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래티패션(Pratifashion)이라는 신조어는 최근 가장 큰 트렌드인 실용주의 패션을 의미한다. 불경기와 미니멀리즘의 도래, 그리고 현대적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삼박자가 만들어낸 프래티패션이 조용히, 하지만 상당한 파급력을 지닌 채 우리에게 친근한 라인과 아이템을 선보이고 있다.

쇼피스를 입으면 참 기분이 좋았다. 마치 디자이너의 창조적인 정기를 받는 것 같기도 하고, 한 땀 한 땀 공들인 디자이너의 터치가 느껴져 디자이너와 교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옷이 아니라 작품을 입는 듯한 생각에 우쭐한(?)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부쩍 어른들을 만나는 자리가 많았던 나는 내 옷장안에 그런 자리에 어울릴 만한 제대로 된 옷이 하나도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내 월급을 모조리 옷에 투자(?)했건만 나는 클래식한 재킷도 평범한 H라인 스커트도 앞코가 막힌 클래식한 7.5cm 펌프스 하나조차 없었다. 대신 방 안엔 파워 숄더 재킷과 롱스커트, 글래디에이터 슈즈가 나뒹굴고 있었다. 내 방을 가득 채운 옷과 슈즈 그리고 백은 나의 전 재산이었건만 정말 중요한 순간엔 필요치 않은 것뿐이었다. 불현듯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옷장 속 컬렉션은 하나부터 열까지 재정비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것은 나만의 자각이 아니었다. 건축주의, 쿠튀리즘이 유행한 지난 몇 년간 여자들의 옷장을 채운 기이하고 과장된 옷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오래 힘을 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우리 여자들은 다시금 ‘실용주의’ 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자들의 갈망과 전 세계적인 불황에 패션계는 창의성과 매출의 최적점인 ‘실용주의 패션(Pratifashion)’ 이라는 진부하지만 확실한 카드를 제시했다. 런웨이는 워드로브를 재정비하기 위한 최고의 제품 프레젠테이션이 되어주었다. 컴백한 셀린의 피비 파일로를 필두로 스텔라 매카트니, 그리고 클로에의 한나 맥기본 역시 실용주의적인 의상을 선보였다. 스텔라 매카트니는“ 나는 나의 고객들에게 심플한 옷을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라며 실용주의 패션을 찬양했다. 아름답지만 지나치게 구조적이고 딱딱한 옷을 선보이던 질 샌더와 캘빈 클라인도 한결 편안해진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는 평소 스펙터클한 의상만 선보이던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였다. 루이 비통의 마크 제이콥스도 모여라 꿈동산 같은 빅 헤어만 빼면 아주 웨어러블한 룩을 선보였고, 발렌시아가 역시 주특기인 2050년의 터미네이터 룩은 잊은 채 ‘체조’ 라는 주제로 힙한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입을 만한 의상을 선보였다. 레더 하우스인 로에베는 소재가 갖고 있는 약점까지 극복한 의상으로 어필했다. 가죽을 가지고 하늘하늘한 레이스 스크린 기법처럼 보이는 드레스를 만들고 투명한 니트 웨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 실용주의와 함께 킬힐 역시 키튼 힐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모든 프로포션이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실용주의 트렌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실용성에 기반을 둔 새로운 라인과 아이템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실용성에 럭셔리한 코드를 가미한 이브 생 로랑의‘ 에디션 24’을 들 수 있다. 이브 생 로랑의 스테파노 필라티는 간신히 비행기에 올라타 시간대를 넘나들며 여행하는 고객들을 위해 주름이 잡히지 않는 소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아이템과 쉽게 레이어드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컬렉션을 디자인한 것. 다른 지역에서도 완벽한 우아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말이다. 모든 룩이 비행기뿐만 아니라 회의실과 주말의 여가 생활까지, 그리고 낮부터 밤까지 24시간 동안 시공간을 초월한 아름다움과 편안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에디션 24’는 처음에는 하나의 캡슐 컬렉션처럼 시작했으나 반응이 좋아 이번 시즌 세 번째 ‘에디션 24’ 컬렉션 라인을 선보인 상태. 첫 번째 컬렉션은 완전히 여행을 주제로 여행 가방까지 풀 세트로 구성됐으나 두 번째 컬렉션부터는 여행보다는 24시간 입을 수 있는실용적인 룩에 더 초점을 맞춘 듯 보였다. 또 샤넬은 액세서리를 구입하다가 런웨이 의상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는 이들에게 편안하게 제안할 수 있는 룩을 선보였다. 즉 공방의 터치들로 가득한,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샤넬의 컬렉션 중 가장 아이코닉하면서도 디테일을 배제해 입기 쉽고 스타일링이 용이하며 보다 합리적인 가격의 룩들을 끼워넣기로 한 것. 칼 라거펠트는 이를 ‘에센셜 룩’ 이라 이름 붙였다. 첫 시즌인 이번에는 6개 룩을 선보였으며 앞으로도 ‘에센셜 라인’ 은 매 컬렉션마다 계속될 예정. 물론 6개 룩 중엔 일부 아이템만 에센셜 라인인 것도 있다. 이‘ 에센셜 룩’은 이름부터가 소비자로부터 정말 사야 할 것만 같은 소비욕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마케팅 전략이다. 머리끝부터 샤넬로 차려 입은 티를 덜 내고 싶어 하는 고객을 위해 믹스하기 쉬운 베이식 아이템을 선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낮은 가격이야말로 최강점이다. 예를 들어 재킷 같은 것은 2/3~ 1/2 가격이니 쇼피스이면서 타임리스하고 가격까지 합리적으로 제안해 소비자들을 유혹하는 것. 디올 옴므 역시 이와 같은 의미에서 ‘10 클래식’ 라인을 탄생시켰다. 10 클래식은 진, 턱시도, 가죽, 트렌치코트, 피케 셔츠, 풋웨어, 셔츠, 클래식 수트, 스니커, 백 라인으로 구성되는데 모두 디올 옴므의 타임리스 코드를 농축시켜 만든 것. 아직까지는 턱시도, 가죽, 트렌치, 피케 셔츠만 선보인 상태이고 나머지는 오는 4월 선보일 예정이라고.

