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이 한층 재밌어졌다. 뉴 키즈, 80년대생 디자이너들이 대거 진입하고서부터다. 이들의 어떤 점이 패션을 재밌게 만드는 걸까?

애송이에게 확신을 갖게 되기까지는 많은 관찰과 그 이상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1년에 단 두 차례, 평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관문인 캣워크에 정육면체 박스로 얼굴을 가린 모델을 올린다거나(가레스 퓨), 비슷한 시간대에 열린 대선배 아이작 미즈라히 쇼는 어떻게 되든 말든 양보 없이 슈퍼모델들을 모두 동원해버린다거나(알렉산더 왕), 정중한 이브닝드레스에 스팽글로 킹콩 무늬를 짜 넣는(크리스토퍼 케인) 발칙한 신인 디자이너에게서 칼 라거펠트급의 미래를 예견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발렌티노 가라바니 같은 폼생폼사 예의범절 대장이라면 ‘요즘 것들에겐 패션이 장난이냐’며 밥상 뒤엎을 정도로 노하는 장면을 연출할 법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패션계는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제대로 광합성을 해보려는 떡잎 디자이너만 나타났다 하면 “심봤다”를 외치며 육년근 홍삼급 대접을 한다. 입으로는 자중을 외치면서도 본심은 결국 어리고 마른 모델에게 현혹되듯이, 젊고 매력적인 디자이너에게는 시장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정도의 파워와 투자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MTV가 개국하던 1980년 이후 출생한, 이른바 비주얼 세대 디자이너들. 이들 중 일부는 이미 패션의 한가운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일부는 최근 두어 시즌간 가파르게 주가를 올리며 80년대생 전성시대의 서막을 고하고 있다.

물론 10년 주기로 세대를 구분한다는 것은 오래된 나무둥치에서 나이테를 세는 것처럼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겉모양새로만 따졌을 때 이 테두리 안에 포함되지 않는 사례도 허다하다. 그 누구도 1980년생 잭 포슨이 1942년생 레이 가와쿠보보다 모던한 의상을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80년대 이후 출생한 디자이너들의 공통점은 디자인상의 결과물보다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과정이나 전략에서 발견되곤 한다. 무엇보다 패션계에서 이들의 가치를 차별화하는 것은 미디어를 갖고 노는 능력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컬러 TV를 당연하게 시청하고, 당대의 스타일이 집대성된 뮤직 비디오 채널을 24시간 켜놓고 살며, 보고 싶은 영화는 인터넷으로 익숙하게 찾아 보며 성장한 이들은 무엇이든 ‘쉽게’, 그리고 선배 세대들보다는 좀 더 ‘세련되게’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한 과거와 새로운 것을 섞어 내는 것에도 두려움이 없다. 그런 면에서 최고의 강자는 런던의 신동에서 파리의 앙팡테리블로 진화하고 있는 가레스 퓨(1981)다. 남자 디자이너들은 종종 패션을 통해 ‘강인한 여성상’을 설파하곤 하는데, 가레스 퓨의 룩이 충분히 강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유독 그의 룩은 세기와 출처를 종잡기 힘들다. 그의 시그너처가 된 셰브론(V를 거꾸로 세운 모양) 커팅을 제외하고는 일본의 오비벨트에서 로코코 궁전의 샹들리에, 영화 <에일리언>의 유니폼까지 한데 섞어 캣워크에 등장시키는 그의 비주얼적 재능은 그 이전 세대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시작해 <엘바이라> <내추럴 본 킬러>에 이르는 광범위한 시대의 영화에서 영감을 얻되, 매번 과하지 않게-즉, 당장 입을 수 있게-풀어내는 재능을 가진 크리스토퍼 케인(1982)은 실험적인 요소와 동시대적인 안목을 가졌기 때문에 데뷔 시즌부터 런던의 총아로 떠오를 수 있었다. 파리의 가레스 퓨, 런던의 크리스토퍼 케인과 함께 80년대생 전성시대에 방점을 찍는 디자이너는 단연 뉴욕의 알렉산더 왕(1984)이다. ‘신선함’ ‘스포티함‘ ’ 실용적‘ ’ 동시대적‘ ’ 대중적’등 이미 알렉산더 왕의 시그너처로 자리 잡은 단어들은 고스란히 80년대생 디자이너군에 적용해도 되는 특징들이다. 즉, 80년대생들의 장점만을 모은 현재진행형의 표본인 셈이다. 빠르게 하이패션의 한 축을 차지했지만 상위 1%보다 더 많은 사람이 열광할 만큼 대중적이며, 언제나 자신의 10대 시절 대부분을 보낸 ‘스트리트’의 감성을 놓치지 않는다. 타임 스퀘어에 있는 거대한 LED 전광판을 통해 자신의 쇼를 뉴욕 시민에게 생중계할 만큼 미디어 친화적인 한편, 에린 왓슨의 절친이자 안나 윈투어의 귀염둥이로 패션계에 진입하는 지름길도 확보했다. ‘발군’이라는 단어는 알렉산더 왕에게 쓰라고 있는 말이다.

