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유쾌한 반란을 꿈꾸는 꼬리칸부터 절대자 5인방이 모인 엔진칸까지, 2013 F/W 시즌을 질주하는 패션 열차에 탑승한 걸 환영합니다.

1. 100-Z : 꼬리칸
패션 열차의 꼬리칸에선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른다. 패션 열차의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앞칸(하이엔드 브랜드)의 은근한 멸시와 핍박을 견뎌야 했던 꼬리칸(스트리트 룩)의 반란이 시작된 것. 그 중심엔 기발한 유머와 조롱이 뒤섞인 패러디 군단이 자리한다. 패러디 패션의 시초인 SSUR을 시작으로 최근 중심 축으로 부상한 브라이언 리히텐버그(Brian Lichtenberg), 리즌 클로딩(Reason Clothing), LPD(Le Plus Dores)C.O.I NYC, Mala New York 등이 반란군의 핵심 멤버들. 과거엔 앞칸 브랜드들을 선망, 진짜인 척하느라 되려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뻔뻔스럽게도(?) ‘짝퉁’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앞칸을 풍자하고 ‘디스’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 이 유쾌한 반란군들의 주무기는 이렇다. SSUR은 Commes Des Fuck Down(Comme des Garcons), 브라이언 리히텐버그는 Feline(Celine), Homies(Hermes), 리즌 클로딩은 Ain’t Laurent without Yves(Saint Laurent Paris), Celine Dion(Celine Paris), C.O.I NYC는 Tom Lord(Tom Ford), Benzo(Kenzo) 등 앞칸을 차지한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들의 로고를 유머러스하게 비틀거나 LPD는 리카르도 티시, 알렉산더 왕, 레이 가와쿠보 등 앞칸에 포진한 유명인사들의 이름을 숫자 티셔츠에 접목, 이들의 유명세를 역이용한다. 이렇게 꼬리칸에서 촉발된 패러디 패션의 반란은 ‘저작권 침해’라는 공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앞칸으로 거침없이 진격 중이다.

2. 021-S : 교실
패션 열차의 미래를 견인할 우등반의 반장 4인방. 이들은 요즘 난다 긴다 하는 선배들을 제치고 패션 열차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먼저 이미 일찌감치 패션 열차의 슈퍼 스타로 떠오른 알렉산더 왕. 입학 당시엔 스트리트 룩 과목에 유독 두각을 나타냈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하이엔드 패션에 욕심을 내기 시작, 어린 나이에 발렌시아가의 반장으로 뽑히는 기염을 토했다. 알렉산더 왕과 마찬가지로 예쁘장한 외모와 실력을 겸비한 J.W 앤더슨은 최근 대선배 도나텔라 베르사체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베르사체 베르수스 협업 컬렉션을 발표하는 등 패션 열차의 총아로 떠오른 인물. 또 2010년 패션 열차에 처음으로 오른 파우스토 푸글리시는 2년 만에 웅가로의 반장으로 선출, 21세기의 지아니 베르사체로 불리는 중이다. 그런가 하면 수줍고 여린 인상의 제랄도 다 콘세이카오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반장이 된 경우. 이브생로랑, 루이 비통, 미우미우 등의 우등반을 거친 만학도로 얼마 전 소니아 리키엘에 성공적으로 입성했다.

3. 028-C : 사교 클럽
멋쟁이 숙녀와 신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탐색전을 벌이는 이곳은 패션 열차의 핫 플레이스다. 하얀 어깨를 훤히 드러낸 금빛 드레스 차림의 미스 프라다가 클럽에 들어서자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를 저격한다. 은빛 찬연한 자수 장식의 수트를 입은 미스터 드리스 반 노튼과 19세기 영미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 귀족적인 옷차림의 미스터 랄프 로렌이 그들. 클럽 한쪽에선 곰방대를 물고 벨벳 코트를 걸친 신사와 새빨간 시스 드레스에 주렁주렁 주얼리로 치장한 디스퀘어드 듀오가 다정히 귀엣말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도도하게 수질 검사에 한창인 미스 디올과 낭창낭창한 허리를 잔뜩 강조한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랑방 레이디 역시 여성미가 철철 넘치는 사교 클럽의 퀸카들!

4. 006-H : 객실
팔자가 늘어진 귀부인이 무기한 투숙 중인 패션 열차의 객실. 1년 365일 농염한 파자마 룩을 고수하는 그녀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패션 취향을 패션 열차 사람들에게 전도했지만 그동안 반응이 영 시원찮았던 것이 사실. 그런데 최근 엔진칸의 절대자 마크 제이콥스를 비롯해 로샤, 니나리치, 소니아 리키엘 등이 제안한 농염하고 세련된 파자마 룩이 일상을 파고들기 시작하면서 패션 열차 곳곳에 잠옷 바람이 불고 있다.

