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유 에디터들의 컬렉션 다이어리

W

뉴욕, 런던, 밀란, 파리 찍고 다시 서울! 4대 패션 도시에서 치러진 2012 S/S 패션위크를 끝내고 돌아온 더블유 에디터들의 컬렉션 다이어리. 사진과 글의 행간마다 그때 그 순간의 기억과 감흥이 빼곡히 담겨 있다.

NEWYORK [7th Sep. ~15th Sep.]

1. 한 인터뷰에서 카린 로이펠드는 최근 프레타포르테 쇼가 ‘의학 학회’를 방불케 할 만큼 지루해졌다고 털어놨다. 톰 브라운이 선사하는 한 편의 연극 같은 쇼를 봤더라면 생각이 달라졌을 텐데. 지난번엔 뉴욕 공립도서관을 그레고리 성가가 흐르는 경건한 수도원으로 둔갑시키더니 이번에는 재즈 음악이 흐르는 저택에서 열리는 20년대 플래퍼들의 샴페인 파티를 준비했다. 톰 브라운이 옷 잘입는 사람들의 신으로 군림하는 이유를 알 것 같지 않나?

2. “대체 호텔이 어디 있다는 거야?”라고 중얼거리면서 화보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이 세상의 온갖 훈남훈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곳을 몇 번이나 서성인 후에야 그곳이 호텔 입구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지난 2월 오픈한 소호의 몬드리안 호텔은 온통 하늘색 파스텔로 뒤덮여 있는 드라마틱한 곳이다. 호텔을 나서면 바로 앞에 질 샌더와 데렉 램 쇼윈도가 펼쳐지고, 골목을 돌면 오프닝 세러머니가 보인다. 이 호텔 입구에는 그 어떤 사인이나 간판도 없다. 크로스비 거리에서 멋쟁이들이 웅성대고 있는 곳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몬드리안 호텔 앞일 거다.

3. 오스카 드 라 렌타, 올리비에 데스켄스, 제이슨 우 등 뉴욕의 디자이너들이 주최한 성대한 가장무도회에 온 듯 풍성한 볼륨의 드레스들이 런웨이를 가득 메운 뉴욕 패션위크! 맑은 얼굴을 하고 빛나는 드레스를 입은 숙녀가 신사의 팔짱을 낀 채 우아하게 파티장 안으로 들어오듯, 아름답고 매혹적인 순간들. 열기구처럼 부풀린 이 화려한 크리놀린 드레스들을 입으면 무도회장 안의 숙녀들이 숨죽인 채 질투가 담긴 곁눈질로 슬금슬금 바라보며 수군댈 것이 분명하다!

4. 움베르토 레온과 캐롤 림이 겐조 하우스를 이끌어갈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지명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멀티숍 오프닝 세러머니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알 수 있다. 숍의 오너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럭셔리 레이블의 지휘봉을 휘두르는 시대라니 놀랍지 않은가.

5. 태풍 아이린의 여파로 쇼 날짜를 변경한 뉴욕 패션위크의 스완 송, 마크 제이콥스! 8시 30분을 가리키자 기다렸다는 듯 쇼는 바로 시작됐고 무대 중앙에 그림처럼 앉거나 서 있던 모델들이 걸어 나왔다. 반짝이는 은하계를 여행하듯 무대를 한 바퀴 돈 20년대 카우걸들은 모델들 사이에서 뛰어나온 마크의 피날레 인사를 끝으로 커튼이 닫히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니까 쇼가 시작되고 끝나기까지 마크 제이콥스는 모델들과 함께 무대에 앉아 있었던 것!

6. 프로엔자 스쿨러, 타쿤 같은 쿨한 젊은이들에게 주얼리를 만들어주었던 실력파 디자이너 다나 로렌츠가 이끄는 펜톤의 프레젠테이션 현장에서 발견한 궁극의 코스튬 주얼리. 록적인 무드의 스파이크 스터드, 반짝이는 크리스털, 장난감 같은 플라스틱, 볼드한 체인 등 요즘 여자들이 좋아하는 소재를 총집합시켜 만들었다.

