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무조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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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면에서 쇼핑과 연애는 마찬가지다. 다들 나름의 계산과 논리를 갖고 뛰어들지만 어느 순간 맹목적으로 좇을 수밖에 없는 상대를 만나게 된다. 현명하면서도 무모한 소비자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선택하게 되는 브랜드에 대해 물었다. 취향이란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이름들이 다음과 같이 열거됐다.

포커스 피처스 – 태상준(영화 칼럼니스트)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미라맥스의 빈 자리를 거뜬히 메워주고 있는 미국 아트하우스 영화의 대표 파수꾼. 토드 헤인즈(<파 프롬 헤븐>), 소피아 코폴라(<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조 라이트(<오만과 편견), 미셸 공드리(<이터널 선샤인>) 등 수많은 인디펜던트 감독들이 포커스 피처스에서 비로소 그들의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발화했으며, 이안, 코엔 형제, 거스 반 산트, 짐 자무시 등 미국 거장 감독들의 신작도 모두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예술성과 상업성이 적절히 결합된, 거기에 논쟁적인 요소도 가미된 문제작들을 여전히 내놓는 미국 최고의 아트하우스 레이블이다.

소설가 이사카 코타로 – 박현주(번역가)
실은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그때는 이사카 코타로라고 대답했는데, 한번 좋아하면 마음 안 변하는 사람이라고, 내가. <골든 슬럼버> 같은 대작도 있었고 나 <왕을 위한 팬클럽은 없다>처럼소품으로 분류할 만한 작품도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내가 품은 질문에 최선의 답을 준다. 확실하다.

자전거 브랜드 비앙키- 김현태(광고대행사 아트머스 팀장)
우선 비앙키(bianchi)란 이름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자전거 마니아일 확률이 높다. 비앙키는 하이 브랜드이면서도 퍼포먼스에 주력하는 다른 자전거 브랜드와 달리 멋스러움까지 겸비하고 있다. 반다이크 브라운, 이브클랭 블루보다 나에게 비앙키 민트는 훨씬 세련된 컬러로 다가온다. 픽시보단 로드를 훨씬 좋아하는 로디로서 비앙키는 픽시에 못지않은 스타일리시함을 뽐낼 수있는 거의 유일한 브랜드가 아닐까? 그래서인지 100미터 밖에서도 눈에 확 띄는 비앙키 민트와 귀에 확 꽂히는 캄파놀로(이태리산 기어)의 소리가 들리면 꼭 따라가 라이더를 확인하곤 한다.

킴스클럽의 로버트 파커 평가 와인- 이지은(그래픽 디자이너)
와인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 맛있는 와인을 자립적으로 골라낼 확률은 매우 낮다. 유행을 타고 거품 낀 가격의 와인이 난립하던 때 나를 구제한 건 홈에버의‘로버트 파커 평가 와인’. 비교적 저렴한 2만~4만원의 가격대이면서도 이 와인비평가로부터 100점 만점에 88~95점의 평가를 받은 와인을 파는 코너였다. 점수를 과장한 사건이라든가 파커의 부정적인 영향력이라든가 등등 어두운 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와인 문외한인 나는 로버트 씨로부터 독립하려 할 때마다 실패를 맛보았고 와인은 그가 골라줘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쉬운 점은 홈에버가 홈플러스에 인수되면서 그 시리즈는 킴스클럽에서만 구할 수 있게 됐고, 킴스클럽은 매우 드물다는 사실. 얼마 전 그 코너에서 99점의 와인이 25만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어떤 맛일까? 이베리아반도에서 탱고를 추는 여인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그런 느낌일까?

디자이너 나가오카 겐메이- 최림(디자인그룹 스티키몬스터랩 디렉터)
정말 좋다고 생각되는 물건은 가격이 비싸더라도 구입한다. 오래 쓸수록 그 값어치가 증명될 거라 믿으니까. 리사이클 디자인 브랜드 디&디파트먼트의 대표인 나가오카 겐메이는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이너’란 별명으로 불린다. 잊혀져 버렸지만 여전히 그 가치를 인정할만한 디자인을 재발견하고, 그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 사람들 앞에 소개하는 것이 디&디파트먼트의 주요 활동이다. 새로운 것보다 오래 유지될 수 있는, 즉 롱라이프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셈이다.

