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보다 더 치열하고 지긋지긋한 애증을 주고받는 인간관계가 있을까? 윤제문과 박해일, 그리고 공효진이 영화 <고령화 가족>을 통해 맺은 껄끄러운 혈연을 더블유의 카메라 앞에서 재현했다. 어색한 눈빛을 교환하자마자 삼남매는 각자의 공간으로 재빨리 흩어졌다.

공효진이 입은빨간 드레스는 Carolina Herrera,슈즈는 Jean-Michel Cazabat 제품,윤제문이 입은 밝은 회색의트렌치코트는 Corneliani,흰색 셔츠와 회색 팬츠는모두 H&M 제품.박해일이 입은 흰색 수트와흰 티셔츠는 모두 KimseoryongHomme 제품.

공효진이 입은
빨간 드레스는 Carolina Herrera,
슈즈는 Jean-Michel Cazabat 제품,
윤제문이 입은 밝은 회색의
트렌치코트는 Corneliani,
흰색 셔츠와 회색 팬츠는
모두 H&M 제품.
박해일이 입은 흰색 수트와
흰 티셔츠는 모두 Kimseoryong
Homme 제품.

 

검정 재킷과 검정 팬츠는 Prada,흰색 스니커즈는 Wesc 제품,미키마우스가 그려진티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검정 재킷과 검정 팬츠는 Prada,
흰색 스니커즈는 Wesc 제품,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티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박 해 일

“뭘 감추는 게 아니라 안에 뭐가 없어요. 저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정리가 잘 안 되더라고요. 나답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대충 짐작만 할 뿐이죠.”

“부모님이 제게서 큰 희망은 못 보셨던 것 같아요. 나쁜 짓 안 하고 건강 잃지 않는 것, 그 이상의 기대는 하지 않으셨던 기억이 나요.” 데뷔 전에는 어떤 아들이었냐고 묻자, 박해일이 당황스러울 만큼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렇다면 <고령화 가족>에서 그가 맡은 캐릭터와는 정반대의 인생 그래프를 그려온 셈이다. 어린 시절 집안의 자랑이었던 인모는 안타깝게도 가족의 기대를 제대로 꺾어가며 딱하고 곤란한 중년으로 시들어간다. 데뷔작의 처참한 실패 이후 영화 감독으로서의 경력은 사망선고를 받은 상태다. 이혼은 이미 최악을 맞았다고 생각한 그를 한 번 더 주저앉힌다. “한마디로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이죠. 하지만 관객들이 보기 괴로운 캐릭터로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서 최대한 힘을 뺀 채 그리려고 했습니다.” 천명관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고령화 가족>은 한국의 출산 장려 정책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법한 작품이다. 각자의 인생에서 바닥을 친 삼남매가 노모의 집에 찾아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는 줄거리는 모든 부모들의 악몽일 테니까. 하지만 암담한 설정에도 극 분위기는 오히려 코미디에 가깝다. 원작의 묘사도 무거운 편은 아니었으나 영화는 그보다 훨씬 떠들썩하고 유쾌한 난장을 벌인 눈치다. “결과적으로 더 대중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박해일의 설명이다. “연기하면서 딱히 코미디를 의도하진 않았어요. 다만 역할에 몰입해서 즐겁게 촬영하다 보니 현장의 좋았던 분위기가 영화에 자연스럽게 담긴 것 같아요.” <고령화 가족>은 고단한 삶에 묻어 있는 어지러운 얼룩들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살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이면 크고 거룩한 깨달음보다는 사소하지만 통렬한 공감이 가슴 한켠에 남게 될 것이다. 박해일은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했다고 밝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라는 사람은 그리 거창하지가 않거든요. 큰 서사보다는 작고 흔한 일상이 더 흥미롭게 느껴져요.” 요즘 들어서는 부쩍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에 이끌린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는 주도면밀하게 앞으로의 행보를 계획하는 배우가 아니다. 자격증을 수집하듯 스릴러부터 코미디까지 다양한 장르를 순례하는 일도 관심 밖이다. 그때그때 마음이 가는 작업을 솔직하게 선택하는 게 박해일이 필모그래피를 쌓는 방식이다. “그런데 하고 싶은 것부터 차근차근 하다 보면 결국에는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게 되더라고요. 애초부터 계획적이거나 계산적이지는 못한 사람인데 꼭 그래야 할 필요도 못 느끼겠어요.” 머리보다는 감정으로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만큼 자신의 역할과 헤어지는 과정도 간단하지는 않다. 후유증 자체가 길지는 않고 뭐든 워낙 잘 잊는 성격이긴 하지만 촬영을 마친 뒤 어느 순간에 문득 힘든 시기가 닥치곤 한다. “스스로 가눌 수 없는 때가 한 번은 오더라고요.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털게 돼요. 하지만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어요. 캐릭터의 잔재들이 끈질긴 지방처럼 제 몸속 어딘가에 쌓이고 남는 기분이에요.” <고령화 가족>의 인모에 대해서는 이미 한 번의 ‘앓이’를 겪은 다음,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슬러가고 있다고 했다. 영화 속에서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입체적인 역할을 주로 맡았기 때문일까? 컷 사인이 떨어지면 바로 과묵해지는 성격 탓일지도 모르겠다. 직접 만나기 전, 박해일이 다소 불투명한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이 지나칠 정도로 투명하다고 말한다. “뭘 감추는 게 아니라 안에 뭐가 없어요. 저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정리가 안 되더라고요. 나답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대충 짐작만 할 뿐이죠.”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이 박해일을 그토록 흥미롭게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이 배우는 익숙한 정답이 아니라 처음 접하는 질문에 가깝다.

