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미스터 사카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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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원래 만국 공통의 언어라고 하지만, 류이치 사카모토는 특별히 유연하게 국경을 넘나들며 소통해온 음악가다. 그리고 지금 전 지구적인 이슈에 대해 깊이 근심하고 음악을 통해 발언한다. 일본의 지진, 그 이후에 불거진 핵 에너지의 위험성. 여전히 음악으로세계를 변혁해나가는 예순 살 아티스트를 뉴욕에서 만났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아마도, 경계를 건넌다는 크로스오버의 정의에 가장 근접한 뮤지션일 것이다. ‘레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등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음악은 하나의 장르로 포섭되지 않는다. 이 코즈모폴리턴 음악가는 실제 생활 또한 도쿄와 베를린,뉴욕을 넘나들며, 많은 감독과 함께 영화 음악 작업을 하고 숱한 뮤지션들과 공동 작업을 해온 행보 역시 전방위로 분주했다. 무엇보다 세계를 향한 그의 사회적 감수성 또한 여러 방향으로 촉수를 뻗는다. 북극의 환경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발언해온 이 행동가는 최근 일본 대지진 이후 핵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갖고 있다. 그의 밴드 YMO(옐로 매직 오케스트라)가 주도하여 7월 7일과 8일 개최된 핵 반대 음악 축제인 <No Nukes 2012 페스티벌>은 이를 집약적으로 보여준 행보다. 사카모토는 독일 일렉트로닉 밴드 크라프트베르크를 직접 섭외했으며, 무대에서는 빨간 머플러를 두른 차림으로 피아노를 치면서 한손으로는 원전 반대 깃발을 직접 흔들었고, 라디오헤드가 좀처럼 ‘Creep’을 연주하지 않듯 듣기 힘든 레퍼토리인 초기 히트곡 ‘ Rydeen’을 풀 밴드 버전으로 웅장하게 연주했다. 동일본 대지진 발생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추모한 이 행사는, 서울에서 있었던 사카모토의 콘서트와 마찬가지로 유스트림 생중계를 통해 전 세계에서 시청할 수 있었다.

올해 예순이 된 이 아티스트는 이렇게 여전히, 음악으로 세계를 변혁해나가는 중이다. 지난 2011년 1월 공연에 이어 서울에서는 올해 12월 9일 사카모토의 내한 공연이 확정되었다. 연말 이 아티스트를 콘서트홀에서 다시 만나기 전, 더블유는 뉴욕에서 사카모토와 인터뷰를 가졌다. 웨스트빌리지에 위치한 그의 스튜디오는 매우 아담했지만 벽에 걸린 사진들과 많은 음반, 그리고 피아노와 컴퓨터, 악기 등이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어 친근한 분위기였다. 처음에는 좀 수줍어하는 듯했던 그는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잦은 미소를 보여주었으며, 무엇보다 한국 팬들을 자주 언급하며 특별한 애정을 표했다. “언젠가 도쿄에서 스튜디오로 향할 때였어요. 약속 시간에 늦은데다 악보를 완성해야 했는데 작업을 하지 못한 상태였죠. 바쁜 마음에 택시를 잡아 탔는데 그 택시 안에서 악상이 마치 요술처럼 떠올랐어요. 정중하게 택시 기사에게 일부러 좀 길을 돌아가달라고 부탁하고 택시 안에서 그 곡을 완성했던 일이 있어요.” 당신이 뉴욕이나 도쿄에서 일부러 길을 도는 택시를 목격하게 된다면 유리창 안을 눈여겨 볼 것. 곡을 쓰기 위해 시간을 버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2011년 1월 서울 공연 이후 어떻게 지내왔는지 근황이 궁금하다.
서울 공연일이 작년 1월 9일이었는데 3월 11일 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나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 변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많은 일본인들이 여전히 큰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며, 핵 개발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이 오가는 상황이다. 워낙 큰 사건을 겪고 보니 그 이전에 있었던 한국에서의 공연이 마치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진다. 올해 말 한국에서 공연할 예정인데 개인적으로 매우 기대하고 있다. 사실 기회만 된다면 매년 한국을 찾고 싶은 마음이 있다. 어쨌거나 지진, 화산 폭발, 허리케인 등 자연 재해는 물론 유로 경제도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고, 여러 가지로 모두에게 힘든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지진 이후 일본의 많은 예술가들이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담은 작품을 내놓고 있다. 당신 역시 인생이나 예술, 인간을 대하는 관점이 달라졌나?
물론이다. 도쿄, 서울, 혹은 뉴욕에서 우리는 매우 인공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바쁜 일상에 쫓기다 보니 자연에 감사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환경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거의 없어 보인다. 기껏해야 아주 가끔 밤하늘의 별과 달을 바라보면 다행이랄까. 이처럼 바쁜 우리의 일상에 쓰나미가 찾아왔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그 안에 함께 살고 있다는 이 엄청난 명제를 잊고 지낸 우리에게 일깨워준 것이다.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지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예술의 역할이라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를 더 많은 사람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에까지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점차 굳어졌다. 우리 조상들로부터 전승된 신화와 음악의 역할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북극해의 빙하 위에서 녹음을 하고, 온난화 현상으로 파괴되는 북극 지역에 대해 지속적으로 발언해왔다. 이런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환경에 대해 행동하기 시작한 건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우연히 내 아이들이 지금의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이 세상의 모습이 어떨까 생각해봤다. 세상은 안전할까? 안전하게 먹을 만한 음식은 있을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다 90년대 후반이 되면서 내가 정말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그린란드를 방문했을 때의 기억은 어떠한가?
원래 방문 목적은 당시 이슈가 된 지구 온난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문제들의 심각성보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곳의 눈부신 자연 경관이었다. 그곳의 풍경이 예술적으로 나에게 엄청난 영감을 준 것이다. 물과 얼음, 흑과 백으로만 나누어진 세계였고, 수평선은 매우 고요하고 차분했다. 당시 기온은 영하 40도. 물론 기온이 낮아 추위를 느꼈지만 그보다 무언가 뼈가 시리도록 차가운 느낌이 나를 강타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나는 뭔가 모를 그리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마치 나의 영혼을 그곳에 두고 온 듯한,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이랄까. 한동안 그리움에 사무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프로그래밍된 연주를 들려주는 디스클라비어를 무대에 올리거나, 공연이나 레코딩을 웹으로 생중계한다. 레코딩이나 퍼포먼스에 있어 새로운 테크놀로지를적용하는 데 적극적인데, 기술이 음악에 날개를 달아준다고 생각하는가?
음악가나 작곡가에게 다 적용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원래 음악 하는 사람들이 기계를 좋아한다(웃음). 역사적으로 봤을 때 새로운 기술이 당대의 음악에 좀 더 다양한 색깔을 입혀줄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예를 들어 피아노가 처음 나온 시절, 베토벤을 비롯한 당시의 많은 음악가들에겐 피아노가 최첨단의 새로운 테크놀로지였다. 이 신기술을 통해 주옥같은 곡이 탄생했고 오늘날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가 만일 현재에 살았다면 아마 그들은 컴퓨터나 미디를 이용해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늘 새로운 소리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로 테크건 하이 테크건 상관이 없다. 60년대 아프리카에서 온 음악과 리듬이 매우 인기를 끈 시절이 있었다. 당시 유명 작곡가인 스티브 라이히가 이러한 사운드를 가지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낸 것을 보면 모든 음악가들이 얼마나 새로운 사운드를 갈망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사운드를 얻을 수 있다면 달나라까지도 찾아갈 의향이 있으니까(웃음).

