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주지 못해 미안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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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팬이 없으면 스타가 아니라지만, 그걸 지켜보는 진짜 팬의 마음은 아리기만 하다. 칸예 웨스트,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다카시, 왕가위.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오해에 시달리는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진짜 팬들이 나섰다.

칸예 웨스트는 마케팅 덕을 본, 스캔들 제조기일 뿐이다?

당황스럽다. 설마 지금, 50센트와 동시에 앨범을 발매하며 판매량 승부에 관한 이슈로 〈롤링스톤〉지 표지를 장식한 일, 앰버 로즈와 숱한 화제를 뿌리며 사귀다가 헤어지더니 노래에서 그녀에 대해 언급한 일, 레이 제이와의 비디오 유출로 더욱 유명해진 킴 카다시안과 사귀며 ‘희대의 대인배 혹은 최고의 호구’ 의혹을 낳다가 결국 결혼까지 해버리고 아이까지 낳은 일, MTV 어워드에서 테일러 스위프트의 수상 무대에 올라가 ‘사실 이 상은 비욘세가 받았어야 해’라고 외쳤다가 나중에 사과한 일, 허리케인 카트리나 구호 모금 콘서트 현장에서 ‘부시는 우리 흑인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아’라고 발언한 일 등등만으로 칸예 웨스트를 평가하는 것인가? 앗, 미리 생각해놓지도 않고 즉석에서 썼는데 벌써 이만큼이나 술술 나오다니, 이게 아닌데. 아무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한국에서 칸예 웨스트를 데뷔 시절부터 실시간으로 지켜봐온 사람’ 3위 안에 든다 (솔직히 1위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딘가에 나 같은 사람이 두 명 정도는 더 있을 것 같아 여지를 둔다). 그의 시작으로 돌아가자. 21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칸예는 힙합의 판도를 바꾸었다. 무명이나 다름없던 그는 제이지의 2001년 작 <The Blueprint> 에 핵심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떠올랐다. 주로 고전 솔에 기반을 두면서, 기존의 힙합 샘플링 방식과는 달리 원곡의 보컬 부분을 오히려 적극 활용하는 그의 역발상은 신선함과 설득력을 동시에 거머쥐며 주류 힙합 사운드의 새로운 흐름을 열었다. 정말로, 한동안 모두가 그의 풍성하고 따스한 사운드를 따라 했다. 뒤이어 랩도 선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프로듀싱을 하면서 취미로 랩을 하는 정도로만 알았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에게는 솔로 뮤지션으로서의 야망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작법상으로는 샘플링과 실제 연주를 적절히 배합해 힙합 사운드의 확장을 실현하고, 정서적으로는 힙합 특유의 마초이즘과 공격성에서 탈피한 여러 지점을 보여준 그의 솔로 앨범들은 평단과 대중의 고른 지지를 얻었다. 특히 2010년에 발표한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는 집단 프로듀싱, 집단 피처링 체제에 기반을 둔 극대화된 맥시멀리즘으로 만장일치의 극찬을 받았다. <롤링스톤>, <피치포크> 등 유력 매체들이 일제히 만점을 부여했다. 칸예의 존재감이 음악에만 갇히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는 기능적인 프로듀서나 래퍼로 남기보다는 아티스트를 꿈꾸었으며, 음악에 국한되기보다는 다방면의 예술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의류 브랜드를 가지고 있고, A.P.C.를 비롯해 몇몇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했으며, 나이키의 ‘에어 이지’는 그의 시그너처 슈즈다. 앨범 아트워크에도 의미를 담기 위해, 무라카미 다카시, 커즈(Kaws), 조지 콘도, 그리고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와 작업하기도 했다.물론 호불호나 평가의 수위가 갈릴 순 있다. 하지만 칸예 웨스트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힙합 뮤지션이자 복합 아티스트이며 문화 아이콘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새 앨범 <Yeezus>에서도, 자신을 음악의 메시아로 포장하며 파격적이고 기괴(?)한 사운드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 위에 미디어, 자본주의, 인종주의 등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린다. 얼핏 보면, 공CD로 착각할 만한 앨범 아트워크는 덤이다. ‘마케팅 덕을 본, 스캔들 제조기’라고 하기엔 그가 시도하고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 김봉현(음악평론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에세이보다 별로다?

