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나온 숱한 밤의 술자리들이 좀 더 건강하고 즐거웠을 텐데.

꽤 오래전, 우린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인터뷰요청을 넣으며 알은체를 한다거나 편하게 굴기란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 기억 속의 그녀는 지금의 모습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아마 대학 재학 중의 농촌 봉사 활동 때였을 거다. 마을 어르신들과 논두렁에 둘러앉아 새참을 펼치고 나면, 찌그러진 주전자 차림의 그녀가 슬그머니 주둥이를 내밀곤 했다. 그때도 뽀얗고 예쁘장하긴 했다.아낙들의 어깨춤을 부추길 정도로 붙임성이 좋고, 스스럼없이 야한 농담을 던질 만큼 넉살도 만만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은근히 뒤끝이 있어서 떠날 때는 종종 우지끈한 숙취를 남겼다. 날 속물이라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다. 잠깐씩은 재미있는 말동무였지만 막걸리와 함께 분위기 있는 저녁 식사를 즐기거나 근사한 바에 가는 일 따위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소주처럼 화끈하게 귀엽거나 맥주처럼 부담 없고 세련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울로 되돌아왔을 즈음 난 이미 그녀를 잊었다.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뒤, 주변 사람들로부터 우연히 막걸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뜻밖에도 술 문화의가장 트렌디한 아이콘으로 그녀가 부쩍 주목받고 있다는내용이었다. 방송3사가 앞다투어 제작한 막걸리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자니 그 새삼스러운 유명세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취향 까다로운 패션계 종사자들마저 그네들의 청담동 사랑방인 무이무이의 테라스 포차 혹은 미스박에 둘러앉아 막걸리와 시간을 보낸다고했다. 조만간 서울 컬렉션의 프런트로에 초대된다 한들 놀랍지 않을 지경이다. 급기야 내게 그녀와의 인터뷰 기사가배당됐다.

“홍대 앞 어떠세요? 요즘 제가 다니는 바가 몇 군데 있는데.”인터뷰이가 제안한 장소는 친친 시즌2였다. 원래는 와인을 곁들인 퓨전 일식 레스토랑으로 유명했지만, 요즘의 흐름에 부응해 그 성격을 막걸리 주점으로 바꾼 곳이다(시즌2라는 설명이 붙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캐주얼한 와인바에 가까운 인테리어를 둘러보며 십몇 년 전의 논두렁을 아득하게 떠올렸다. 먼저 도착해 있던 MBC 팀과의 촬영을 마친 뒤에야 막걸리는 비로소 내게 시간을 내주었다. 날씬한 유리병 차림에 탁한 흙빛의 술잔을 매치했는데, 양은 주전자 시절과 비교하면 변신의 강도가 거의 시드니 셀던풍으로 극적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자 뭐든 말을 붙이기로 했다.“어, 최근에는 이탈리아에서 슬로푸드 운동을 주도한 셰프 주세페 바로네와 함께 작업을 하셨죠? 외국인 요리사와 한국 전통주의 만남이 퍽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네, 주세페 막걸리 누보란 제품이었죠. 한때 보졸레 누보가 상당히 인기였잖아요? 거기서햅쌀로 빚는 누보 막걸리의 아이디어를 빌려온 거예요. 셰프 주세페 외에도 열 곳이 넘는 유명 막걸리 도가들이 참여했죠. 농림수산부의 지원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주세페 막걸리 누보를 한 잔 기울여본다. 도수가 8도정도라지만 넘김이 깔끔해 한 병쯤은 훌훌 비울 수 있을 것 같다. 오징어 튀김이나 회무침 등 다양한 메뉴와 도 무리 없이 어우러지는 느낌이었다. 막걸리는“셰프 주세페와 갈라디너를 하며 알게 됐는데, 리조토나 이탈리아식 굴 볶음과도 팀워크가 잘 맞더라고요”라며 국적에 구애받지 않는 자신의 사교성을 은근히 과시했다.

인근에 더 막걸리란 이름의 또 다른 바가 있다 해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본래 와인바였던 장소지만 친친과 마찬가지 이유로 1층의 콘셉트를 재정비했다. 딱히 공교롭다고할 것도 없다. 와인이나 사케가 있던 진열대에 막걸리를들여놓는 가게들이 이젠 일일이 꼽기 귀찮을 정도로 많아졌으니까. 촛불이 그윽하게 타고 있던 더 막걸리 안쪽에자리를 잡은 뒤, <식객>의 허영만 화백이 극찬했다는 덕산막걸리를 맛보았다. 테이블을 하나씩 차지한 사람들에겐덕산, 산성, 배혜정 같은 막걸리 도가의 이름이 이제 와 인종류 이상으로 익숙한 듯했다. 인터뷰이에게 비교적 최근 문을 연 장소들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청했다.“학동사거리의 방공호에 종종 들러요. 프라이빗 클럽, 퓨전 포차 등이한데 어울려 있는 멀티 스페이스라LED 스크린이 번쩍번쩍하고… 아무튼 분위기가 좀 색다르죠. 아직까지는 사케쪽에 치중하는 편이지만 절 찾는 분들이 꽤 많은지라 점차상황이 바뀔지도 모르겠어요. 압구정 젠하이드어웨이 옆에 자리한 달빛술담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 과일 막걸리라든지, 에스프레소 막걸리 같은 칵테일류가 괴상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이곳의 유자 막걸리엔 썩 괜찮은 점수를 주시더군요.”

확실히 요즘 눈에 띄는 막걸리 바들은, 지금껏 소비자들이 품었던 고정관념-이를테면 논두렁, 양은주전자, 관광버스춤 같은 것-을 뒤엎는 고급화 전략에 치중하는 눈치다. 좀 민감한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요즘의 행보는 와인이나 샴페인의 성공 사례를 거의 표절하고 있는 듯 보인다는 요지였다. 도발하려는 의도였지만 막걸리의 태도는 꽤 선선했다.“글쎄요, 하지만 전 여전히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도 마다하지 않고 시큼한 홍어 삼합과도 편하게 어울려요. 그러니까, 서양 술의 아류가 되려는 건 아니거든요. 그저 샴페인이나 와인이 놓이는 자리라면 나라고 못 갈 이유는 없다는 이야길 하고 싶었던 거죠.” 수긍할 수밖에 없는 답이었다.‘서로 다른 두 가지 매력을 겸비했다니, 내가 바로 청순 글래머?’하는 자화자찬은 대충 못들은 척했지만.

어느덧 대화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새콤하고 고소하다며 넙죽넙죽 받아 마셨으니 당연히 만만찮은 취기가 돌았지만 입안이 전처럼 텁텁하진 않다.“요즘은 첨가물 없이, 다들 제대로 공정을 지켜 만드니까요. 예전 같은 숙취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역시, 날 기억하고 있었구나. 십수년 전 그녀를 대수롭잖게 여겼던 일이 문득 후회됐다.그리고 앞으론 분위기 있는 저녁 식사든, 근사한 바든 자주자리를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에게 이미 내호감 같은 건 특별한 의미가 아닐 터였다. 이젠 막걸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도 흔해졌으니까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