몰스킨 노트 – 송은지(소규모 아카시아밴드 보컬)
4년 전에 우연히 선물 받은 몰스킨 노트를 쓰고부터 메모를 하고 일기를 쓰는 습관이 제 집을 찾은 것 같았다. 메모를 하고 일기를 쓰는 일은 오래된 습관이지만, 은근히 고된 일이기도 했는데, 몰스킨의 견고함이 큰 위안이 되었다. 당장 흩어져버려도 아무도 모를 혼자만의 기록이 비로소 하나의 일관된 역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할까? 그런데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보다 해마다 너무 비싸져서 솔직히 이제는 갈아탈까 하는 생각도 슬그머니 든다. 피카소와 헤밍웨이가 썼을 때도 이렇게 비쌌을까!

파이돈 출판사의 쿡북 시리즈- 이주희 (요리 칼럼니스트)
묻지도 따지지도 심지어는 미리 보기마저도 절대 클릭하지 않고 2008년부터 꾸준히 사들이고 있는 파이돈 출판사의 쿡북 시리즈. 가장 유명한 아트북 출판사답게 요리책 역시 범상치 않다. 요리도 예술의 한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거기에 걸맞은 멋진 아트북. 침을 줄줄 흐르게 하는 음식 사진과 아름다운 일러스트뿐만 아니라 쿡북의 아이덴티티도 잊지 않은, 쓰기도 보기도 모두 좋은 완벽한 편집과 레시피, 늘 재기 발랄한 콘셉트까지, “푸드 포르노중독자”인 동시에 “유희형 요리인”이라 스스로를 레이블링한 나에겐 하늘이 내린 완벽한 쿡북 시리즈라고 과장 조금 보태 말하고 싶다. 나도 언젠가 이런 요리책을 만들어 내고 싶은 마음이 늘 가득가득 차오른다. 남자친구는 4년째 크리스마스 선물로 나에게 요리책을 선물하는데 올해는 주문이 조금 늦어 PHAIDON의 새 쿡북 두 권이 아직 바다 건너 오고있는 중. 아, 게다가 백과사전인 양 보람차게 두꺼운 책의 부피와 무게마저 아름답다. 베개로 딱 좋은 사이즈인데다가 이걸 베고 자면 맛있는 거 먹는 꿈을 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 쿡북 초보 혹은 요리 초보에겐 우선 입문용으로 부터 권해본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 – 조지영 (TV 평론가)
<사랑과 진실>(1984)은 사실상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TV 드라마다. 이후 김수현의 거의 모든 드라마를 섭렵하며 성장했다. 84부작이든, 2부작이든 그녀는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언제적 김수현?’이라는 의문은 매번‘역시 김수현!’이라는 감탄사로 끝났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고마움을, 종종 그녀의 드라마를 볼 때 느낀다. 김수현 월드에서는 당대의 유행, 도발, 성찰이 놀랍게 합일을 이룬다. 경쟁자 없이 외롭게 독주하는 드라마계의 No.1 브랜드.

