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있는 건 한길 물속뿐이다. 사람 속도 모르고, 건물 안은 변했다. 기존의 용도를 잃은 채 덩치 큰 폐기물 취급을 받던 공간들이 전시장, 그리고 아트 팩토리로 부활하고 있다. 마술 같은 미술 덕분이다.

한때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는 볼드모트 같은 이름이었다. 실체를 시원히 드러내보인 적이 없었으며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겐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어쩌면 해리 포터의 투명 망토가 소격동에 드리워져 있었던 걸까? 숱하게 걸었던 길이지만 회색으로 낡아가던 구식 건물은 눈여겨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투명 망토가 벗겨졌고 볼드모트는 갑작스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는 아니고 옛 기무사 건물이 일반 시민들에게 내부를 전면 개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2009년 1월, 해당 부지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활용하는 안이 결정된 것.한국에서 가장 비밀스럽던 곳 중 하나가 공공 문화시설로 변신하는 셈이다. 지난 9월에 열린 예술 축제 <플랫폼 인 기무사>는 이 장소를 활용한 첫 번째 전시였다. 국내외 작가 1백여 명의 작품이 미로 같은 건물 안으로 기습했다.

그 다음을 이은 게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 <신호탄>이다. 영문 제목 ‘Beginning of New Era’는 이 신호탄이 알리려는 바가 무엇인지 부연해준다. 작가들은 미술관의 기존 소장품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거나 ‘( 미술관 프로젝트’), 이사연많은건물의 일부를 멋대로 변형시키거나 ‘(공간 변형 프로젝트’), 혹은 공간의 역사에 관해 탐색하는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다큐멘터리 프로젝트’). 직접 소격동으로 향한 건전시 종료를 며칠 앞둔 12월 초였다. 좋은 전시였지만 솔직히 작품보다 전시 공간을구경하는 쪽이 더 즐거웠다. 내부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빈집처럼 스산했다. 지하복도를 따라 일렬로 늘어선 골방들이라든지,‘조사중’, 혹은‘통제구역’등등의 안내 문구와 마주칠 때면 문득문득 이 장소의 과거가 만져졌다. 어제의 기억과 현재의 예술이 뒤섞이는 풍경은 기이하면서도 압도적이었다.

최근 들어 기존 공간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재활용하는 사례가 부쩍 자주 목격된다. 미술이 그 주체가 되는 경우가 월등히 많다. 실용적 가치를 잃어가던 건물이 예술계의 수혈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다. 기무사 터로부터 멀지 않은 통의동에는 보안여관이란 이름의 여관 아닌 여관이 있다. 일제 강점기, 미당 서정주가 기거하며 김동리, 오장환 등과 함께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을 펴낸 게 바로 이 적산가옥이다. 해방 뒤에도 건물과 문인들의 인연은 이어졌다. 지방 출신 소설가나 시인들이 장기 투숙하며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2006년, 폐업과 함께 건물이 철거 위기에 몰리자 그 역사가 고스란히 사장되지 않도록 일맥문화재단이 나섰다. 낡은 여관을 인수해 복합문화공간으로 삼은 것이다. 올해부터는 <揮景 : 휘경, 사라지는 풍경>을 비롯, 전시기획을 부쩍 늘렸다. 이 구식 건물 안에 직접 머무르는 건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다. 여관이란 공간에 깃든 내밀함, 그리고 쇠락한 건물 특유의 애잔함 같은 것들이 머무르는 사람들을 천천히 감염시킨다.

그런데 진짜 극적인 용도 변경 사례는 경기도 양평에 있다. 문화소외 지역을 중심으로 예술 운동을 펼쳐온 할아텍(Hal Art & Technology)은 최근이 지역소머리국밥집을 갤러리로 재단장했다. 홈페이지(halartec.com/halane/sobab)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이곳은 소머리국밥식당을 5년간 운영하던 곳으로 건물주의 예술에 대한 관심에 힘입어 할아텍과 후원인들이 뜻을 모아 만들었습니다.” 환경 보호의지가 남다른 단체인 만큼 간판 역시 기존의 것을 재활용, 맨 앞에‘갤러리’ 글자만 더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곳의 이름은 갤러리소머리국밥이 됐다는 전설이다. 파격이라고? 애 이름을 애플이라고 짓는 할리우드 커플도 있는데 이 정도쯤이야. 그래도 개소주나 닭똥집 파는 자리였다면 좀 더 곤란했을 것 같단 생각은 든다.