7. “당신들은 미우미우 마니아들인가 봐요? ” 알투자라 쇼를 기다리던 미트 패킹의 한 카페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이 문득 말을 건넸다. 그녀는 바로 샬라 몬로크! 팝 매거진의 에디터였고, 패션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패션계의 흑진주다. 프라다 쇼가 끝나자마자 그 쇼에 오른 프라다 의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고 다음 쇼장에 등장할 정도로 미우치아 프라다의 강력한 신임을 얻고 있는, 프라다의 홍보대사.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라고 묻자 잠깐 빼놓았던 프라다 귀고리를 다시 착용하더니 “이제 됐어요!”라며 내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해주었다.

8. 테러 10주기를 맞은 뉴욕의 공기에는 불안감이 섞여 흘렀다. 그럼에도 뉴욕 패션위크는 계속됐다! 911 당일 열린 DKNY쇼에는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드러내는 추도문이 좌석마다 배치되어 있었고, DVF쇼가 끝난 후 다이앤 여사는 런웨이를 돌며 프런트 로에 자리한 몇몇의 관객들에게 미니 성조기를 나누어 주었다. 쇼장 안에서 타오른 미국인들의 애도 행렬과 단결심에 뭉클했던 순간.

9. ‘트렌드가 없는 것이 트렌드’라고 할 정도로 지금은 스타일 춘추전국시대다. 우리를 패션 환각 상태로 몰아넣은 발맹이나 셀리니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끈 피비 파일로의 귀환처럼 스파클이 터지는 강력한 ‘한방’으로 통일 천하를 이뤄줄 트렌드가 없는 것.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을 꼽자면? 뉴욕 디자이너 70% 이상이 선택한 디지털 프린트. 그렇다면 이번 시즌 프린트 스타일링 철학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프린트로 사수하라.’

10. 요즘 뉴욕 땅을 밟으면 제일 먼저 달려가야 할 곳이 바로 바니스 뉴욕이다. 지구의 패션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거물급 패션계 인사들이 총출동해 협업을 진행하는 트렌드의 발원지이자 고감도의 아이디어로 뒤덮인, 세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백화점이기 때문. 게다가 지금은 공간 전체가 패션계의 여사제, 카린 로이펠드의 감각으로 무장되어 있다. 매거진의 영역을 넘어, 파리에서 뉴욕으로 날아와 도시 전체를 그녀의 얼굴로 도배한 패션 영웅, 카린의 귀환은 뉴욕 패션위크 내내 휘황찬란하게 번쩍였다.

11. 9월의 별들은 패션쇼장의 맨 앞줄로 우르르 쏟아진다! 정오에 열린 로다테 쇼장은 고흐의 ‘별이 가득한 밤’보다 밝게 빛났다. 인형 같은 패닝 자매를 비롯해 비욘세&솔란지 자매, 테일러 스위프트가 별들의 잔치를 벌였고, 프로엔자 스쿨러 쇼장에는 알렉사 청과 패럴 윌리엄스가 자리했다. 요즘 안나 윈투어의 레이더에 포착되어 미국 <보그>의 화보에 등장하는 스타일리시한 클라란스 家의 딸들은 프라발 구룽의 앞자리를 꿰찼다.

12. 꿈에서라도 다시 먹고 싶은 뉴욕의 네 가지 음식. 폭신폭신하고 달콤한 Sarabeth의 프렌치 토스트, 머리가 딩딩거리도록 단맛이 특징인 Magnolia 컵케이크, 뉴욕에서 갖는 영국식 애프터눈 티타임. Tea & Sympathy의 로즈티와 부드러운 스콘, 클로에 세비니와 에단 호크도 반한 첼시 카페 Le grainne의 에그 토스트. 짭쪼름한 아스파라거스 또한 예술.