검정 보디수트, 나무로짠 드레스, 귀고리는모두 Dolce & Gabbana,검정 슈즈는Jean-Michel Cazabat 제품.

검정 보디수트, 나무로
짠 드레스, 귀고리는
모두 Dolce & Gabbana,
검정 슈즈는
Jean-Michel Cazabat 제품.

 

공 효 진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찾게 된다는 건 나이 드는 일의 장점 아닐까 싶어요. 덕분에 뭔가를 그르치는 경우가 적어졌어요. 직접 경험을 쌓으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새기면서 인생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어요.”

공효진은 또래 여배우들이 좀처럼 가지 않는 길을 거리낌 없이 걸어왔다. <고령화 가족>에서 그가 연기한 미연도 대부분이 선뜻 택할 만한 캐릭터는 아니다. 두 번째 이혼 도장을 찍고 중학생 딸과 함께 불쑥 친정을 찾는 이 서른다섯 살의 여자는 영화 내내 입에 욕을 달고 지낸다. <파스타>나 <최고의 사랑> 같은 로맨틱 코미디가 만들어준 이미지에 배우가 앞장서서 흠집을 내는 셈이다. “순하고 예쁜 역할을 할 때는 제 안의 날선 부분을 억눌러야 해요. 그런 데서 약간의 답답함을 느꼈나 봐요. 미연이로 지내는 동안 통쾌하고 시원했어요. 이번 작품은 세상 사람들에게 다 들리고도 남을 만큼 큰 소리로 욕을 해보고 싶어서 선택했어요.”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후련해지는 씩씩한 대답이다. 사춘기의 자식을 둔 역할이라는 점 역시 그에게는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엄마’가 된 건 2007년의 TV 드라마 <고맙습니다> 이후 6년 만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날 아줌마로 생각하면 어쩌지?’ 이런 걱정은 없었어요. 오히려 내가 애 엄마로 보일 수 있을지가 더 고민이었죠. 보는 사람이 납득을 못하면 작품에도 도움이 안 될 테니까. 그런데 막상 부딪쳤더니 또 어색하지 않게 역할에 녹아들더라고요.” 사실 미연은 사람들이 익숙하게 떠올릴 수 있는 엄마가 아니다. 가정 교육 같은 건 철 지난 유행 정도로 여기며 딸아이의 성적보다는 자신 몫의 인생과 사랑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엄마들도 간혹 있더라고요. 마음 한구석에서는 부러운 마음도 있어요. 자식을 분신처럼 곁에 두는 대신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친구로서 대하는 거예요. 스스로를 찾으면서 사는 삶은 제 꿈이기도 하거든요. 생각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공효진은 미연이 “가족 중 가장 여우처럼 세상을 잘 사는 여자”라고 설명했다. 그는 입이 뱃사람처럼 걸어서가 아니라 욕망을 솔직하게 좇으면서도 망설이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점에서 이 독특한 캐릭터와 배우는 서로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더블유와의 촬영 하루 전날 공효진은 서른네 번째 생일을 맞았다. “(기분이) 왔다 갔다 해요. ‘와, 내가 벌써?’ 하다가 ‘아니 잠깐, 그게 뭐 대수야?’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나이 먹는 걸 크게 두려워하는 편은 아니에요.” 서른 즈음에 만났을 때 그는 20대 시절에 비해 많은 것이 정리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후로도 자신의 서랍을 함부로 어지르지 않고 차곡차곡 생각을 채워가며 지내온 듯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찾게 된다는 건 나이 드는 일의 장점 아닐까 싶어요. 엄마나 할머니는 무슨 일을 겪든지 잘 안 놀라시잖아요? 비슷한 거죠. 그르치는 일이 적어졌어요. 직접 경험을 쌓으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새기면서 인생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어요.” 최근에는 자연과 가깝게 지내는 일에 부쩍 관심이 커졌다. 도예 수업을 받으며 꾸준히 흙을 만지고, 교외에 작은 쉼터를 마련해볼까 생각도 해본다고 했다. “작품 사이사이마다 쉬는 시간이 긴 직업이잖아요. 그 기간을 잘 쓸 방법을 찾는 거죠.” 그런데 그는 오히려 쉴 때보다 일을 할 때 자극적인 에너지를 얻는 것 같았다.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저는 새로운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게 재미있어요. 이번 작품은 특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촬영했거든요. 가족 전체가 붙는 신이 많았는데 사방에서 연달아 스파크가 튀더라고요.” 주연배우라면 개봉 직전의 출연작에 대해 좋은 말만 보태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공효진의 이야기에는 기대를 확실히 부추기는 구석이 있었다. “찍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보다 더 골 때리는 영화가 될 것 같은데?”