평론가들은 음악에 카테고리를 나누고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당신의 이름 앞에 굳이 어떤 타이틀을 달아야 한다면 무엇으로 불리고 싶은가?
어려운 질문이다. 전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어릴 적부터 워낙 다양한 음악을 접했고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음악을 즐긴 편이다. 일본, 아시아 음악, 팝, 클래식, 아프리칸 등…. 장르에 의미를 두고 들은 건 아니다. 나도 아이튠즈 등을 통해 음악을 사기도 하는데 그곳에 나와있는 장르 구분에 혼동이 생기곤 한다. 예를 들어 내 음악만 해도 클래식, 월드음악, 아시안 등 나조차 알 수 없는 음악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음악에 있어 장르나 카테고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클래식 피아노로 음악 경력을 시작해, 거기에 음악적 뿌리를 두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클래식 음악 경력을 계속 이어가지 않은 이유가 있나?
유럽 문명의 영향을 받은 다른 문화권에서는 클래식을 부지런히 배우고 어린 나이에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이 무척 자연스러운 풍조가 된 지 오래다. 내 경우 어릴 적 음악을 함께 공부한 친구들이 고등학교에 가서는 대부분 음악을 그만두었다. 클래식 음악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연습량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분야고, 공부하는 환경이 지나치게 경쟁적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클래식 환경은 매우 좁은 편이고, 많은 것이 눈에 보이게 서열화되어 있다.

밴드 YMO(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시절 당신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이많다. 그 시절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어릴 적부터 난 어디에든 속하거나 구속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다른 친구들이 다들 과학자, 의사, 정치가가 되고 싶다는 답을 내놓았는데 난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웃음). 그 어린 나이에도 내가 커서 어디 회사에 들어간다거나, 누군가를 위해 일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YMO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딘가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한 밴드다. 언제나 나는 나 자신이 되고 싶었을 뿐 어디에 속하는 음악가가 되기 싫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밴드의 경험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음악 산업 전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배울 수 있었다. 영국이나 미국 등 다른 나라에 있는 음악적 파트너들을 만나는 계기를 마련해주어 나의 음악 영역을 넓힐 수도 있었다. 30여 년 전 밴드에 조인하게 된 것은 바로 리더인 하루오미 호소노의 제안 때문이었다. 난 무엇보다 그의 음악적인 아이디어, 넓은 시야를 가진 그의 안목이 마음에 들었
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밀리언셀러를 만들어 히트를 치는 것보다는 다른 10개국에서 10만 장 씩 팔아서 다양한 나라에 우리의 이름을 알리자는 것이었다. 일본이나 아시아 음악 시장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시야에서 벗어난 참신한 아이디어였다. 그렇게 5년간 밴드 생활을 하고 나서 밴드는 해체되었고 몇 년 뒤 나는 뉴욕으로 오게 되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난 여전히 그의 아이디어를 따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종종 있다(웃음).

