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 가격이 같은 무게의 돼지고기와 맞먹는다. 양배추는 한 통에 9천원에 육박한다. 이런 무시무시한 시기에 요리란 둘 중 하나다. 심리 테라피이거나, 진짜 럭셔리거나.

음식 해먹는 일과 담쌓은 지 몇 달째 되었다. 혼자 살면서도 파스타를 삶거나 채소를 볶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내다버려줄 남편도 없이 음식물쓰레기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는 신세가 언제부턴가 지긋지긋해져서 그만두었다. 음식 만드는 일은 내 인생에서 아웃소싱하는 분야로 삼기로 했다. 밥을 밖에서 사 먹으니 놀 시간이 늘어났다. 마트 시식 코너에서 남편 먹이겠다고 군만두를 향해 돌진하는 아줌마의 카트에 발가락을 찧는 일도 없어서 좋았다.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 공산당이 이해가 갔다.외식 문화를 전파해서 여성의 노동력을 부엌으로부터 사회로 돌린 그들의 전략 말이다.

페미니스트 건축 운동이 생겨나던 근대에는 집에서 부엌을 없애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내 경우 요리에 드는 에너지를 아껴 일을 더 한다기보다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술을 더 마셨지만. 자발적으로 요리하지 않기를 결단했어도 그 감각은 졸업한 학교의 쉬는 시간 종소리처럼 희미하게 남아있다. 사람들을 불러 내가 만든 요리를 먹이는 재미는 요리의 저학년 단계. 하지만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자기 자신을 위해 앞치마를 두른다.

혼자만의 식탁은 일기장 같다. 다이어리일지라도 글은 종이 위에 옮기는 순간부터 공적인 성격을 갖듯, 자신을 위한 요리도 누군가의 시선을 가정하게 마련이다. 혼자 하는 요리는 ‘집에 있음’을 가장 적극적으로 즐길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썰고 다듬고 자르고 굽고 하는 동안 몰입하느라 다른 잡생각을 잊는다는 장점도 있다. 부엌은 자신에게 100% 집중하기를 바라는 독재자형 애인이니까. 딴짓을 하면 대가를 치르기 십상이지만 (불에 데거나 칼에 손을 다치거나) 거기 속해 있을 땐 어디보다 아늑한 편안함을 제공한다.

최근 채소값이 급등하면서 도리어 손 뗀 요리를 다시 시작해보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집에서 음식을 해먹는다는 건 더 이상 검소함을 뜻하지 않는다. 냉장고 안에 재료를 남기지 않으면서 메뉴를 정할 수 있는 창의력과 지식, 값비싼 채소 재료를 공급할 수 있는 재력, 진짜 건강을 생각하는 고집과 자기 관리, 재료를 다듬고 불과 물 앞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부지런함과 에너지, 그 시간을 즐길 마음의 여유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으니까. 요즘 같은 때 ‘나 요리하는 여자야’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의미의 능력자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