여관이나 소머리국밥집뿐만이 아니다. 요즘엔 보건소에서도 미술과 만날 수 있다. 경기도미술관의 한뼘갤러리는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오고 가는 공간에 예술을 이식하는, 일종의 게릴라성 공공미술 프로젝트다. 중앙역, 안산역, 경기창작센터 등에 이어 얼마 전 안산시의 단원보건소가 네 번째 목표물로 지목됐다. 젊은 작가 박미나, 사사(sasa [44]), 슬기와 민 등으로 구성된 미술 프로젝트 그룹 SMSM이 용병으로 나선 이번 설치의 주제는‘건강과 색채’다. 긍정적 에너지를 유발하고 휴식 효과를 주는 색채들을 선별, 그 스펙트럼을 메인 로비나 영유아접종실 같은 기존 공간에 배치한 작업이다. 색을 질병 치료의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는 색채요법에서 결정적 힌트를 얻었다. 존재감을 뚜렷하게 과시하는 작품은 아니다. 그래서 눈썰미가 부족한 사람들은 이게 아티스트의 손을 거친 건지, 그냥 소장님께서 페인트칠을 새로 하신 건지 모른 채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슬그머니 끼어들어 세상을 한 뼘씩 변화시키는 예술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2010년엔 서울 종암동의 성북보건소가 치유 예술 테마의 아트 팩토리로 거듭날 예정이다.

요즘 서울시는 창작공간 조성사업에 힘을 쏟고 있고 성북보건소 프로젝트 역시 그 일환으로 추진되는중이다. 여기서 말하는 창작공간이란 예술가의 작품 활동과 시민들의 문화 체험이동 시에 이루어지고 어우러지는 장소, 정도의 뜻일 거다. 아무튼 이 프로젝트가 집터로 우선 고려하는 건 원래의 기능을 잃은 유휴시설들이다. 남산예술센터는 구 드라마센터 빌딩에 새롭게 자리를 틀었다. 두 개 동이 통폐합되면서 빈 건물이 된 동사무소건물은 결국 서교예술실험센터가 됐다. 지난 10월 열흘 간격으로 문을 연 금천예술공장과 신당창작아케이드는 각각 폐업한 인쇄공장과 황학동 중앙시장 내의 지하상가를 택했다. 금천예술공장의 경우, 국내외 예술가가 교류하며 비전을 나눌 수 있는 일종의 국제 레지던 시를 지향한다. 국적뿐 아니라 작업의 종류에 대한 제한도 느슨해서 시각예술, 설치 및 영상, 공연, 이론, 비평, 과학, 인문학 등등을 모두 수렴할 정도다. 아울러 예술과 산업이 끈적한 관계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중매한다는 것도 이곳의 특징. 대표적인 예가 실용적 기능과 심미적 디자인 모두를 충족시키는 로봇 제작이 목표인 아트로봇 프로젝트다. 가산디지털 단지의 IT업체들이 입주 작가들과 일종의 파트너십을 맺고 이것저것 일을 벌이는 중이다. 리모델링 과정을 거쳤기 때문인지 인쇄공장이었던 과거는 이 건물에서 그리 뚜렷하게 읽히지 않는다. 창고동 지붕에 우뚝 서 있는 6.5m 높이의 아트로봇 설치 작품이 지금은 이곳의 문패 노릇을 한다.

신당창작아케이드는 좀 다르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가게들이 일렬로 늘어선 지하상가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니까 상인들이 떠난 점포-상가의 절반 이상이 휴업 상태였다-를 작가들이 대신 채우게 된 정도의 변화다. 방문객들은 쇼핑하듯 통로를 거닐며 제작중인작품 및 그 작업과정을 엿볼수 있다. 공예와 생활디자인 분야에 집중하는 창작공간이라는 점도이곳만의 특징일 것이다. 입주 작가들은 지상의 중앙시장 허공위에 한지 등공예를 설치하거나 건물 계단이며 기둥을 캔버스처럼 활용하고, 혹은 상가 횟집을 알록달록하게 바꾸어놓기도 한다. 생활과 예술은 자연스럽게 한 풍경 안에 섞여든다.

미술이 부동산계의 틈새 소비자로 나서게된데 뭔가 엄청난 음모와 비밀, 외계인, 프리메이슨,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하고 있는 건 아니다. 대신 굉장히 잘 보이는 손들이 좀 힘을 썼다. 예를들면 서울시나 문화체육관광부의 경우처럼. 앞서 말했다시피 신혼집 골라 주려는 시어머니 모드로 작가들의 아틀리에를 물색한게 바로 서울시다. 옛 기무사 건물을 전시장(궁극적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재활용한다는 마스터플랜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아이디어였다. 군수공장지대를 개조한 중국 다산쯔의798 예술 특구, 은행 건물을 재활용한 일본 요코하마의 뱅크아트 1929 같은 성공 사례가 자극을 줬을 것이다. 국가 주도의 문화 사업이 뭔가 큰 물줄기에 해당한다면, 민간의 자연발생적인 시도들은 개울에 가깝다. 요즘은 그 크고 작은 물길들이 이리저리 교차하며 가물었던 곳곳을 두루 적시는 때다. 그 풍경이 아직까진 꽤 괜찮아 보인다. 죽어가던 공간마저 되살려놓다니, 예술은 얼마나 영검한 생명수인지. 무안단물로 바닥을 닦고 허경영을 세 번 외친다 한들 이만한 변화가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