13. 라코스테에 새롭게 합류한 디자이너 펠리페와의 인터뷰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에 발견한 4백 8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설치물. 미트 패킹에 위치한 스탠더드 호텔 앞에 눈을 가린 채 턱하니 버티고 앉아 있는 미키 마우스 모양의 이 피규어는 팝 아티스트 KAWS의 작품으로 지금 세계를 여행하는 중이다. 홍콩의 하버 시티에서 뉴욕으로 날아왔고, 다음 여행지로 떠나는 10월까지 이 호텔에 머물 예정이라고! – 에디터 | 정진아

LONDON [16th Sep.~ 21st Sep.]

1. 컬렉션 기간에 맞춰 열리는 디자인 페스티벌을 보러 V&A 뮤지엄에 갔다. 로낭 &에르완 부홀렉 형제의 작품<텍스타일 필드>를 마주한 순간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섬유 브랜드인 코바드랏과 협업해 선보인 이 작품은 컬러 팔레트 원단을 뮤지엄 이 꽉 차도록 펼쳐놓은 작품. 게다가 작품 위를 자유롭게 올라가서 쉴 수 있도록 해놓았다. 언제 또 이 뮤지엄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이들의 추진력에 감탄하며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2. 런던에 갔으니 버버리 본사 방문은 빼놓을 수 없는 코스. 일정의 마지막 날, 본사에 들렀다. 하얀 벽면과 검은색 프레임으로 이루어진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인테리어에서 크리스토퍼 베일리의 깔끔한 취향이 전해졌다. 일층과 지하에는 버버리 프로섬, 런던, 헤리티지, 브릿, 액세서리에 이르는 모든 라인의 제품이 전시되어 있고, 실시간으로 주문하는 인터넷 이용자들을 위한 공간, 상담 테이블 등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엊그제 본 쇼피스들을 자세히 만져보고 입어보며 새로운 컬렉션을 만끽했다. 고소영이 쇼에 참석하며 입은 하이 웨이스트 스커트를 비롯한 H라인의 미디 스커트가 마음에 쏙 들었다.

3. 런던에 가면 빅토리아&알버트 뮤지엄(V&A)에 꼭 들른다. 영감과 감동을 주는 좋은 전시를 만나는 일은 황홀한 쇼를 감상하는 것만큼이나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전시를 본 뒤 들른 기프트 숍에서는 반가운 인물도 만났다. 아주 얌전한 페도라를 쓰고 동네 아저씨 차림으로 기념품을 구경하던 스테판 존스.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성큼 다가가 사진 촬영을 요청했더니 흔쾌히(그러고는 조금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포즈를 취했다. 팔짱을 끼며 같이 찍자고 했더니 더 수줍게 웃었다.

4. 런던의 부촌으로 꼽히는 첼시에 자리한 사치 갤러리에서 흥미로운 두 작품을 만났다. 먼저 재난과 사고의 현장, 파괴된 모습을 통해 역설적으로 예술을 표현하는 디르크 스크레버(Dirk Skreber)의 작품. 폐차 직전의 차처럼 구겨져버린 인간의 위대한 발명품, 차를 마주했는데 끔찍하게 느껴지기보다는 새로운 조형미가 멋지게 느껴졌다. 그런데 작품 중 하나의 차가 현대자동차의 ‘티뷰론’이었다. 또 하나는 형형색색의 화면으로 구성된 데이비드 배철러(David B atchelor)의 작품. 개인적으로 눈이 시리는 형광색을 좋아해서 그런지 어딘가 백남준의 작품을 떠오르게 하는 형광색 라이트 박스의 정렬이 보기만 해도 상큼했다.”

5. 반가운 얼굴, 모델 강소영이 런던 컬렉션에서 선전했다. 특히 그녀가 가장 아름다워 보인 쇼는 조너선 선더스. 자수가 놓인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그녀의 도도한 걸음은 빛이 났다. 산뜻한 파스텔 톤의 스커트들을 선보인 조너선 선더스의 컬렉션 역시 근사했다. 크리스찬 루부탱과 협업한 슈즈들 역시 너무나 아름다웠고.