또 지미 추의 설립자인 타마라 멜론이 디렉팅해 선보인 ‘추 24:7’ 컬렉션은 마치 7일/24시간이라는 편의점 광고를 연상시킨다. 이 컬렉션은 ‘아이콘’, ‘완벽한 플랫폼’, ‘완벽한 포인트 토 펌프’, ‘완벽한 라운드 토 펌프’, ‘완벽한 플랫’, ‘완벽한 웨지’, 그리고 ‘완벽한 이브닝’으로 구성되며 7일/24시간 내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슈즈들이다. 클래식하면서도 트렌드에 뒤지지 않으며 편안하기까지 한 이 슈즈들은 신발장 안에 구비해두면 아주 든든한 아이템들이다. 또 최근 디자이너들과 컬래버레이션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는 10 꼬르소 꼬모 역시 디자이너 송자인과 실용주의 패션에 걸맞은 라인을 선보였다. 바로 ‘10 에센셜스 by 자인 송’으로 패션에 관심 있는 여성이라면 옷장 속에 하나씩은 갖추고 있어야 할 테일러드 재킷, 저지 티셔츠, 레깅스 등으로 구성된 10가지 기본 아이템을 송자인의 독특한 감성으로 만들어냈다“. 한국 여성이 가장 원하는 의상에 착안해 쉽게 입을 수 있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스타일로 선보였다” 는 송자인의 설명. 티셔츠나 톱은 20만원대, 레깅스와 팬츠는 10만~30만원대로 비교적 저렴한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이 밖에 실용주의적인 아이템도 많이 등장했는데 ‘이지 테일러링’을 주제로 컬렉션을 펼친 도나 카란의‘ 인피니티 드레스’를 꼽을 수 있다. ‘인피니티 드레스’ 는 하나의 옷으로 여러 벌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드레스로 기내에서 활동하기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며 여행지에서 이브닝 웨어로도 입을 수도 있는 드레스다. 특히 부피나 무게, 관리상의 부담이 최소화된 소재를 사용해 특별한 노력 없이 스타일과 드레시함을 연출할 수 있다. 또 새롭게 선보인 엘드리지 백 역시 드레스와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스트랩과 단추를 이용해 4단 변신이 가능하다. 드레스 혹은 록 스타일 진과도 매치할 수 있는 신선한 백. 또 쿠튀르 드레스를 선보이던 발렌티노 역시 피에르 파올로 피치올리와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맡으면서 훨씬 더 가볍고 웨어러블해지며 보다 저렴한 저지 소재의‘ 쿠튀르 티셔츠’를 선보였다.

실용성으로 무장해 등장한 라인 혹은 아이템의 공통점은 바로 아이코닉하고 타임리스한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웨어러블하고 용이한 스타일링과 믹스 매치가 가능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착한 가격을 자랑한다는 점. 이렇듯 적은 수의 옷으로 자신의 개성을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활동적이고 실용적인 이 의상들은 지금 이 시대 여성들을 위한 완벽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