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하나. 런웨이 위는 물론이고 디자이너의 피날레, 패션쇼장 앞,갈라 파티 등 패션계 최전선, 가장 화려한 이벤트에 수시로 등장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낯설고 먼 트렌드는? 답은, 파자마 룩! 여기, 각기 다른 이유로 이 까다로운 트렌드를 애정하게 된 패션 피플 5인이 “파자마 룩,저도 참 좋아하는데요~!”로 시작하는 생생한 경험담을 풀어놓았다.

기모노와 김나영
고백하건대, 패션계에서 일하고, 먹고, 자고, 노는 나에게도 파자마 룩이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이번 시즌 여럿 선보인 남자의 잠옷을 그대로 입은 듯한 파자마 룩은 쇼적으로는 훌륭하지만, 실제 나 자신에게 적용하면 그 옷들에 붙어 있을 엄청난 가격을 지불할 생각이 전혀 들지 않으니까. 하지만 얼마 전, 리얼웨이에 어울릴 훌륭한 파자마 룩 샘플을 발견했다. 청담동 거리 한복판에서! 배기한 실루엣, 빈티지한 워싱의 데님에 흰색 톱, 거기에빌딩이 프린트된 기모노 스타일의 가운(푸시버튼 2012 F/W 제품!)을 걸치고 양끝이 살짝 올라간 선글라스를 쓴 그녀는 고개가 절로 돌아갈 정도로 예뻤다. 누군가 했더니, 바로 요즘 최고로 잘나가는 패셔니스타 김나영이 아닌가. 나 또한 예전에 파티 플래너 지미기에게서 그녀의 시그너처 룩이던 기모노 가운을 대거 구입한 적이 있었다. 영화 <식스데이 세븐나잇> 속 앤 헤이시가 편안한 코튼 팬츠에 기모노 가운을 걸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 멋스러움에 무릎을 치며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반드시 저 스타일링을 재현하리라 다짐하면서.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난히도 ‘왜색’에 민감한 국민 정서상 그 꿈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 가운들은 무릎이 뻥 뚫린 청바지, 티셔츠, 그리고 워커 부츠와 함께 요즘 나의 일상복으로 활약하는 중이다. -한혜연(스타일리스트)

늦은 휴양지의 추억
내게 파자마 룩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 느긋함과 여유로움 때문이다. ‘난 남의 시선 때문에 스스로를 볶아대는 스타일이 아니야. 내가 이 여유를 즐기는 데 불만 있니?’라고 말하는 듯한 쿨한 애티튜드와 자신감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파자마 룩은 여행이나 휴양지와 인연이 깊다. 가장 아끼는 파자마 셔츠와 살롱은 발리에서 구입한 것이고 (강렬한 붉은색에 알 수 없는 식물 프린트가 그려진 것이 루이 비통 쇼 피날레에서 마크 제이콥스가 입은 파자마와 꼭 닮았다!), 멋쟁이 친구에게서 어깨가 으쓱할 극찬을 받은 파자마 룩 또한 그녀와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였다. 당시 나는 작은 단추가 수십 개 달린 롱 슬립 드레스에 루스한 재킷과 웨스턴 부츠를 신고 있었다. 친구도 말했지만, 이 룩이 아름다운 이유는 ‘잠옷 같기 때문’이다. 펑퍼짐한 파자마든 캐미솔이든 슬립 드레스든, 침실에서 입는 옷이라는 게 일단 묘하게 섹시하지 않나? 휴양지의 어스름한 저녁, 로맨틱한 일탈을 연상시키는 멋. 수고스럽게 꾸미지 않고 대충 입은 듯한 모습에서 오는 그 시크한 섹시함을 그 누가 마다할까. 지금은 누구나 입는 배기팬츠 또한 처음에 봤을 때는 ‘저걸 옷이라고!’ 하고 통탄했던 걸 회상하면서,이번 시즌에는 길거리에서도 파자마 트렌드가 그야말로 빵 터지기를 기대해본다. 파자마 룩의 열렬한 예찬론자로서! -심연수(홍보대행사 브랜드폴리시 대표)