6. 런던에서 지금 가장 핫한 멀티숍은 바로 이스트 런던에 위치한 LNCC(Late Night Chameleon Cafe)다. 방문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데도 입소문을 타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고. 발렌시아가, 질 샌더 등의 하이패션 브랜드와 일본 로컬 브랜드인 와코 마리아, 사스쿼치 같은 스트리트 브랜드를 자유분방하게 믹스 매치하는 그들의 셀렉 감각이 인기의 비결. 또 매달 주제를 바꿔 제안하는 책 코너와 빠질 수 없는 음반 섹션까지 젊고 신선한 감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주 매력적이었다.

7. 무대가 화려했던 쇼를 꼽으라면 단연 멀버리였다. 1800년대에 지어진 클라리지 호텔에서 열린 멀버리 컬렉션의 이번 시즌 주인공들은 우리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동물 친구들. 호텔 입구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많은 동물 풍선들이 귀여운 자태로 둥둥 떠 있었고 안으로 들어서니 어여쁜 애완견들이 멀버리의 옷을 입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 사랑스러운 강아지들을 보느라 컬렉션에 눈을 조금 덜 돌렸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

8. 쇼디치에는 작은 책방이 참 많다. 책방 한켠에는 무명 아티스트들이 만든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자전거 휠을 활용한 화살, 대걸레를 이용한 의자처럼 위트 있는 재활용 작품들이 웃음을 짓게 했다.

9. 이스트 런던, 그중에서도 쇼디치, 해크니, 달스톤 등의 지역을 칭하는 이스트 엔드가 요즘 가장 핫한 동네다. 가레스 퓨의 작업실이 있었고, 한국의 스티브 J & 요니 P가 유학 시절 살았던 곳으로 젊은 아티스트들이 많이 모여들면서 재미있는 클럽, 카페, 전시장 등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들어간 ‘재규어 슈즈’ 카페에서도 유쾌한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카페 벽면을 채운 카노브스키(Carnovsky)의 화려한 그림이 바로 그것. RGB 컬러로 프린트된 그림을 같은 색의 안경을 쓰고 보면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들이 도처에서 튀어나와 그것들을 전부 즐기느라 바빴다. – 에디터 | 김한슬

MILAN [21st Sep. ~26th Sep.]

1. 쇼가 끝나고 찾은 돌체&가바나의 쇼룸에서 나는 그만 주책없이 탄성을 쏟아냈다. 이번 컬렉션의 피날레에 우르르 등장한 보디수트가 한자리에 모인 행어는 금은보화를 잔뜩 품은 듯 눈부신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으니까. 한편으론 이 수천 수만 개에 달하는 컬러 스톤을 다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장인들의 노고를 생각하니 순간, 숙연해진 것도 사실이다.

2. “고 놈 참 예쁘네.” 빈티지 자동차 카툰 무늬의 코쿤 코트. 고지식한 도덕 선생님처럼 생겼지만 디자인 세계만큼은 위트가 넘치는 미우치아 프라다의 역작이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귀여운데 우아하다. 다중적 매력을 지닌 마성의 디자인.

3. 돌체 &가바나 쇼장에서 마주친 플래티넘 블론드의 미녀 포토그래퍼. 와우! 엘렌 폰 언워스였다. 관능미가 짙은 흑백 사진(1980년대부터 촬영한 게스 광고 캠페인이 대표적)을 찍는 그녀지만 순진한 얼굴로 돌체&가바나 듀오를 찍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인사라도 건네볼 걸 그랬나?

4. 나를 전율에 휩싸이게 하는 컬렉션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입을 수는 없어도 아름답고 완성도가 높은 컬렉션 혹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당장이라도 입어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컬렉션. 알레산드로 델라쿠아의 레이블 N.21은 후자에 속했다. 패션, 음식, 사람 할 것 없이 느끼한 밀란의 성향과는 반대로 N.21의 싱그럽고 웨어러블한 룩을 보고 나니 어쩐지 안구가 청순해지는 기분.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상사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 아무래도 내년 봄이 되면 뭐든 사야 직성이 풀릴 듯싶다.

