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게 불어닥친 미니멀리즘의 파고가 전통적인 오트 쿠튀르 컬렉션의 재편마저 요구하고 있다. 2011 S/S 시즌은 그 절충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동공을 확장시키는 휘황찬란한 장식은 줄어들었고, 라인업의 절반은 한 번쯤 입어볼 수 있음직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모양새는 간결하다 해도, 수천 시간을 들여 옷을 짓는 장인 정신은 고스란히 담겨 있어 마음 한켠을 아리게 한다. 쿠튀르의 환경은 급류를 타고 있지만, 형이상학적 원류는 지속된다는 증거다.

CHANEL

“패션의 두 가지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하나는 ‘진화’이고, 또 하나는 ‘상반됨’이다.” 2011 S/S 오트 쿠튀르를 준비하면서 샤넬의 칼 라거펠트가 취재진에게 던진 일종의 ‘선언문’이다. 먼저 ‘상반됨’으로 말하자면 옷보다는 무대가 그 개념을 극명하게 드러내주었다. 라거펠트는 이번 오트 쿠튀르의 장소로 캉봉가에 위치한 샤넬 스토어의 살롱을 택했다. 무대 전면에는 코코 샤넬 여사가 거주하던 아파트의 소품에서 영감 받은 커다란 거울 장식의 패널을 세웠고, 그 위로 코로망델을 비롯한 샤넬의 아이코닉한 요소들을 시뮬레이션했다. 샤넬의 정신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효과적인 장치였지만 최근 몇 시즌간 칼 라거펠트가 ‘마법’을 부리곤 했던 그랑팔레의 대규모 쇼를 기억한다면 다윗과 골리앗만큼이나 비교되는 규모인 것이 사실이었다. 이 같은 쇼적 장치의 변화는 마치 전력 질주하던 100미터 전문 스프린터가 스스로 페이스를 늦추고 장거리 주자로 변신을 꾀한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 이번 컬렉션의 룩을 두고 칼 라거페트는 ‘간결함을 넘어서(beyondsimple)’라는 표현을 썼다. 데이웨어와 이브닝 가운을 통틀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액세서리들은 그가 원하는 진화한 간결함을 표현하는 데 있어 꽤 훌륭한 장치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앞코가 뾰족한 새틴 소재 플랫슈즈-발등이 훤히 드러나는 스타일-와 목 위로 높게 묶은 검정 리본 초커, 그리고 시뇽 헤어를 감싸는 검정 리본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컬렉션 전반에 걸쳐 로맨틱한 핑크색이 주요하게 사용되었는데, 단순한 액세서리들을 더해 지나치게 달달한 분위기로 흐르는 것을 막았다.

19세기 유명 화가이자, 1923년에 코코 샤넬 여사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던 마리 로랑생의 특징이기도 한 파스텔 색조는 컬렉션에 부드럽고 가벼운 기운을 더했다. 특히 이브닝웨어에서 이 점이 강조되었는데, 연한 색조 안에서 보이는 비즈와 프릴, 레이스 패치워크, 섬세한 코르사주 아플리케 등 샤넬 하우스 특유의 고급스러운 장식은 그야말로 감탄을 쏟아내게 했다. 그런데 여기서 예사롭지 않게 주목해야 할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하나하나의 아이템과 그 실루엣이다. 데이웨어로는 레디투웨어와 그다지 차이점이 느껴지지 않는 트위드 수트, 티셔츠와 데님 팬츠, 엉덩이 즈음에서 느슨하게 걸쳐지는 스커트 등이 나왔고, 이브닝웨어에서조차 튜닉, 티셔츠, 탱크톱과 맥시 스커트 등이 나왔다. 쉬운 아이템이 대부분이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라거펠트가 의도한 ‘진화’일지는 몰라도, 패션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즐거운 논란의 여지가 되기에 충분했다. 라거펠트는 샤넬의 오트 쿠튀르 사업은 이브닝웨어보다 데이웨어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고 말하면서 “인생은 칵테일 파티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물론 샤넬의 오트 쿠튀르 티셔츠에는 수천만 개의 비즈가 달려 있고, 엄청난 양의 조젯 실크가 낮은 허리선의 튜닉을 휘감고 있긴 하다. 하지만 쿠튀르급의 장식이 달려있는 스트리트 웨어라면, 이미 발맹이 하고 있다. 칼 라거펠트가 레디투웨어가 아닌 오트 쿠튀르에서 이런 행보를 보였다는 것은 패션계에 큰 파장을 몰고 올 것이다. 전설의 슈퍼모델, 크리스틴 맥미나미가 페탈 핑크색 드레스를 휘날리며 피날레 캣워크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오트 쿠튀르와 레디투웨어의 방향성이 어지럽게 뒤섞였을 테니 말이다.

