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겨울밤 술 집에 들어서니 노랫말이 절로 음악이 되어 나온다. ‘마시자 한 잔의 추억, 마시자 한 잔의 술, 마시자 마셔버리자’.

서촌 일일
단번에 찾아가지를 못하고 주변에서 빙빙 돌았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집 2층에, 간판도 크게 달아놓지를 않았다. 아마 이렇게 맛있는 술들을 숨겨 놓으려고 그랬던 걸까?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싱글 몰트위스키인 오반 14Y는 고향인 바다를 닮아 짭조름한 향과 맛이 나고, 역시 스코틀랜드의 아일레이 지방에서 태어난 라프로익 쿼터캐스크와 아드벡 10Y에서는 묘한 피트 향이 풍긴다. 오이 대신 직접 설탕에 재운 자몽을 넣은 핸드릭스 진은 라벤더, 장미, 자몽의 향이 아름답고, 알코올 향을 살려 만드는 뱅쇼는 바텐더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하다. “프랑스 친구들이 할머니가 만드는 뱅쇼보다 맛있대요. 아마 세계에서 가장 맛있을걸요?” 여기에 실험 영화를 만드는 ‘사장 누나’는 예술적인 실험 영화 상영회를 열어볼까 고심 중이고, 역시나 사장 누나와 친한 뮤지션들이 모여들어 아방가르드 재즈 잼을 펼치기도 한단다. 그러니까 이렇게 좋은 술과 영화와 음악이 모여 있는 이곳에 봄이 되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창문 밖 풍경까지 합세할 테니, 좋은 의미에서 이거 정말 큰일난 것 같다.

리믹스랩
리믹스랩의 한쪽 벽은 보드카로 담근 알록달록한 술들로 가득했다. “재료에 따라 숙성시켜야 하는 시간이 다 달라요. 레몬은 오래 두면 쓰니까 2~3개월이면 충분하지만, 매실은 1년이 걸려요. 장기 프로젝트죠. ” 그렇게 매일매일 공들여 맛을 체크하다가 맛이 딱 좋은 어느 날, 토닉 워터를 곁들여 즐기면 입안이 향긋하고 목구멍이 알싸해진다. 리믹스랩을 열기 전엔 전통주를 개발하던 두 친구는 시간의 대부분을 이 술에 저걸 넣어 마시고, 저 술에 이걸 넣어 마시며 보낸다. 우리가 런던프라이드 생맥주에 꿀을 넣어 달콤하게 한 잔, 톡 쏘는 라거에 유자를 넣어 또 한 잔, 맥주에 직접 내린 에스프레소를 넣어서 또 한 잔 마시며 보내는 유쾌한 시간은, 아마 두 사장님이 취해 있는 시간에 비례할 것이다.

라일리스 탭하우스
라일리스 탭하우스엔 스무 개의 수도꼭지가 있다. 경리단길의 수제 맥주집 ‘맥 파이’에서 만든 페일 에일과 포터, 톡 쏘면서도 향긋한 미국의 에일인 인디카 IPA, 달콤한 바닐라 향이 입안을 감싸는 독일의 바이엔슈테판 헤페바이젠 등 작은 양조장에서 정성 들여 만든 수제 맥주의 생맥주가 줄줄 흘러나오는 탭 (Tap)이다. 바를 책임지는 트로이는 1월 중순이 되면 자신이 직접 양조한 블랙 IPA가 그 탭 중 하나를 차지할 거라고 말한다. “지난주에 만들었는데 숙성이 되는 데 시간이 필요해요. 아마 한국에서 처음으로 직접 양조한 블랙 IPA가 될 거예요.” 트로이의 형이자 라일리스 탭하우스의 사장님인 제이미는 마치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바 뒤에 위치한 창고로 끌고 가기도 한다. “여기가 맥주를 저장하는 케그를 냉장 보관하는 곳이에요. 호스 깨끗한 거 보이죠? 이것만 봐도 맥주 맛을 알 수 있을 거예요. ” 제이미의 뿌듯한 음성을 뒤로하고 창고를 빠져 나오는데, 어린아이가 뛰어다니다가 넘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제이미의 아들 라일리였다.

방범포차
유치장에 서글픈 노래가 흐른다. 조하문의 ‘꿈에’,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 이러니 술 한 잔이 간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봉평 메밀 막걸리, 봉하 쌀막걸리, 금정산성 막걸리와 같은 맛 좋은 막걸리에 고급 증류 소주인 화요도 냉장고에 들어 있지만, 어쩐지 참이슬과 카스에 자꾸 손이 간다. 각각 광고, 영화 미술, 사진, 요리를 하며 살던 세 청년은 경리단길 골목 어귀에 유치장을 닮은 실내 포장마차를 차려놓고는, 자신들이 전국 여행을 다니며 맛있게 먹은 음식을 안주 삼아 술판을 벌였다. 강릉에서 올라온 도루묵 구이, 포항 사는 어머니가 오늘 올려 보내준 과메기, 묵은지와 어리굴젓을 얹은 두부까지 식탁으로 배달되니, 술판은 이 밤이 다 가도록 끝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