5. 한쪽 머리카락을 화끈하게 민 헤어스타일로 유명한 영국의 스타일 아이콘이자 모델인 앨리스 대럴이 에르마노 설비노 쇼에 납셨다. 머리 모양과 피어싱 때문인지 살벌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기념 촬영 요청에도 생긋 웃으며 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저 표정은 좀… .

6. (그럴 리 만무하지만) 배와 등이 금방이라도 달라붙을 것 같은 공복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당장 흙이라도 파먹을 기세였지만 질 샌더 쇼룸을 둘러보는 동안만큼은 본능이 잠시 뒤로 물러났다. 그럴 만도 했다. 단 한 개의 먼지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순백의 드레스를 알현하는 순간, 이 34세의 노처녀는 저 드레스를 입은 채 아름다운 버진로드를 걷는 환상에 사로잡혀버렸으니까.

7. 우루사와 홍삼 생각이 절실했던 컬렉션의 마지막 날, 피로를 물리친 자양강장제는 디스퀘어드 컬렉션이었다. 젊음과 음악이 폭발하는 록 페스티벌을 런웨이로 옮겨놓은 이번 쇼는 이 무거운 노구를 들썩 이게 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지난 2년간 여러 가지 이유로 록 페스티벌에 불참(?)했던 터라 이번 디스퀘어드 컬렉션의 콘셉트가 더욱 반가웠을지도. 결국 이런 식으로도 한을 푼 건가?

8. 잠시 짬을 내 들른 밀라노의 디자인 미술관, 트리엔날레에서 진행된 <루이 비통: 패션의 기술> 전시. 1998 F/W 시즌부터 이번 2011 F/W 시즌까지 루이 비통의 의류, 가방, 액세서리를 새롭게 조합한 룩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이를테면 2000 F/W 시즌의 캐시미어 메시 점퍼에 2004 F/W 시즌 튈 드레스를 매치하고, 2001 S/S 시즌의 장갑과 2006 F/W 시즌 후드와 부츠를 더하는 식. 경이롭게도 이 13여 년에 걸친 아카이브들은 본디 하나인 듯 근사하게 어우러졌다. 당대의 스타일리스트이자 <러브> 편집장인 케이티 그랜드가 벌인 패션의 마술!

9. 쫓기듯이 쇼장과 쇼룸을 오가다 보면 잠시의 쉼이 절실해진다. 하지만 매 시즌 토즈의 프레젠테이션이 치러지는 여기에서만큼은 잠깐이지만 달콤한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오래전 대가 끊겨 지금은 국가에 귀속된 저택 ‘Villa Necchi’가 바로 그 쉼터. 특히 가을볕이 쏟아지는 이 수영장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영화 <아이엠러브>의 로케이션 장소.

10. 더블유의 통신원인 엄마 손을 꼭 잡고 생애 첫 컬렉션 나들이에 나선 리틀 패셔니스타! 일요일 오전 마르니 쇼장 앞에는 작정하고 꾸미고 온 멋쟁이들이 스타일 배틀을 벌였다. 하지만 깜찍한 꼬마 숙녀의 멋진 파이톤 룩과 살인미소 앞에선 전원 무장해제.

11. 아르마니 옹의 쇼가 끝나면 어김없이 치러지는 세리머니. 그러고 보니 모델들을 병풍처럼 뒤로한 채 기념 촬영에 열을 올리는 아르마니 할아버지의 모습은 흡사 삼천궁녀를 거느린 의자왕 같지 않나?

12. 백스테이지는 패션쇼에서 가장 흥미롭고 긴박한 공간이다. 기대하지 못했던 장면들이 여기저기에서 속출하니까. 길쭉길쭉한 톱모델들이 운집한 에트로 백스테이지 역시 그랬다. 특히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떠는 모델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사진 상으론 애리조나 뮤즈가 일진에게 둘러싸여 괴롭힘(?) 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나뿐인가?

