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람하는 스타일 속에서 자신을 또렷하게 지키는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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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석의 N극과 S극처럼, 극단을 오가는 스타일의 각축장이 될 2010년 가을/겨울 시즌. 범람하는 스타일 속에서 자신을 또렷하게 지키는 첫걸음은 시즌 키워드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ClassiC ladies지난 몇 시즌간 패션계를 지배한 키워드는‘ 파워’였다. 높이 솟고 옆으로 벌어진 어깨선, 반짝이는 크리스털이나 시퀸, 메탈릭한 장식, 점점 덩치가 커지는 코스튬 주얼리…. 표현된 방식은판이했지만 이러한 패션이 지향하는 바는 여성에게 힘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과해지면 자정 작용이 일어나는 법‘. 파워 우먼’의 득세에 숨을 죽였다가 되돌아온 여러 테마 가운데 가장 반가운 것 중 하나는 바로 클래식한 레이디 룩이다. 주로 1950~60년대의 단정하고 보수적이며 부유한‘ 숙녀’의 이미지를 현대적인 감성으로 재해석한 것이 대부분으로뉴욕, 밀란, 파리 등 도시를 불문하고 고루 나타났다. 대표적인하우스는 루이 비통. 종아리까지 헴라인이 내려오는 풀 서클 스커트와 허리를 잘록하게 조이는 뷔스티에로 극적인 실루엣을만든 루이 비통의 쇼를 두고 평론가들은“ 신은 여자를 창조하고마크 제이콥스는 여성에게 옷을 입혔다”라는 말로 찬사를 보냈다. 미드카프 길이의 과장된 풀 스커트는 파리의 드리스 반 노튼과 클로에, 밀란의 프라다, 뉴욕의 제이슨 우 등 주요 쇼에서모두 선택한 아이템임을 기억해둘 것. 한편 돌체&가바나, 자일스, 니나리치, 오스카 드 라 렌타, 로에베 쇼에서 볼 수 있듯 펜슬 스커트나 샤넬 스타일의 스커트 수트 등 60년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일명‘ 세크리터리(비서) 룩’도 이번 시즌의 핫 아이템이다. 가느다란 벨트를 함께 매치한 스타일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에서 볼 수 있듯, 클래식 레이디를 잘 표현하는 관건은 허리를잘록하게 조이는 모래시계 실루엣에 있다. 괜찮은 체형 보정용언더웨어를 함께 갖춰야 할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RetRo MilitaRy전쟁이 인류 역사에 백해무익한 결과만을 낳았으며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재앙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동시에전쟁이‘ 스타일’이라는 대단한 유산을 남겼다는 것은 꽤 아이러니하다. 이번 시즌 역시 패션은 전쟁이 드리운 그림자의 영향권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다. 특히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시대에서 영감을 많이 받은 듯, 클래식하면서도 다소 경직된 남성적인 스타일이 많다. 가을•겨울 시즌이면 늘 각광을 받는 막스마라는 실용적인 유틸리티 룩의 표본을 제시하면서 몇 시즌째 상종가를 치고 있는데, 특히 이번 시즌 밀리터리 실루엣에더블 버튼, 견장과 아웃 포켓 등으로 멋을 낸 스윙 코트를 여럿등장시켜‘ 밀리터리 시크’의 기준점을 극명히 보여주었다. 페이즐리와 카키색을 조합한 에트로의 룩은 동인도회사 시절의 영국 군인을 연상시켰고, 몸에 꼭 맞는 엄격한 프록코트 룩을 제시한 하이더 애커만과 A.F. 반데보스트의 컬렉션은 사관생도의 교복과 닮았으며, 금색 브라스 버튼과 메탈릭한 자수로 재킷과 코트를 장식한 발맹의 룩은 화려한 군악대의 모습과 겹쳐진다. 유니폼처럼 과하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밀리터리 룩 특유의자유로움을 즐기고 싶다면 점프수트, 원 버튼 재킷, 스웨터 셔츠 등 일상적인 아이템에 짙은 올리브 카키 톤의 아이템을 섞어전체 룩을 완성한 컬렉션을 참고하면 좋다. 드리스 반 노튼, 마크 by마크 제이콥스등이 올리브 카키색을 사용하여‘ 쿨 밀리터리’ 룩을 만들어낸 대표적인 예다. 밀리터리 룩은 이번 시즌다른 룩에 비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스타일이기도 하다.원 아웃(worn out) 효과가 강조된 버튼 장식의 울 소재 코트나버버리 프로섬처럼 클래식한 에이비에이터 스타일의 점퍼, 이두 가지 아이템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낼 수 있으니 말이다.