흰 셔츠와 회색 수트는 H&M,화려한 무늬의 실크 가운은 Push Button,슈즈는 Prada 제품,체인 목걸이와 반지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흰 셔츠와 회색 수트는 H&M,
화려한 무늬의 실크 가운은 Push Button,
슈즈는 Prada 제품,
체인 목걸이와 반지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윤 제 문

“인물의 말투든 감정이든 다른 배우들과 부딪쳐가면서 만들어야 해요. 그렇지 않고 미리 정해둔 내 생각만 고집하면 당연히 전체의 흐름이 깨지죠. 전 촬영장에는 늘 마음과 머리를 비운 채로 갑니다.”

윤제문이라는 배우를 읽는 방법에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거다. 그리고 인터뷰가 그 가운데 최선의 선택은 아닌 듯했다. “매번 비슷한 질문을 받고 또 비슷한 대답을 하게 되니까 좀 힘들죠.” 대화의 시작부터 솔직하게 무뚝뚝한 문장이 툭 던져진다. 워낙 과묵한 성격인 탓에 자신을 말로 드러내고 설명하는 일이 편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인터뷰를 할 때면 그렇지 않아도 없던 말수가 더 줄어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워졌다. “뭐 그렇죠, 허허허.” 그가 웃음으로 말끝을 얼버무린다. <고령화 가족>에서 윤제문은 첫째 아들 한모로 등장한다. 폭력배 출신의 전과자로 가진 거라곤 힘밖에 없는 마흔네 살의 백수다. “제가 하면 재미있겠구나 싶더라고요.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캐릭터는 드세고 난폭해 보이는 겉모습 아래 무른 면들을 감추고 있다. 의외로 순진한데다가 알고 보면 가족에 대한 마음도 애틋하다. 오빠에게 욕설과 구타를 일삼는 여동생을 연기한 공효진은 한모에게서 실제 윤제문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간 맡았던 악역들과 선이 굵은 외모 때문에 대중에게는 강한 인상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은 인간적이고 다감한 선배라는 것이다. <전설의 주먹>을 촬영하는 동안 그의 기에 눌려 눈치를 슬금슬금 살폈다던 유준상의 이야기는 TV 토크쇼를 위해 과장한 농담이라고 봐야 한다. “방송이니까 준상이 형이 분위기를 재미있게 띄우려고 한 거죠. 제가 얼굴도 크고 나이도 들어 보이는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거부감을 줄 정도는 아니잖아요?” 연기자로서의 첫발은 20대 중반에 연극 무대에서 뗐다. 데뷔 무렵에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만이 앞섰다고 한다. 하지만 무대에 오르는 횟수가 늘면서 점점 연기의 맛을 깨우치게 됐다. “관객과 하나가 된 기분으로 극에 몰입하는 순간이 있거든요. 그 희열은 정말 기가 막힌 거예요.” <청춘예찬>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작품이다. 배우 윤제문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이 무대를 통해 박해일과도 처음 호흡을 맞췄다. 연극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고령화 가족>을 통해 또 한 번 가족으로 재회했으니 공교롭다면 공교로운 인연인 셈이다. 그런 이유에서도 박해일은 크랭크인 전부터 이번 작업에 대한 기대가 컸다고 말했다. 윤제문의 경우는 어땠을까? “좋았어요. 촬영하면서 많이 웃었고.” 역시 지나칠 만큼 담백한 응수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좋은 배우들이 한데 모여 기운을 나눈 <고령화 가족>은 그에게도 짜릿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 연기자는 현장이 주는 생생한 자극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물의 말투든 감정이든 다른 배우들과 부딪쳐가면서 만들어야 해요. 그렇지 않고 미리 정해둔 내 생각만 고집하면 당연히 전체의 흐름이 깨지죠. 전 촬영장에는 늘 마음과 머리를 비운 채로 갑니다.” TV 드라마 <세계의 끝> 촬영과 개봉을 앞둔 영화 두 편의 홍보 활동을 병행 중이던 그는 몸이 몇 개쯤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바빴다. <뿌리 깊은 나무> 이후 지금까지 거의 시간차 없이 작업을 이어왔다고 윤제문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재충전을 위해 몇 개월씩 쉰다? 그런 건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별로 쉬고 싶지 않거든요.” 배우로서의 삶에 그만큼 만족하고 있다는 뜻일까? 문득, 그가 배우라는 직업을 택하길 잘했다고 새삼스럽게 생각하는 순간은 언제인지 궁금해졌다. “그럴 때 많죠. 아니, 많다기보다는 있죠. 사람들이 제 연기에 반응을 보일 때요. 기뻐하거나 웃거나 화를 내거나 혹은 슬퍼할 때.” 짧지만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