2005년 8월의 보스턴, 지하철 그린 라인을 타고 미술관에 가는 중이었다. 내 앞에는 가무잡잡한 피부에 머리를 위로 올린 여자가 앉아 페이퍼백을 읽고 있었다. 붙임성 없는 성격인 주제에, 말을 걸었다. “정말 괜찮은 책이지요.” 그녀가 책에서 눈을 들었다. “그래요? 이 책 읽었나요? 난 아직 조금밖에 읽지 않아서.” 아주 잠깐 몇 마디 나누고, 우리는 지하철의 우연한 승객이 그러하듯이 곧 헤어졌다. 보스턴의 낯선 사람들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한 책은 <상실의 시대(원제 : 노르웨이의 숲)>였다. 20세기 말,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 문화적 부절(符節)의 힘이라고 분석한 비평을 본 적 있다. 먼 길 떠나는 연인이 정표로 물건의 반쪽을 쪼개 준다.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음악, 책, 브랜드들이 공통의 경험을 만들면서 사람들을 묶어준다. <상실의 시대>를 읽은 이라면 나가사와 선배가 한 말을 기억하리라.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 하루키 소설은 그 자체의 의미보다 이 물질적이고도 문화적인 속물의 세계를 통과하는 패스포트처럼 여겨지는 시절이 있었다. 가지고 있을 때는 취향을 시전하는 물건이지만, 유행 지나면 약간 빛바랜 느낌을 주는 시즌 백처럼 사라질 거라고. 하지만 8년 전 여름의 토요일, 이국의 지하철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쉽게 낡아버리는 작가가 아님을 실감했다. 이후 를 통해 보편적 작가로서 건재함을 증명하기도 했다. 한 작가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널리 소비되고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의미를 지닌다. 얼마 전 출간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하 <다자키 쓰쿠루>)>는 맨 처음 좋아한 하루키표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다자키 쓰쿠루>는 과거에 버림받은 상처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지만, 다른 소설들이 그러했듯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물색 모르는 애들이라면 모를까 자기 세계를 악착같이 지켜야 하는 어른이라면 입에 담기 어려운, 공룡 화석 같은 말, “사랑해”가 아무 수식어 없이 쓰인 소설. <상실의 시대>의 마지막에서 와타나베가 전화를 들고도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다자키는 아직 남은 젊음과 오랜 상처를 넘은 성숙으로 말한다. 한 작가의 담백한 일상을 그린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일정한 외로움을 안고도 겉으로는 무사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그린 소설에는 거부감을 보이기도 한다. 상처받지 않는 듯한 사람이 예사의 기대를 벗어나는 모험을 하는 소설에서 과장을 본 사람도 있다.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구속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 청년처럼 보이는 것이 하루키 스타일이지만, 소설에는 ‘진정성’을 질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자기 스타일을 30년 넘게 지킬 수 있다면 그건 삶의 태도가 아닌가? 하루키를 좋아한다면 어떤 인간으로 쉽게 파악될 것처럼 말한다. 하루키의 팬이라고 하기를 꺼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를 둘러싼 여러 말들을 무심히 넘기고 자기 삶의 태도를 꿋꿋이 지켰으며 반복되는 삶에 스민 환상과 세계의 본모습을 본 작가다. 그리하여 세상의 반대편에서 하루키 소설을 읽는 사람을 만난다. 도서관에서, 지하철에서, 공원에서, 해변에서. 친구가 아니라도 그의 소설을 읽는다. – 박현주(번역가, 칼럼니스트)

무라카미 다카시는 대중에 영합하는 기업가다?