시선의 괴리
패션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패션계와는 전혀 동떨어진 세계의 인물들-가령 부모님이나 시댁 식구, 중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접촉도 빈번한, 두 세계 가운데 어디쯤에 자리한 ‘중간자’로서, 두 세계의 간극을 뼈저리게 경험하는 일은 하루가 멀다 하고 되풀이된다. 그중 가장 큰 논란과 혼돈, 불화를 불러일으키는 ‘문제적’룩이 바로 파자마 룩이다. 내 기억 속에 가장 화려하고 떠들썩하게 데뷔한 2009 S/S 시즌의 돌체&가바나 쇼의 파자마 룩을 시작으로 구겨진 브라톱과 밴딩 스커트, 앞섶을 풀어헤친 가운을 매치한 같은 시즌의 프라다 런웨이, 지난 시즌의 나른한 드리스 반 노튼 컬렉션부터 이번 시즌 로샤스와 마크 제이콥스에서 선보인 전형적인 파자마 룩과 루이 비통 런웨이의 란제리 퍼레이드. 그뿐인가. 해외 컬렉션 쇼장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파자마 룩을 입은 패션 피플을 만나고, 해외 셀렙들의 레드 카펫 파자마 룩까지 두루 접하면서 나의 눈은 점점 이 룩에 적응해갔다. 2012년초 H&M과 마르니의 협업으로 선보인 파자마 세트를 보자마자 낚아채고, 톱숍 매장에서 잔잔한 페이즐리 프린트의 청색 파자마를 보는 순간 나는 ‘할렐루야’를 외쳤다! 그 이후에도 브랜드 샘플 세일과 SPA 브랜드에서 보는 족족 사들인 이 파자마 세트들은 따로 또 같이, 때로는 하이힐, 때로는 청키한 부츠와, 그리고 거의 항상 아무렇게나 구겨 쥔 클러치와 함께 나의 일상복으로 꽤 괜찮은 평판을 얻으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싯적 친구를 나의 집에서 만나 함께 집을 나서려던 중 나는 머리가 쭈뼛 서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절로 나는, 한여름의 괴담만큼이나 두려운 말을 듣고야 말았다. “옷 입어야지!” 오 마이 갓, 너의 눈에 내가 걸친 이 옷은 대체 뭘로 보인단 말이니? -이지은(W Korea패션 에디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기억을 되돌려보면 나의 첫 파자마 룩 도전은 자각하지도 못한 채 이루어졌다. 나는 현재 함께 ‘under and over’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나의 패션 멘토 승건 오빠(푸시버튼 디자이너)에게서 옷 입는 법을 배웠고, 아직도 그의 제안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편이다. 내가 가진 장점이라면 그 어떤 옷에도 선입견이나 거부감이 없다는 것 정도? 덕분에 그가 태국 여행에서 돌아와 선물한 잔잔한 검은색 프린트의 박시한 노란색 반소매 셔츠와 같은 소재의 긴 바지를 입고 거리에 당당히 나설 수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로 호의적이었는데, 파자마 룩이었지만 진한 색상 때문에(연한 핑크나 베이지색이었다면?) 잠옷처럼 보이지 않았고, 그 옷을 입을 때 항상 매치했던 멋스러운 릭 오웬스의 검정 웨지힐 샌들이 룩에 힘을 더했고, 마지막으로 나의 금발 쇼트커트 헤어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지 않았을까, 하고 나름대로 해석해본다(이 헤어스타일이라면 진짜 잠옷을 입고 나간다 해도 그저 평범한 잠옷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이 금발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고 복고적인 마틸다풍 보브 단발로 변신했다. 그와 함께 나의 룩에도 변화가 올 것임을 감지하고 있다(헤어스타일의 힘이란!). 톰 브라운의 남자 재킷을 하나 구입했는데 이 헤어스타일에 아주 썩 잘 어울린다. 이번 시즌에는 이 재킷이나 빅 코트 안에 빈티지 슬립 드레스를 입으면 어떨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은(!) 루이 비통 쇼의 여인들처럼 말이다. -김나영(방송인)

힘 빼고 힘 주고
2006년, 파리 유학 초년생 시절, 처음 접하는 맛있는 디저트의 세계에 빠져 살이 통통하게 올랐을 때 루스한 실크 잠옷 스타일의 옷은 내게 유일한 돌파구였다. 당시 쟈딕&볼테르와 이로(이 브랜드가 지금의 로킹한 룩으로 변신하기 전) 등에서 구입한 베이비돌 드레스와 파자마 셔츠, 실크 쇼츠 등은 팔다리에 비해 유난히 나온 아랫배를 커버하는 데 제격이었으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오랜 파자마 룩 사랑이 제대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건 정작 불 같은 다이어트에 성공한 이후였다. 하늘거리는 실크 옷감이 바람에 날려 보디라인이 살짝 드러나면, 스스로도 그게 그렇게 섹시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슬립 드레스, 파자마 팬츠, 파자마 셔츠… 임신과 함께 또다시 극적인 체형의 변화를 맞고 있는 지금까지 내 옷장에서 가장 큰 범위를 차지하고 있는 옷은 바로 각종 파자마 룩이다. 이 룩의 열렬한 추종자로서 철칙이있다면, 메이크업을 진하게 하거나 머리를 정갈하게 빗어 넘기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 반면, 볼드한 목걸이, 클러치, 그리고 미끈한 하이힐 등 ‘드레스업’을 위한 높은 퀄리티의 액세서리는 필수다. 내 소중한 파자마 룩이 잠옷 바람 취급을 받을 순 없으니까! -이길배(W Korea파리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