Neo MiNiMalisM최근 몇 달간 패션지를 열심히 정독했던 독자들이라면 정작 가을•겨울 시즌이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미니멀리즘’이란 단어에 지겨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너무 장식적이고 과장되게흐르던 패션계에 자정 작용이 이는 것처럼, 차분하고 군더더기없는 스타일이 지난 시즌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번시즌 이 무드에 동참한 디자이너들이 꽤 많아진 탓이다. 물론그 중심에는 셀린의 피비 파일로가 있다. 10년 전, 질 샌더와 헬무트 랭에 의해 시작되어 만인을 경도시킨 그‘ 단순함의 미학’이셀린의 런웨이에서도 똑같은 감동으로 재현되었다. 검정, 하양,네이비 등 몇 되지 않은 색만을 가지고 선과 면의 비율, 각도를조정한 것. 테일러링을 기본으로 한 간결한 컬렉션을 선보인 스텔라 매카트니, 캐멀 컬러의 아름다움을 블라우스와 코트, 스커트 등 기본 아이템에 적용한 한나 맥기본의 클로에, 가죽만 잘잘라도 멋진 드레스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보테가 베네타, 장식 하나 없이 독특한 패턴 하나로만 승부를 건 프랜시스코 코스타의 캘빈 클라인 컬렉션이 모두 미니멀리즘에 동참하고 있는브랜드들이다. 그런데 막상 전 도시의 경향을 돌아보면, 전반적으로 과한 장식의 거품이 가라앉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극명하게‘ 클린’한 컬렉션을 만드는 브랜드의 숫자는 오히려 손에 꼽을 정도다. 그만큼 리얼웨이에서 적용이 쉽지 않을것으로 보이는데, 이 룩에 비교적 편안하게 접근하는 키 아이템은 오프 화이트 셔츠, 진한 컬러의 펜슬 스커트나 팬츠, 얇은 가죽 벨트 등이며, 룩을 완성하는 포인트는 모든 아이템이 최고급의 퀄리티여야 한다는 것이다. 질 낮은 아이템은‘ 간결함’이 아니라‘ 저렴함’을 내보일 뿐이다.

outdooR PRePPy‘와펜 장식의 유니폼 블레이저에 기계 주름 스커트’와 같은 진부한 스테레오 타입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프레피 룩 역시 이번 시즌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난 주요 스타일 중 하나다. 같은프레피 룩이라도 주요 모티프가 되는 배경이 어디냐에 따라 경향이 조금씩 달라지는 편인데, 이번 시즌은 굳이 따지자면 스코틀랜드식 프레피 스타일이 대세다. 즉, 영국식 학교의 엄격함도내재되어 있지만 동시에 스코틀랜드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고즈넉한 하이랜드를 배경으로 한 아웃도어 스타일이 함께 보여진다는 뜻. 보이시한 스타일과 걸리시한 스타일, 그리고 포멀한 스타일과 아웃도어 스타일이 믹스 매치되어 혼재하는 이번시즌의 프레피 룩은 무엇이든 섞어내길 좋아하는 요즘 젊은 세대의 문화를 그대로 닮은 느낌이다. 뉴욕의 최고 인기 브랜드로급부상한 랙&본이 대표적인데, 트위드 재킷과 플래드 퀼트 스커트와 같은 전형적인 프레피 아이템에 캐시미어와 페어 아일니트, 레그 워머와 두툼한 머플러를 섞어 신선한 스타일링을 만들어냈다. 프로엔자스쿨러는 더플코트와 플리츠 스커트에 호사스러운 모피와 그래피티 데님을 더해 럭셔리 프레피의 기준을 제시했으며, 니삭스와 셔츠 원피스, 청키한 롱 니트로 소녀다움을 강조한 스포트막스, 아메리칸 프레피 룩을 고급스럽게정리한 타미 힐피거 등이 이 무드에 힘을 실었다. 한편, 두툼한케이블 니트에 눈썹 모양의 뿔테 안경과 스퀘어 토의 로퍼를 매치한 프라다나 오랜만에 백팩을 컬렉션에 올린 샤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극명한 액세서리 하나로도 얼마든지 프레피 룩을즐길 수 있는 것이 이번 시즌의 특징이다.

elegaNt sPoRtsweaR레깅스, 데님 셔츠와 팬츠, 스웨트 셔츠, 맨투맨 톱, 유틸리티 베스트와 점프수트…. 일명‘ 스트리트 시크’를 표방하는 실용적인패션 아이템들이 대놓고 하이패션과 섞이기 시작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 시즌은 꽤 흥미로운 방식으로 풀리고있다. 특히 미국 디자이너들의 영향력이 거대해졌다는 점을 눈치챌 수 있다. 미국식 프래그머티즘의 황제, 마이클 코어스만 해도그렇다. 색과 패턴의 조합을 탐구하던 그는‘ 젯셋‘’ 럭셔리‘’ 업타운’이라는 자신의 키워드를 되찾고 이를 전에 없이 손쉬운 방식으로 보여주었는데, 그 면면을 뜯어보면 편안한 터틀넥 스웨터나니트 레깅스, 코튼 캐미솔 같은 실용적인 아이템이 매우 교묘하게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식축구에 열광하는 여대생들의 필수 아이템인 맨투맨 셔츠는 드레시한 스커트와 매치되어 타미 힐피거와 드리스 반 노튼의 쇼에 올려졌고, 서부개척시대의상징인 데님 소재는 날카롭게 커팅한 테일러드 재킷이나 팬츠와어우러져 이자벨 마랑과 후세인 샬라얀의 컬렉션에 주요하게 사용되었다. 반면 리드 크라코프나 리처드 채 러브, 조너선 선더스쇼에서는 스니커즈에 딱 어울릴 만한 젊은 스타일링의 스포츠웨어-현재 거리의 젊은이들이 바로 구입하기에 적당한-들이 대거쏟아져 나왔다. 포멀하고 럭셔리하게 보이든, 아니면 신선하고언더적인 느낌이 가미되어 있든 간에 이번 시즌 스포츠웨어의 특징은 전반적으로 허리를 드러내고 깊은 다트나 슬릿을 통해 여성스러움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장식이 많지 않은 룩이므로 좋은소재를 썼는지 살피는 것도 필수다.

에디터
패션 디렉터 / 최유경
포토그래퍼
PHOTOS|JASON LLOYD-EV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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