얼마 전,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린 개인전을 위해 무라카미 다카시가 내한했다.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그는 심각한 고민을 떠안은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내내 고개를 파묻거나,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하지만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이를 드러내며 과장되게 웃는, 우리가 익히 봐온 모습을 연출했다. 마치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온 희극 배우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수백 가지의 현란한 색채와 귀여운 캐릭터로 뒤덮인, 그의 해맑아 보이는 작품을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 기분이 든다. 그는 초기 작품부터 두 차례의 원폭 투하로 ‘평평’해진 일본과, 그 불안정한 땅에서 탄생한 기이한 문화 현상을 주제로 삼아왔다. 스시 장인처럼 어떻게 하면 심각한 내용을 서구 관객이 먹기 좋게 담아낼 수 있을지 연구했다. 미키마우스와 도라에몽을 닮은, 그의 분신과도 같은 캐릭터 DOB는 시간이 흐를수록 원폭 후유증으로 탄생한 괴물처럼 진화했고, 세상 만물을 집어 삼키거나 토하고 있다. 해골, 해파리 눈, 버섯, 꽃, 카이카이 키키, 나한 등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들은 모두 죽음과 재난, 소외, 환각, 성적 콤플렉스 등 일본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또한 ‘슈퍼플랫(Superflat)’의 이론가이자 전시 기획자로서, 서구 미술계에서 입지를 다지는 발판을 마련했다. 일본 현대미술을 해석하는 새로운 프레임으로 전통 일본화와 현대 애니메이션의 2차원적 특징을 연결 지은 ‘슈퍼플랫’을 제시해 ‘워홀의 팝, 제프 쿤스의 네오팝을 잇는 미술 운동의 새로운 개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작품의 내용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에서도 무라카미 다카시는 남다른 전략을 발휘했다. ‘일본의 앤디 워홀’로 불리는 기업가형 예술가로서, 자신의 작품 제작은 물론 판매와 유통, 부가 사업까지를 총체적으로 관리한다. 무라카미 다카시가 1996년 설립한 ‘히로폰 팩토리(Hiropon Factory)’는 앤디 워홀의 1960년대 스튜디오 ‘팩토리’에 영감을 받은 곳으로, 그의 작품이 생산되는 말 그대로 ‘공장’이었다. 이후 2001년 카이카이 키키(KaiKai Kiki Co., Ltd.)를 설립하면서 회사 운영 전반을 개편했다. 이 회사의 목표는 ‘미래를 말하는 미술 만들기’. 무라카미의 작품 생산을 비롯해 판촉, 신진작가 프로모션, 갤러리 운영과 미술 프로젝트 기획, 미술 상품 개발과 판매 등 다방면에 걸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예술가는 비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사업체가 제대로 작동하겠는가?”라며 고개를 저으면서도, 일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하루에 2~3시간씩 쪽잠을 자면서까지, 전력투구하듯 힘들게 사업체를 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6년에 쓴 ‘예술을 업(業)으로 일으키는 이론’이라는 의미의 저서 <예술기업론>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에는 그가 국제 미술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색한 방법과 그 의미를 소개하고 있는데, 자신은 서양의 작가와 겨루기 위해 서양 미술의 구조를 집요하게 연구했고, 여러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예술 매니지먼트의 기술까지 연마했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 내에서 자국의 문화를 해외에 팔아먹는 장사꾼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의 모든 활동은 결국 일본 미술계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기 위한 각고의 노력으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2007년 LA MOCA에서 무라카미 다카시의 대형 회고전이 열렸다. 전시 제목은 <ⓒ MURAKAMI>. 전시 제목의 카피라잇 표기처럼, 그는 일본 작가로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개발하고 스스로를 브랜딩하기 위해 애써왔으며,결국 성공한 작가다. 그의 초기 작품 중 일본의 모형회사 타미야의 광고를 차용한 ‛다카시: 세계 최고의 품질’이라는 문구처럼 말이다. – 김재석(<아트인컬처> 기자)

왕가위는 이미 유효기간이 다한 90년대의 유물이다?

