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패션 브랜드와 미술 작가들이 짧은 로맨스를 피워 올렸다 미련 없이 뒤돌아선다. 성 급하고 책임감이 부족한 만남 사이에서 콜롬보와 9명 아티스트들의 협업은 주목할 만한 예외로 꼽을 수 있을 거다.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까지는 7년에 걸친 신중한 준비 과정과 기다림이 있었다.

1 콜롬보와 9명의 아티스트가 함께 준비한  전시장 전경. 2 김혜숙의 설치 작업인‘ Metamorphosis’. 3 콜롬보의 장인이 전시장에서 가방 제작 공정을 시연하고 있다. 4 숯과 아크릴로 제작한 박선기의 모빌 작품 ‘An Aggregation’. 5 신인 작가 이석민의‘ 자연적 필연성 1’.

1 콜롬보와 9명의 아티스트가 함께 준비한 <예술과 명품의 조우> 전시장 전경. 2 김혜숙의 설치 작업인‘ Metamorphosis’. 3 콜롬보의 장인이 전시장에서 가방 제작 공정을 시연하고 있다. 4 숯과 아크릴로 제작한 박선기의 모빌 작품 ‘An Aggregation’. 5 신인 작가 이석민의‘ 자연적 필연성 1’.

패션과 미술의 밀월 관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공공연한 것이었다. 이브 생 로랑이 몬드리안의 회화가 프린트된 드레스를 런웨이에 세운 뒤로 수많은 디자이너와 패션하우스가 갤러리에서 각자의 뮤즈와 대면한 바 있다. 마크 제이콥스, 리카르도 티시, 그리고 스콧 스턴버그 같은 디자이너가 스테판 스프라우스, 프리다 칼로, 데이비드 호크니 등에게 건넨 애정 고백은 일부의 예에 불과하다. 종종 패션계는 영감을 취하는 정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작가에게 공동 작업을 제안하기도 한다. 가장 상업적이라 할 만한 분야에 예술적인 상상력이 불시착할 때 완성되는 풍경은 미술 애호가와 패션 인사이더 모두의 시선을 힘있게 붙든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콜롬보 역시 예술가들과의 협업에 꾸준하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내온 바 있다. 최근 청담동의 카이스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인콘트로 트라 루쏘 에 아르테(Incontro Tra LussoEArte : 예술과 명품의 조우)>는 일종의 중간 결산이다. 콜롬보는 7년 전부터 수천만 원대의 최상급 악어가죽 백을 작가들의 캔버스, 혹은 오브제로 제공해왔고, 그 가운데 선별한 9명 예술가의 작품 40여 점을 이번 기회에 공개했다. 같은 재료를 갖고 출발한 프로젝트지만 김용호, 김혜숙, 류은영, 박선기, 이석민, 정규리, 진원석, 코디최, 그리고 함연주의 작업은 각각의 언어를 지닌 섬처럼 확연히 달랐다. 전시 오프닝에 참석한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군도를 종단하는 여행자들처럼 작가별로 설치된 작품들을 차례차례 감상했다. 단, 이번 여정에서 콜롬보의 큼직한 트렁크는 여행객들의 팔에 부담이 되는 짐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머물고 싶어지는 목적지였다.

어느덧 ‘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 즉 협업이란 단어는 패션계에서 킬힐이나 런웨이만큼 흔한 단어가 됐다. 그만큼업계 밖의 재능들과 브랜드 간의 교류가 활발해졌다는 뜻이다. 가끔은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세련된 방식의 마케팅에 그칠 뿐, 곱씹을 만한 작업으로 귀결되는 경우는 드물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하지만 콜롬보처럼 아티스트들과 관심이 교차하는 지점을 긴 호흡으로 모색해온 기업은 예외로 삼을 만하다. 아마 이번 전시는 그 새삼스러운 증명이 됐을 것이다.경력도 성향도 다양한 9명은 작가로서의 고집이 뚜렷하게 담긴 결과물을 내놓음으로써 단지 브랜드 홍보의 들러리로 초대된 게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다. 한편 콜롬보는 본 프로젝트에서 참여 아티스트들의 개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자사 시그너처 아이템의 존재감까지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기꺼운 소통이 오고 간 자리에는 다음에 언급될 작업들처럼 보기 좋은 결과가 남기 마련이다. 그것이 패션이든, 예술이든 간에.

