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와 함께 여행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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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말 아트선재센터 3층에 착륙한 은색 알루미늄 상자는 호사스러운 미확인 비행 물체처럼 보인다. 프랑스 건축가 디디에 피우자 포스티노가 설계를 맡은 데다, 무엇보다도 이건 에르메스니까. H박스라 불리는 이 아담한 트레일러의 정체는 일종의 이동식 상영관이다. 에르메스 재단은 지난 2006년부터 다양한 국적의 미술 작가들을 선정, 이들의 싱글 채널 비디오 제작을 지원해왔다. 완성된 작품들을 싣고 전 세계의 미술관을 순회해온 H박스는 5월 1일까지 서울에 머무를 예정이다. 이번 여정에는 참여 작가인 인도의 니킬 초프라가 히치하이커처럼 동행했다. <사람은 바위를 먹는다(Man Eats Rock)>는 20여 분의 러닝타임 안에 인간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시적이고도 철학적인 질문을 압축하는 영상이다. 초프라는 H박스의 탑승자들을 시공간을 가늠하기 힘든 풍경 속으로 이동시킨다.

[W Korea] 지금까지는 라이브 퍼포먼스에 집중해왔으며 기록용 외엔 별도의 영상을 제작하지 않았다. H박스에서 상영 중인 <사람은 바위를 먹는다>가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작업한 첫 번째 결과물인 셈이다. 작가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 같다.
니킬 초프라 말한 대로 기존 비디오는 내 작업의 단순 기록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카메라가 수동적인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필름/비디오 프로젝트의 경우 카메라가 켜져 있는 동안에만 사건이 이루어진다. 지금까지의 퍼포먼스는 지켜보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지만 <사람은 바위를 먹는다>에선 카메라가 관람객의 자리를 대신했다. 낯설고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라이브 퍼포먼스는 우연이 개입할 여지가 많은 작업이다. 비디오에선 완전히 다른 방법론을 취했나? 처음부터 확실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그에 따라 촬영했는지 궁금하다.
느슨한 시나리오가 있었을 뿐이다. 사실 퍼포먼스에 임할 때도 무엇을 할지에 대한 기본적인 계획은 갖고 출발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연적인 요소는 두 종류의 작업에 공히 작용한다. 다만 결과물로 어떤 시간이 쓰이느냐가 결정적인 차이점을 만드는 것 같다. 영상물 안에서 시간은 분절화된 형태로 존재한다. 편집을 통해 카메라 앞에서 벌어진 사건을 재조립하고, 충돌시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퍼포먼스의 기록이 아닌 하나의 필름을 완성하겠다는 방향성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지금까지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거창하고 예스러운 의상을 차려입고 일상적인 도시 풍경으로 파고드는 퍼포먼스를 주로 선보였다. 반면 <사람은 바위를 먹는다>는 히말라야 고산지대를 촬영지로 택했다.
카메라를 들고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건 사진이나 영상 작업이 지니는 큰 매력이다. 퍼포먼스에선 어려운 일이다. 관객이 필수적인데 이들을 아주 멀리 떨어진 공간, 예를 들어 산으로 데려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산을 관객이 있는 곳으로 옮겨오고자 했다. 라이브 퍼포먼스를 할 때도 난 늘 관중을 어딘가 비일상적인 곳으로 이동시키고 싶었다. 요란한 차림을 한 채 도시를 가로지르는 행위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이번 영상을 비롯한 당신의 작업에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 혹은 그 결과물이 자주 등장한다. 어떤 이유일까?
개인적으로 드로잉을 무척 좋아한다. 내가 마스터하지 못한, 그래서 내 한계를 일깨워주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무척 단순한 표현 방식이란 점이 끌린다. <사람은 바위를 먹는다>에는 숯으로 드로잉을 하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최소한의 것만으로 완성되는 작업인 데다 손으로 문지르면 먼지처럼 지워져버린다. 그렇게 쉽게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 날 집중시킨다. 과거의 사진 및 영화 촬영장에서는 인물들의 배경에 풍경이 그려진 벽을 세우는 트릭이 흔했다. 내 작업에서의 드로잉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현실과 환상을 뒤섞는 흥미롭고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퍼포먼스를 하며 화가, 귀족 등 가상의 캐릭터를 연기한다. 니킬 초프라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 있나?
가상의 캐릭터를 덧입고 있을 때에도 난 항상 나 자신이다. 다만 특이한 의상을 입고 어떤 상황에 던져짐으로써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평소에 하지 못했던 걸 할 수 있다. <사람은 바위를 먹는다>에선 어떤 캐릭터를 설정할지에 대해 촬영을 담당한 무니르 카바니와 많은 의논을 했다. 결국 캐릭터의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는 쪽을 택했다. 그 빈칸에 지금까지 내가 시도한 캐릭터를 모두 담을 수 있을 거라고 봤다. 그래서 벌거벗은 채 마치 태초의 인류 같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아마 그 역시 나 자신이겠지만 확신하긴 어렵다. 내가 평상시에 나체로 돌아다니진 않으니까(웃음).

앞으로 또 다른 캐릭터를 작업에 등장시킬 계획이 있나?
물론이다. 분장을 걷어내는 쪽에 점점 더 흥미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중세풍의 육중한 의상 대신 몸 자체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보디수트를 입은 채 퍼포먼스를 하려고 구상 중이다.

최근 들어 많은 미술 작가들이 영상 작업에 영화적인 화법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당신의 경우는 어떠한가? 카메라워크나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추후 적극적으로 실험해보고 싶은 바는 없나?
작가로서 유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싶다. 물론 H박스 프로젝트에 참여한 건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영화와 유사한 20여 분 길이 싱글 채널 비디오를 제작한 건 프로젝트의 특성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스스로를 영화적인 체험을 제공하는 일에만 제한하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인도는 영화가 필요 이상으로 넘쳐나는 곳이다. 나까지 비슷한 작업을 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H박스 프로젝트가 형식적인 제약이 좀 더 느슨하게 뒀다면 지금보다 흥미로운 시도가 가능했으리라고 보나?
오히려 조건이 정해져 있어서 도움이 된 측면도 있다. 20분 이내의 싱글 채널 비디오라는 형식 자체가 벌써 좋은 시작점이 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제공해준다. 게다가 에르메스 재단의 관계자 모두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협력적이었다. 6개월에 걸친 작업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럽다. 재단 측에 더 바라는 바는… 후원을 더 할 계획은 없을까? (웃음)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정준화
포토그래퍼
엄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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