왕가위도 이제 어쩔 수 없는 걸까? <일대종사>의 시작과 함께 ‘王家衛’가 아니라, 왕가위의 중국식 간체자 표현인 ‘王家’라는 자막이 뜬다.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이제 중소 규모 영화가 아니고서는 중국 대륙 자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홍콩 영화의 현실이 그 역시 비켜가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비정전>과 <중경삼림>에 비친 청춘의 그림자, 그리고 <화양연화>의 매혹적 세계가 그저 90년대 영화광들의 회고로만 남은 채 끝나버린 걸까. 그래, 돌이켜보니 장국영은 장궈룽, 주윤발은 저우룬파인 세상이 됐다. 미처 실감하지 못했다 뿐이지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변해 있었다. <일대종사>의 첫 장면인 결투신은 그런 확신을 더욱 부추겼다. 엽문(양조위)이 빗속에서 수십 명의 악당과 싸우는 모습은 마치 무술감독 원화평이 오래전 할리우드로 건너가 만든 <매트릭스>를 재탕하는 기분마저 들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공의 인물 궁이 아가씨(장쯔이)가 등장하면서, 왕가위 영화 특유의 ‘무드’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특히 등불과 수많은 기녀들을 배경으로 한 채 두 사람이 마치 바로크풍 회화의 주인공처럼 자리한 장면, 금루의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거의 춤을 추듯 합을 겨루는 모습은 단연 압권이었다. 그러니까 <일대종사>가 앞서 만들어진 견자단의 <엽문> 시리즈와 가장 다른 부분은 바로 멜로 드라마라는 사실이다. ‘맞아,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왕가위의 영화가 바로 이거였지’라는 생각에, 다시 오래전의 그 ‘감촉’이 살아났다. 그로부터 얼마 뒤, 방한한 왕가위를 인터뷰하며 그 대결 장면에 대해 물었다. <해피투게더>에서 보영(장국영)과 아휘(양조위)의 탱고 장면처럼 연출하고 싶었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땐, (거짓말 조금 보태) 살짝 눈물이 났다. 마치 오우삼의 영화에서 그의 상징과도 같은 흰 비둘기를 발견했을 때처럼, 오직 왕가위의 영화에서만 조우할 수 있는 그런 장면들이 마냥 반가웠다고나 할까. 과거 왕가위의 영화에서 “우리가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면 우리의 인연도 달라졌을까?”라고 질문하던 양조위가 이제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인생에 후회가 없다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라고 읊조리는 모습에서는 (역시 또 거짓말을 조금 보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렇게 왕가위는 여전히 왕가위였다. 돌이켜보면 왕가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중경삼림> 속에서 캘리포니아 바에 홀로 앉아 있는 양조위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재빨리 스쳐 지나간다. 오직 실연의 상처로 고독을 곱씹고 있는 양조위만이 느릿느릿 남겨져 있었다. 크리스토퍼 촬영감독 특유의 스텝 프린트 기법으로, 그렇게 왕가위의 인물들은 세상과는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아갔다. <일대종사>에서 양조위가 연기한 엽문도 마찬가지다. 무려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도장의 한구석에 엽문이 마치 <중경삼림>의 그처럼 고독하게 앉아 있고 주변 인물들은 재빨리 휙휙 지나간다. 각 무술 문파에서 한 시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스승을 지칭하는 일대종사(一代宗師)의 고독이 그렇게 드러난다. 따지고 보면 왕가위야말로 홍콩 영화계의 마지막 남은 일대종사 감독이 아닐까. 불산에서 태어났으나 평생 홍콩에 머물며 간판 하나 내걸지 않고 영춘권을 전파하며 살았던 엽문처럼, 중국 자본과의 교류 속에서 ‘홍콩 영화’는 이제 멸종 위기에 처했지만 왕가위는 언제나 묵묵히 자기만의 영화를 만들 것이다. – 주성철(<씨네21> 기자)

에디터
피처 에디터 / 김슬기
기타
일러스트레이터|이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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