의 도구다. 디자인에서도 한글을 적극적으로 쓰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한다. 위대해서가 아니라 더 편리한 소통의 도구니까.

출판사인 스펙터 프레스를 운영하고 있으며 책은 이번 타이포 잔치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다. 책 디자인에 있어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 혹은 피해야 한다고 여기는 원칙이 있나?
활동을 하는 동안 너그러워져서 이젠 뭐든 가능하다고 믿게 됐다. 오히려 이런 생각을 종종 한다. 모든 디자이너들은 규칙과 숫자로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나에게도 그건 미덕이자 즐거움이지만 너무 심각해지면 안 될 것 같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피해야 할 내용이라면… 규칙적인 엄격성이나 지나친 의미 부여 같은, 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낭만적인 투영은 경계해야 한다. 이 역시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이다. 자꾸 거룩한 가치를 갖다 대는 건 건강하지 않다.

현재 슬기와민으로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어떤 게 있나?
나는 여기서 빨리 손을 떼야 한다. 지금 슬기와민은 붕괴 위기다(웃음). 내가 여기 매달려 있어서 슬기씨가 내 몫까지 떠맡고 있다. 몇 가지 흥미롭게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는데, 그중 체코 브르노 비엔날레에서 디자인 교육을 주제로 책을 만들어달라고 한 제안이 있다. 저술, 편집, 디자인까지 통째로 맡아야 한다. 그걸 재미있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