DIOR

실제 컬렉션 무대가 열리기 직전, 패션 하우스들은 일부 취재진을 초대해 미리 컬렉션의 단서를 제공하는 프리뷰를 연다. 이번 오트 쿠튀르를 앞두고 열린 프리뷰에서는 많은 디자이너들이 고전적인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 3-D 아이디어를 결합한 프레젠테이션을 펼쳤다. 하지만 디올의 존 갈리아노는 아니었다. 갈리아노가 이번 쿠튀르를 앞두고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1940년대와 50년대, 무슈 디올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 디올 하우스를 위해 많은 작업을 했던 일러스트레이터 르네 그뤼오(Rene Gruau)의 작품이었다. 쇼가 열리기 하루 전, 르네 그뤼오의 작품이 여러 점 놓인 디올 아틀리에에서 존 갈리아노는 고전적인 일러스트레이션 기법을 패션에 적용한 컬렉션을 보여줄 것이라면서, ‘기술적으로 가장 도전적인 컬렉션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붓놀림의 강약에 따른 색의 변화, 잉크의 점도를 달리했을 때 나타나는 명암의 대비, 연필로 스케치하다가 지운 자국 같은 그뤼오 특유의 일러스트레이션 기법을 오트 쿠튀르 의상에 접목하겠다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올해 초 런던의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에서 열린 그뤼오 전시회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그간 특정 화가의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아 컬렉션을 만든 예는 있었어도 구체적인 회화 기법을 패션으로 형상화한 경우는 흔치 않았다. 하지만 갈리아노는 센트럴 세인트 마틴 재학 당시 디자인에 앞서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한 크리에이터다. 그렇기에 그 결과물에 대한 기대는 한층 높을 수밖에 없었다.

컬렉션이 열리고, 갈리아노가 창조한 쿠튀르 피스들이 하나씩 무대에 오르면서, 그가 말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그뤼오가 그린 스케치 특유의 명암은 다른 색상의 튤을 여러 겹 겹쳐 표현되었고, 종이 위에 섬세하게 그린 연필 스케치처럼 실루엣은 명확한 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데이웨어에는 생기 있는 색을, 이브닝웨어에는 좀 더 섬세한 색을 사용했는데, 한 벌 안에서도 그러데이션을 이용한 색상의 변화가 인상적으로 표현되었다. 빨강은 몸을 타고 흐르면서 검정으로, 누드 톤은 연한 하늘색으로, 하얀색은 분홍색으로 변화했다. 이 기법들은 디올의 오트 쿠튀르 의상을 더욱 힘있게 만들었는데, 특히 과장된 형태의 드레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물론 디올 하우스의 유산인 뉴 룩 실루엣은 빠지지 않았다. 트라페즈 코트는 헴라인 부근에서 부드럽게 접혔고, 바 재킷은 조각 같은 소매, 거대한 페플럼과 어우러져 더욱 드라마틱한 실루엣을 자아냈다. 과장된 실루엣의 상의에는 가느다란 펜슬 스커트를 매치하여 실루엣의 대비미가 더욱 극대화되었다. 스테판 존스의 드라마틱한 헤드피스, 올랜도 피타의 헤어와 팻 맥그라스의 ‘그림 같은’ 메이크업으로 ‘르네 그뤼오’라는 영감이 더욱 견고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분명, 실용적이거나 현실적인 컬렉션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가 쿠튀르에서 원하는 것은 현실보다는 환상에 가까운 것이라는 점을, 갈리아노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