13. 사실은 컬렉션 기간 동안 진정한 볼거리는 런웨이가 아닌 거리에서 펼쳐진다. 쇼장 앞에서 쉴 새 없이 마주치는 소위 패션 피플들을 보노라면 작은 머리, 긴 다리, 가는 몸은 모델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경쾌한 매니시 룩을 차려입은 이 바이크 걸도 그랬다. 그러다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보노라면…? “아, 어머니 어찌 저를 이렇게… ”

14. 스카프 프린트로 물든 초대장을 보고 짐작했듯 이번 D&G 쇼는 런웨이까지 스카프 패턴으로 장식했다. 만화경처럼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 이 런웨이는 명불허전이다. 두고두고 기억나리라.

15. 밀란 컬렉션에서 마주친 톱모델 이혜정과의 감격적인 상봉! 그녀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엠포리오 아르마니 리허설 장면을 보고 메시지를 보내 극적으로 이루어진 이 만남은 백스테이지 출입구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험상궂은 이탤리언 가드의 이해할 수 없는 훼방 때문에 철창을 사이에 두고 인사를 나누는 촌극을 빚었다. 이 사진을 본 누군가의 소감. “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

16. 부끄럽지만 가끔은 에디터가 아닌 한명의 여자로서 사심을 드러내는 순간이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프라다 쇼룸에서도 그랬다. 두부처럼 네모반듯한 모양의 큼지막한 클러치를 보는 순간 그만 나는 욕망의 이빨을 드러내고야 말았으니. 얼이 빠져서 인증샷을 남기는 내게 홍보담당자가 말을 보탰다. “내년 2월이면 살 수 있어요.” 말에 (속으로) 답했다.“네, 안 그래도 오늘부터 하루에 5천원씩 모으려고요.” – 에디터 | 송선민

PARIS [27th Sep.~5th Oct.]

1. 생토노레와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한 쿨한 프랑스 장갑 숍 ‘코스(Causse)’. 1892년 설립된 곳으로 클래식만 존재하는 여느 장갑 브랜드와는 달리 힙한 디자인을 만날 수 있다. 네온 컬러, 스터드 장식, 스트랩 장갑 등 또 다른 장갑의 세계가 펼쳐진다.

2. 장 폴 고티에는 옷을 잘 만들지만 훌륭한 쇼 메이커이기도 하기에 늘 기대되는 쇼 중 하나다. 그러나 이번 쇼는 조금 달랐다. 백스테이지를 무대에 세우고 장 폴 고티에가 옷매무새를 직접 만져주며 옷과 모델에 대한 설명을 하는 방식. 오른쪽 귀퉁이에서는 심지어 촬영도 진행했다. 그의 유머와 재치로 과대포장과 비용 없이도 성공적이었던 쇼.

3. 조용하고 아름답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드리스 반 노튼이 포토그래퍼 제임스 리브(James Reeve)와 협업을 시도했다. 건물 혹은 활주로의 불빛을 촬영한 작품의 제목은 ‘라이트스케이프(Lightscapes)ʼ. 한 편의 시 같은 그의 작업은 드리스 반 노튼의 드레스에 입혀졌는데 그들은 무척 닮아 있었다.

4. 휴식. 요지 야마모토의 쇼는 빡빡한 파리 컬렉션 일정 중 내게 휴식 같은 시간이 되어준다. 늘 새로운 것이 등장하진 않지만 한 우물을 파는 마스터가 보여줄 수 있는 내공과 힘이 내재되어 있다. 또한 그가 선정하는 아름다운 음악이란! 그 선율에 맞춰 유유히 움직이는 검정 드레스를 보면 눈물이 날 것 같다.

5. 루브르에서 열린 후세인 샬라얀의 전시. 잠시 난 짬을 이용해 들어선 전시장엔 ‘이주ʼ를 주제로 천재 디자이너 후세인 샬라얀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놀라운 작품들을 감상하기에 1시간은 너무 짧았다. 영화, 동영상, 사진, 의상, 드로잉까지 패션과 예술, 그리고 과학의 경계를 넘나든 그의 작품들은 아름다웠다. 오케스트라를 들이고 샴페인 안에 카메라를 설치한 그의 쇼 역시 패션이 선사하는 감동적인 ‘매직ʼ이었다.