‘젊음’의 가치를 ‘노련함’과 동일한 선상에 두는 뉴욕에서는 아무래도 다른 도시에 비해 왕성하게 활동하는 80년대생 디자이너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알렉산더 왕의 상품성을 맛본 뉴욕 패션계가 눈도장 찍은 다음 주자는 조셉 알투자라(1984)다. 마크 제이콥스, 프로엔자 스쿨러에서 인턴을 하다가 리카르도 티시의 눈에 띄어 지방시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한 경력을 갖고 있는데, 자신의 라벨을 론칭한 지 1년 반 만에 패션계가 가장 주목하는 이름으로 떠올랐다. 섹시한 디테일은 톰 포드를, 묵직한 고딕풍 무드는 리카르도 티시를 연상시킨다는 평가는 다소 캐주얼하게 포지셔닝한 알렉산더 왕의 대척점에서 ‘뉴욕 신인’의 무게중심을 잡아줄 것으로 예상된다. 제이슨 우(1982)와 프라발 구룽(1980)은 같은 동양계이자 인맥활용을 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제이슨 우가 퍼스트 레이디 미셸 오바마와 이자벨 톨레도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네팔 출신의 프라발 구룽은 파슨스 재학 당시부터 뉴욕 패션계의 대모인 도나 카란의 지원을 받아왔으며, 어린 나이에 빌 블라스의 디자인 디렉터를 5년간 역임하면서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같은 셀럽과의 유대감도 돈독히 할 수 있었다. 이들보다는 좀 더 이르게 데뷔했지만 부유한 집안의 도련님으로 태어나 자연스럽게 사교계의 명사를 고객으로 둘 수 있었던 황태자 잭 포슨(1980) 역시 든든한 인맥으로 패션계의 중심에 빠르게 입성할 수 있었다. 한 시즌 정도는 더 지켜 봐야 한다는 이유로 지난 의 컬렉션 부록에 안타깝게 탈락되긴 했지만, 크리스 벤츠(1982), 에린 페더스톤(1981), 베나 카바소피 부하이리사 메이옥(1982), 브라이언 레이어스(1980), 제레미 랭(1980) 등은 분명히 앞으로의 행보를 즐겁게 지켜볼 만한 재능을 가진 디자이너들이다. 이들만큼 거론되진 않지만 조셉 알투자라처럼 한두 시즌 후에 빠르게 이름이 알려질 것으로 예상되는 디자이너는 (밑줄 치시라!) 바로 톰 포드 출신의 웨스 고든(1984)이다. 단 한 번의 프레젠테이션으로 ‘펀(Fun)한톰 포드’라는 찬사를 얻었다. 반면, 빅토리아 베컴의 후원을 등에 업은 <프로젝트 런웨이> 출신의 크리스찬 시리아노(1985), 레이디 가가와 리한나가 입어 화제가 된 라쿠안 스미스(1989)는 옷 만드는 실력보다는 ‘연예인하고 친한 데다가 나이도 어려요’를 지나치게 강조해서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다. 유명세의 조건이라면, 더 로(The Row)로 모던한 디자인을 어필하고 있는 올슨 자매(1986)가 훨씬 앞서 있는 상태다. 유럽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젊은 신인이 안착하기에는 다소 힘든 환경이지만 그래도 주목할 만한 인물이 몇 있다. 먼저 모던한 선과 면을 주로 내세우는 파리의 다미르 도마(1980)가 있다. 크리스 반 아셰나 니콜라스 안드레아 타랄리스가 에디 슬리먼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다 독립했을 때 큰 주목을 받았듯이 다미르 도마 역시 라프 시몬스의 어시스턴트 출신으로 덕을 보고 있는 케이스인데, 사실 옷 자체는 라프 시몬스보다 좀 더 힘이 있고 굵직한 편이다. 이번 시즌부터 엘리 키시모토의 뒤를 이어 까샤렐 디렉터가 된 벨기에 출신의 세드릭 샤를리에(1980)는 알버 엘바즈의 눈에 띄어 6년간 랑방에서 일한 바 있다. 런던의 마크 패스트(1980)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기용하여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고, 자신의 이름을 이용해 실용적인 가격대의 라인 ‘패스터(Faster)’를 만들어 대중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등 영리한 전략으로 하이패션계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80년대생 디자이너들의 행보를 재미나게 지켜볼 수 있는 최대의 관전 포인트는 이들이 제2의 매퀸, 갈리아노, 슬리먼이 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다. 될성부른 떡잎 시절부터 진가를 인정받아 하우스에 안착한 70년대생 게스키에르(발렌시아가), 티시(지방시) 등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2~3시즌만 히트를 치면 LVMH를 비롯한 공룡 기업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진다. 가레스 퓨, (이미 베르스수가 선점하긴 했지만) 크리스토퍼 케인, 조셉 알투자라, 알렉산더 왕 역시 같은 순서를 밟고 있는 중이다. 그야말로 젊음의 상종가 시대다. 하지만 30대 중반이 되고, 40대에 들어선다고 해서 이들이 패션을 그만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안나 윈투어는 지나치게 어려지고 있는 뉴욕 패션계를 걱정하면서 “요즘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시작하기에는 참 쉬운 때다. 재능은 분명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재능만큼이나 대중이 원하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적어도 10년은 패턴, 재봉, 장식 기술을 연마해야 하고 망하지 않으려면 이를 악물고 비즈니스를 배워야 한다”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재능과 젊음은 패션의 충분조건 정도일 뿐 결코 필요조건이 될 수 없고, 이들의 패션게임을 관전하는 것이 재밌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무리수를 요구해서도 안 될 것이다. 칠순이 넘어서도 여전히 젊은 여성들이 입고 싶은 옷을 만드는 칼 라거펠트, 랄프 로렌, 소니아 리키엘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기에, 우리도 ‘같이 늙어가는’디자이너 몇쯤은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일확천금, 하룻밤 스타를 꿈꾸는 젊은 디자이너들은 다음과 같은 안나 윈투어의 촌철살인을 마음에 새겨두길 권한다. “당신이 마크 제이콥스가 아니라면,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