5. 084-P : 은둔의 방
한때 패션 열차의 앞칸에서 더없이 화려한 시절을 보낸 이들이 모여 있는 은둔의 방. 2년 반 전, 끔찍한 망언과 마약으로 앞칸에서 퇴출, 은둔의 방으로 숨어든 존 갈리아노는 슬슬 이곳에서 나오려는 기미가 엿보인다. 오스카 드 라 렌타의 컬렉션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지인의 결혼식과 TV 방송, 잡지 등에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낸 것. 15년 만에 발렌시아가에서 나와, 이곳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니콜라스 게스키에르 역시 머지않아 샤넬, 루이 비통 등이 자리한 앞칸으로 돌아갈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하지만 전 직장에서 그가 브랜드 이미지를 실추시킨 발언을 함으로써 계약을 위반했다는 소송을 제기한 바람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다. 반대로 마약과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을 거쳐 이 칸에 들어온 크리스토프 데카르넹은 마치 패션 열차에서 증발한 것처럼 숨 죽인 채 성찰의 시간을 보내는 중.

6. 097-F : 공장
열차의 전 탑승원들에게 빛과 소금과도 같은 에너지 생산이 이루어지는 곳. 패션 열차가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는 건 쉴 새 없이 새로운 가방을 생산하는 이 공장 칸 덕분이다. 한때는 잇백 열풍으로 몇몇 상표의 가방만이 열차의 에너지원으로 인기를 끌었으나, 최근엔 가격대와 종류가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 추세. 다만, 디자인은 궁극의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제품이 가장 큰 생산량을 차지한다.

7. 056-C : 영화관
패션 열차 일원들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문화 충전소. 패션을 주인공으로 삼아 저마다의 방식으로 연출한 패션 필름을 연중무휴로 상영한다. 현재 절찬리 상영 중인 작품은 총 5편. 심지어 전편을 무료로 즐길 수 있다.
1관 펜디의 <Invito Pericoloso(Dangerous Invitation)>
모델 카라 델레바인과 사스키아 드 브로우, 라거펠트의 오랜 뮤즈인 아만다 할레치 주연, 라거펠트 감독. 아름답지만 어딘지 음침한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서스펜스 스릴러물이다. 9월 12일 개봉, 러닝타임 7분.
2관 예거 르쿨트르의 <Reinvent Yourself – The Film>
감독 파비엔느 버쇼드가 메가폰을 잡은 이 필름은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가는 여성의 삶을 환상적인 영상미로 표현했다. 주인공인 다이앤 크루거의 우아한 기품이 잔영으로 남는 작품. 러닝타임 2분 7초.
3관 생로랑의 <Saint Laurent Dance Part 1>
에디 슬리먼이 생로랑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패션 필름. 흑백의 세련된 영상미가 압권이다. 클래식 발레리나 슈즈를 신은 주인공이 밴드 ‘체리 글레이져’의 멤버 클레멘타인 크리비가 작곡한 노래를 배경으로 춤을 추는 모습이 담겨 있다. 러닝타임 2분 50초.
4관 프라다의 <Real Fantasies>
키치한 아트워크가 돋보이는 연작, <Real Fantasies>의 최신 작품. 프라다의 2013 F/W 레이디라이크 룩을 입은 모델들과 아트워크의 엉뚱한 조화가 초현실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러닝타임 2분 7초.
5관 미우미우의 <Le Donne Della Vucciria>
미우미우의 필름 프로젝트 ‘MiuMiu Women’s Tale’의 여섯 번째 작품. 이탈리아 팔레르모에서 촬영한 이 영화에는 마리오네트 인형이 2013 F/W 프라다 컬렉션과 똑같은 옷을 입자 춤을 추는 일상의 여인으로 변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러닝타임 7분 5초.

8. 001-E : 엔진칸
모두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패션 열차의 심장부. 열차의 움직이는 파워 5인방이 자리한 맨 앞칸이다. 매 시즌 열차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이들은 패션계의 윌포드라 할 수 있을 것. 존재 자체가 하나의 아이콘이자 현상이 된 패션계의 임금님 칼 라거펠트를 비롯하여 지구에서 가장 세련된 여자이자 패션 열차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피비 파일로, 말 그대로 브랜드의 모든 걸 다 바꿔버린 패션 개척자 에디 슬리먼, 푸근한 옆집 아줌마 같은 인상으로 혁신과 전통의 균형을 꾀하는 미우치아 프라다, 대체 불가능한 매력과 재능을 지닌 패션계의 슈퍼스타, 마크 제이콥스 등 이들의 컬렉션은 열차 전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매 시즌의 유행을 창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