6. 파리의 유일한 콘셉트 백화점인 봉마르셰에서는 늘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패션쇼 기간에는 더욱 그렇다. 마리 카트란주 등 힙한 런던 디자이너들을 소개하는 <소(So) 런던> 전과 윌리엄 왕자의 결혼을 서민적인, 흥미로운 시각으로 담은 <앵 마리야주 프랭시에(Un Mariage Princier)>전이 그것.

7. 마크 제이콥스가 디올과 협상 중이라는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루이 비통 쇼가 열렸다. 메리고라운드에 올라탄 인형 같은 모델들이 등장한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쇼. 자리를 안내해주는 프렌치 소녀들마저도 루이 비통과 꼭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데이롤에서 열린, 작가 빌리 아켈레어스가 가죽으로 만든 동물 전시 역시 루이 비통의 유머와 재치가 담뿍 담겼다.

8. 갈리아노 없는 갈리아노를 감상하는 일은 쓸쓸했다. 피날레에 그가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그는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우리는 갈리아노와 함께 꿈도 판타지도 잃었다. 마르지엘라 없는 마르지엘라, 매퀸 없는 매퀸… 아! 천재들의 빈자리.

9. 불어에는 ‘Impeccable’이라는 표현이 있다. ‘완벽한’이라는 뜻보다 더 완벽한, 그러니까 ‘흠잡을 데 없이 완전무결한’ 쯤으로 해석되겠다. 준야 와타나베의 트렌치코트를 본 순간 나는 이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어떤 현란하고 거대한 의상을 보는 것보다 정말 잘 재단된, ‘앵페카블’하게 만들어진 이 코트 한 벌을 보자 마음이 떨려왔다.

10. 언제나 고전과 미래를 넘나들며 흥미로운 제안을 하는 발렌시아가 쇼에 해프닝이 벌어졌다. 쇼가 시작하기 직전 나카타가 앉은 의자가 무너졌고, 다른 쪽에서도 의자가 내려앉은 것. 곧이어 쇼가 끝날 때까지 잠시만 서서 보아달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고 안나 윈투어를 포함한 패션 피플들은 너그러운 미소로 선 채 그의 작품을 감상했다. 그리고 그것은 기꺼이 서서 볼 수 있는 컬렉션이었다.

11. 콜레트를 보지 않으면 파리를 보지 않은 것이다. 콜레트 쇼윈도는 카린 로이펠드의 책 <Irrevereant(불경한)>으로 가득 채워졌다. 파리지엔 스타일을 재정립하고 환상과 동경을 낳은 이 시대의 전설, 로이펠드의 작업을 감상할 수 있는 이 두꺼운 책은 무려 230유로. 또 콜레트 안에는 사진가 테리 리처드슨의 불경한(?) 전시도 열리고 있었다.

12. 혹자는 쇼핑에 미친 여자라고 평하지만 안나 델로 루소는 이탈리아 여자들이 지닌 글래머러스함과 화려함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아이콘이다. 또한 그녀는 전설의 패션 에디터들이 지닌 극단적 스타일을 보여주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XXX쯤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겐 열정과 유머로 비춰진다.

13. 이네스 드 라 프레상주 역시 책을 냈다. 제목은 ‘파리지엔 시크’. 스타일 가이드 북이다. 단정하지만 감각적인 디자인과 내용이 그녀를 닮았다. 몸에 자연스럽게 밴 자연스러운 멋을 보여주는 이 책은 흔한 스타일 책 중 흔하지 않은 책이다. 불현듯 요란한 국내의 스타일 가이드 북들이 떠오르며 머리가 아파온다. – 에디터 | 김석원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정진아, 패션 에디터 / 김한슬, 컨트리뷰팅 에디터 / 송선민, 김석원
포토그래퍼
WWD/MONTROSE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