류이치 사카모토에게피아노란 무엇인가 물었다."피아노와 함께 50년을 넘게살았다. 내 삶의 일부고,어쩌면 내 몸의 일부 같기도하다. 운동선수들이 몸을움직이지 않을 때도머릿속으로 동작을 그리듯이내 머리에서는 언제나피아노가 연주되고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피아노란 무엇인가 물었다.
“피아노와 함께 50년을 넘게
살았다. 내 삶의 일부고,
어쩌면 내 몸의 일부 같기도
하다. 운동선수들이 몸을
움직이지 않을 때도
머릿속으로 동작을 그리듯이
내 머리에서는 언제나
피아노가 연주되고 있다.”

오시마 나기사,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페드로 알모도바르, 올리버 스톤 등 세계적인 감독들의 영화음악 작업을 해왔다.
어릴 적부터 <벤허>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같은 할리우드 대작들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좋아했다. 나의 첫 영화 음악은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의 오시마 감독과의 작업이었다. 오시마 감독이 나중에 베르톨루치 감독에게 나를 소개해주었고, 이후 많은 감독과 작업을 했다. 난 혼자 조용히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내가 늘 함께 작업하는 엔지니어와 나, 이렇게 단둘이서 나란히 스튜디오에 앉아 모든 작업을 진행한다. 어찌 보면 참 고독한 작업이다. 하지만 영화는 팀워크의 작업이다. 동시에 어찌 보면 반민주적
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리더가 독재자 성향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영화감독들이 종종 화가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 그림에 소리와 음악을 입히는 역할을 하고, 이 전체를 하나로 완성시키는 것이 감독과 내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아주 비주얼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사운드로 풀어내는 것이 나의 임무다.

2012년 소나르 페스티벌에서 알바 노토와 함께 공연할 예정이다. 모렐렌바움부터 최근에 함께 앨범을 낸 크리스찬 페네스까지, 혼자 할 때는 기대할 수 없는 뭔가를 뮤지션들과의 협업으로 얻는다면 그건 어떤 경험인가?
신기하게도 좋은 연주자들을 만나 작업해보면 별다른 말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냥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는 게 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크리스찬 페네스(Christian Fennesz)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뮤지션인데 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우린 악수를 했고 보통 사람들이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첫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연주를 시작했다. 그 즉흥 연주는 1시간가량 계속되었는데, 연주를 마치고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나와 맞는 뮤지션이라는 것을. 어떤 테마나 방향 없이 흘러나온 음악의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 나에게 협연이라는 의미는 의외로 단순하다. 아무래도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간다. 예를 들어 내가 기타 연주에 재능이 없으니 기타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보면 관심이 간다. 늘 그런 재능이 가져다주는 놀라움이 나에겐 큰 기쁨이다. 아마 이런 기쁨에 대한 갈망 때문에 다양한 뮤지션과의 협연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재능이라는 것은 좋은 곡을 완벽하게 연주한다는 등의 기술적인 테크닉만 말하는 게 아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마일스 데이비스나 자코 페트리우스의 명곡을 완벽하게 재현해낸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테크닉이 아니다.

최근 당신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일단 음악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노이즈에 대한 관심인 것 같다. 노이즈에 대한 관심이 커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가부키와 가가쿠(일본 궁중음악)에 관심이 커져가고 있다. 이런 음악들은 천 년쯤 전에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들어온 전통 음악이다. 이런 역사를 보면 일본이 한국에 참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웃음).

세계의 수많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일하는데,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는?
올해로 뉴욕에 자리 잡은 지 22년이 되었다. 도쿄, 뉴욕, 파리, 런던, 베를린 등 많은 도시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작업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각 도시의 캐릭터와 의미는 점차 중요성을 잃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어쩌면 발달한 인터넷 때문일 수도 있고 워낙 글로벌한 세상이 되어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도시는 그 도시 자체보다는 그곳에 살고 있는 인물들로 대변된다. 70~80년대만 해도 뉴 뮤직이 런던에서 나왔으며 그런 음악에 열광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베를린에 작은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하고 있다. 뉴욕의 생활이 좋다. 도쿄나 서울에 비하면 아주 호흡이 느리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도시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패션이나 스타일에 관한 당신의 철학은?
하하. 생각보다 난 쇼핑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특히 숍에서 사이즈를 찾는 일은 최악이라고 생각한다(웃음). 블랙이나 그레이 계열을 좋아하고 심플하게 입으려고 한다. 하지만 나와 함께 일하는 매니저가 챙겨주는 대로 입으며 그녀의 제안에 거의 복종하는 편이다. 너무 스타일리시한 것은 별로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에디터
황선우
포토그래퍼
안웅철
기타
인터뷰 / 이치윤(컨트리뷰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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