1. 가방의 몸, 김용호
사진가 김용호는 ‘신대륙용 여행 가방-상품화된 몸’과 ‘나혜석’ 연작을 이번 전시에 소개했다. 전자는 악어가죽 트렁크에 사람의 몸 사진을 프린트한 작업이다. 만약 우리보다 우월한 종이 존재한다면 악어가 아닌 인간의 가죽으로 가방을 만들지 않았겠느냐 하는, 섬뜩하면서도 유쾌한 상상력이 읽힌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여권운동의 선구자였던 인물이다. 작가는 이 진보적 신여성으로 분장한 모델을 촬영한 뒤, 그 이미지를 콜롬보의 여행 가방에 새겨 연작으로 완성했는데 후반 작업을 거친 초상 사진은 마치 오래전에 그려진 유화처럼 아스라한 질감을 띤다. 시대를 앞서 살았던 여성은 서늘하게 담담한 한편으로 불안하고도 서글픈 표정이다. 사회의 편견을 떨치고 훌훌 자유롭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인물이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여행 가방으로 환생한 셈이다.

2. 인생의 자화상, 정규리
정규리는 콜롬보 백을 캔버스 삼아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피사체들을 이것저것 옮겨 그리며 우연과 필연이란 주제를 탐색한다. 타이어, 지구본, 열기구 등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화면 안은 어떠한 공간감도 읽히지 않아 마치 막막한 우주처럼 보인다. 작가는 무관했던 조각들이 어떻게든 관계를 맺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곧 삶이라고 말한다. 이 무중력의 풍경은 말하자면 작가가 이제껏 지내온 시간의 자화상이다. 각각의 우연은 정교하게 포개져 누군가의 인생이라는 하나의 필연을 이룬다. 삶을 여행에 빗대는 건 다소 진부하지만 그만큼이나 효과적인 은유다. 콜롬보의 여행 가방 위에 인생의 약도를 옮긴 정규리의 작품 ‘Life-Go-Round’는 이 익숙한 표현을 새삼 곱씹게 한다.

3. 역사의 재구성, 류은영
류은영은 여러 도시에서 수집한 앤티크 장식을 활용해 빈티지 백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한다. 1950년대 이탈리아와 1930년대 프랑스, 1980년대 뉴욕의 흔적을 자유롭게 뒤섞는 식이다. 작가는 이 소규모의 수작업이 새로운 역사를 구성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각각의 가방에는 사용된 재료에 관해 기록한, 일종의 족보 같은 편지도 곁들여진다. 물론 설명을 떼고 감상해도 그 자체로 눈길을 끌 만큼 아름다운 작업이지만.

4. 실제를 찾아서, 박선기
갤러리 2층 안쪽의 분리된 공간은 박선기의 작품들이 채웠다. 벽 앞에 설치된, 얼핏 검은 가죽 가방처럼 보이는 건 숯을 깎아 만든 조각들이다. 한편 콜롬보 백을 형상화한 거대한 모빌은 숯과 아크릴 조각들을 나일론줄로 촘촘히 매달아 제작했다. 덩치를 지닌 듯 보이지만 그건 일종의 착시다. 조금만 각도를 틀면 가방이라 여겼던 형태는 부슬부슬 흐트러진다. 작가는 관람객의 시선에 따라 불완전하게도, 완전하게도 보이는 작품을 제시함으로써 실제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아크릴 조각과 깊은 먹색의 숯 조각으로 이뤄진 두 개의 모빌이 샹들리에처럼 나란히 공중에 떠 있는 풍경은 담백한 장관이다.