잡지 브루투스 – 임익종(일러스트레이터)
남성지라 해야 할지 문화 전반에 대한 잡지라 해야 할 지 감도 오지 않는 이 일본의 격주간지는, 매주 주제를 정해서 그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개’가 주제였던 이슈에서는 개 일반 상식들을 비롯해‘ 웃는 개 얼굴 화보’,‘개 엉덩이 화보’까지 어떤 페이지를 펼치든, 개판이다(심지어 의류화보에도 매 컷 개가 등장한다). 잠시 머릿속을 지나가는 주제들만 해도‘마카오에서 금토일 보내기’, ‘칠 아웃(chillout)’, ’ youtube’, ‘빵 교과서’ 등등. 대체 어떤 기준으로 주제를 잡고 무슨 수로 2주 만에 이리알찬 잡지를 꺼내는지. 게다가 시즌마다 착실히‘ stylebook’(물론 남성을 위한)과‘거주공간학’(인테리어는 우리에게 맡겨다오) 이슈를 발간해주니 비루한 패션 센스에도, 맥주캔과 재떨이가 굴러다니는 방구석에도 한줄기 빛을 비춰 준달까. 일본어를 못하는 사람에게도 적극 추천 해주고픈 잡지다(네, 정말입니다. 저도 일본어문맹이거든요).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 – 박진아(아티스트)
젯셋족이 아니라 가본 공항이 열 손가락 안에 들긴 하지만, 공항이라는 어디서나 비슷비슷한 림보 같은 공간중에서 나는 이상하게 이 공항이 끌린다. 디자인이 좋아서인지 규모가 적당한 것인지 편의시설이 좋은 것인지 딱히 이유는 모르겠다. 다른 공항에 있는 시설과 사실은 거의 비슷한데도, 스키폴 공항에 있는 식당과 바, 면세점, 기념품점, 라운지, 보딩하기 전 기다리는 의자, 오래 걸어가야 하는 복도같은 것들은 특히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그래서 유럽의 도시로 비행기를 갈아타고 갈 때는 되도록 KLM을 이용하려 한다. 항공사 때문이 아니라 공항 때문에. 암스테르담이 목적지였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제임스 퍼스의 면 티셔츠 – 이유(모델)
미국 브랜드 제임스 퍼스는 단순하면서도 편안한 디자인과 질좋은 소재의 제품들로 잘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브랜드의 얇은 면 티셔츠야말로 최고라고 생각한다. 색상도 다양하고 가격 또한 적절하다보니 자꾸만 사들이게 된다. 물리지 않는 음식 같아서 이 아이템만 색색별로 충분해도 1년을 고민 없이 날 수 있을 듯. 시즌마다 프린트 없이 깔끔하고 편안한, 기본 디자인의 티셔츠들로 옷장을 가득 채울 수 있기를 늘 바라곤 한다.

파이오니어 사의 모니터 쿠로 – 강명석(<10아시아> 편집장)
파이오니어의 쿠로(KURO)는‘50인치’모니터다. TV튜너도, 스피커도 없다. 개발자들이 화질에만 집중해서다. 당연히 화질은 세계 최고다. 하지만 망했다. 가격이700만원 대였다. 쿠로는 단종됐고, 미국에서 덤핑 판매됐다. 전 세계의‘AV덕후’들이 사갔다. 나도 샀다. 나의 행운. 또는 세계 최고 화질과 회사의 적자더미를 바꾼 엔지니어의 불운. 정말, 바보 같지만 멋있다.

영화감독 홍상수 – 오영욱(건축가)
‘이건 마치 홍상수 영화 같다’는 표현을 곧잘 쓴다. 사람들의 일상은 뻔하면서도 뻔하지가 않다. 홍상수는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가 미묘하게 흐려지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는 작가다. 그의 작품들에서 읽히는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스타일은 관객들에게 기이한 공감의 순간들을 선물한다. 우리의 지리멸렬한 삶에서 새로운 어휘를 발견하는 느낌이랄까?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결국 이런 거다. 나의‘ 찌질함’을 천해 보이지 않게 해준다.

루니 튠즈 – 듀나(소설가, 영화 칼럼니스트)
지금도 워너 로고가 뜨면서 빰빠빰빠 빰빠빰빠 빰빠빠빠! 팡파레가 울리면 가슴이 쾅쾅 뛴다. 루니 튠즈는30, 40년대를 거치면서 실사 영화는 감히 도달할 수없는, 오로지 코미디의 이데아로만 구축된 세계를 만들어냈다. 다이아몬드처럼 순수하고 완벽해서 파괴되거나 낡지 않는 세계.

서울아트시네마 – 김종관 (영화감독)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우리가 소비하게 되는 것은 그곳이 만든 영화가 아니라 그곳이 보여주는 영화다. 그러기에 그곳에서 상영하는 영화라 하더라고 그 브랜드만 믿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다시 한번 신중히 골라봐야 하지만, 종로 한 귀퉁이에서 다른 시대 다른 공간의 추억들을 다시 마주하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세상의 속도는 빨라지고 영화는 그 속도를 따라가려 애를 쓰지만 좋은 영화는 지나는 세월에 따라 다른 맛을 내며 후대의 관객을 기다린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시절과 유행을 따르지 않는 영화들을 준비해놓고 항상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정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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