5. 필연적 우연, 이석민
신예 작가 이석민이 택한 방법론은 액션 페인팅과 데칼코마니 기법이다. 즉, 콜롬보의 토트백 옆면에 색색의 물감을 흩뿌리거나 혹은 좌우 대칭의 추상적 이미지를 새긴 뒤 ‘자연적 필연성’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 “때론 행위의 우연성이 자연적 필연성을 도출하기도 한다”라는 제작 노트는 이 작업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인 설명이다.

6. 혼란스러운 황홀경, 코디 최
코디 최는 자신의 작업이 ‘극도의 아름다움을 만났을 때 벌어지는 뇌의 크로스 기능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대단히 아름다운 대상과 마주한 경우 인간의 이성은 문득 흐려지는데 작가는 그 혼란스러운 상태를 글씨와 색채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White’, ‘Red’, ‘Green’ 같은 글자를 각각 검은색, 파란색, 녹색 등으로 가방 위에 새겨 넣는 식이다. 그저 강렬한 색감의 타이포그래피로 장식한 가죽 가방이라고만 생각했던 관람객들은 이 의도적인 오류를 약간의 시간차 뒤에 발견할 것이다. 콜롬보 백의 완성도 높은 디자인에 대한 세련되면서도 위트 있는 칭찬이다.

7. 거미 여인의 예술, 함연주
함연주가 즐겨 사용하는 재료는 바로 머리카락이다. 긴 터럭을 싹둑 잘라 오브제처럼 벽에 늘어뜨리기도 하고, 가닥가닥 정교하게 이어 거미줄인 듯 나무 사이에 걸기도 한다. 전시에 소개된 ‘Morning Dew’는 검은 콜롬보 백 위에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짜 거미줄을 얹어둔 작품이다. 그 위엔 크리스털이나 에폭시를 마치 이슬방울처럼 점점이 떨어뜨렸다. 긴 머리털이나 꽃처럼 함연주가 다루는 소재나 이미지는 여성성과 연관이 깊다. 하지만 그저 나긋나긋하게 예쁜 느낌과는 엄격히 거리를 두는 편이다. 오히려 그 정교하고 치열한 작업은 은근히 섬뜩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 여성성의 입체적인 해독이야말로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아닐까.

8. 변신 이야기, 김혜숙
갤러리 2층을 길게 가로지른 설치 작업은 김혜숙의 ‘Metamorphosis’였다. 작가는 붉은 카펫 위에 원형을 거의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악어가죽을 일렬로 배치했으며 짐승들의 머리가 향한 벽면엔 달마도가 영사되도록 했다. 콜롬보의 가방들은 그 옆을 따라 자리 잡았다. 검은 악어가죽 백 위에 정교하게 묘사된 나비나 훈장이 얹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고 이 역시 ‘Metamorphosis’ 연작에 해당한다. 김혜숙은 작품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아낀 채 해석은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기고 싶어 한다. 수수께끼 같은 작업이지만 ‘변형’이라는 뜻의 제목과 삶과 죽음, 소멸과 환생 같은 주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온 그간의 작품 세계를 독해의 단서로 삼아볼 수 있겠다.

9. 시간여행자의 백일몽, 진원석
<맨발의 꿈>을 연출한 영화감독 진원석은 19세기에 제작된 빈티지 악어가죽 여행 가방을 소재로 단편 를 완성했다. 잠에서 깬 뒤 낯선 여행 가방을 발견하는 여인. 호기심에 육중한 잠금 장치를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던 빗으로 머리를 빗어본다. 그리고 19세기의 언젠가 이 가방의 주인이었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자살을 계획한 남자가 총구를 머리로 가져갈 때 여자는 비명을 지르고 만다. 환상에서 깨어난 뒤, 여자는 잠시 소파에 누워 눈을 감는다. 160년 전의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감독은 1850년쯤 생산됐다는 이 고풍스러운 가방의 원래 주인은 누구였을까, 하는 단순한 의문이 시나리오의 출발점이었다고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