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촬영장에서 훔쳐본 천정명의 일상은, 자신이 연기하는 극중 인물의 상황과도 닮아 있었다. 기이한 숲에 발이 묶인 주인공처럼 그 또한 빈틈없이 이어지는 촬영 스케줄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배우는, 손발의 자유를 빼앗긴 지금의 구속 상태를 편안하게 즐기는 듯 했다. 그가 바라고 또 택한 자리에 서 있는 까닭이다.

천정명은 오전 내내 나무벽에 어깨를 짓찧고 있었다. 부산 종합촬영소에 마련된 영화 <헨젤과 그레텔>세트장 안은, 건물 밖 한기가 그대로 스며든 것처럼 살에 닿는 공기가 차가웠다. 하지만 배우는 단지 푸른색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카메라가 설치된 달리(dolly) 위에 올라선다. 감독의 지시가 떨어지자 바퀴가 레일 위를 구르기 시작했다. 천정명이‘어어!’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반대편 벽까지 밀려가 세게 몸을 부딪히고 만다. 연기 탓에 부러 표정을 찡그린 것도 있겠지만, 계속해서 같은 동작을 되풀이한 만큼 얇은 셔츠 아래 어깨가 실제로 꽤 욱신거렸을 테다.어떤 내용을 촬영하는 건가 싶어 스태프들의 어깨 너머로 모니터를 훔쳐봤다. 영화 속 주인공이 천장 위 다락을 살피던중, 그만 균형을 잃고 의자 위에서 떨어지는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배우가 바닥에 수직으로 던져지는 순간을 카메라가 내려보며 찍은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실상은 달리 위에서 수평으로 이동하는 배우를 정면 촬영한뒤그 필름을 부감 샷처럼 활용하는 식이었다. 단 한번의 아찔함만 감수하면 되는 극중 인물과 다르게, 촬영장의 배우는 팔을 한껏 휘젓고 비명을 크게 질러보기도 하는등 수십 가지 방법으로 수십 회의 테이크를 반복했다. 현장의 풍경은, 극장의 스크린만 지켜봐서는 알 수 없을 비밀들을 그렇게 드러내보였다. 관객이 눈 한 번 깜짝하다 놓쳐버릴지 모를 몇 초간의장면을 위해, 제작진은 몇시간 동안 분주하게 움직이며 고민한다. 배우는 몸짓 하나, 눈빛 하나를 허투루 흘릴수 없다. 모니터 앞에 앉은 임필성 감독이 무전기에 대고 묻는다. “정명군, 어깨 괜찮아?” 화면 안의 천정명이 문제 없다는듯, 입술 끝을 살짝 치켜 웃었다. 달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헨젤과 그레텔>은 임필성 감독의 두번째 장편 프로젝트다. 사고로 정신을 잃은 남자가 삼남매만 살고 있는 숲속의 외딴 집에서 깨어난다. 숲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매번 실패하고, 주인공은 집안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달라도, 시놉시스에서 짐작되는 은근하게 음침한 기운만은 같은 제목의 그림 형제 동화와 비슷하다. 작품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묻자 천정명은 “시나리오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임 감독님의 전작 <남극일기>를 인상 깊게 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출자에 대한 신뢰는 배우를 움직이게 한가장 중요한 힘인듯 보였다. 그렇다면 감독이 천정명을 주연으로 캐스팅한 까닭은 무엇일까. “극중, 유일하게 아이들과 교감하고 이들을 보호하려 애쓰는 역할이거든요. 제가 성인인데도 애들과 무리 없이 섞일 것 같아 보이셨대요.” 배우가 대신 전해준 답이다.

이제 스물여덟이 되었지만 과연 천정명에게는 청년보다 소년에 가까운 느낌이 있다. 유난히 선이 부드러운 이목구비 때문만은 아니다. 세상에 능숙하게 적응한 ‘어른’들이 종종 드러내는, 탁하고 기름진 느낌 같은게 그에게는 없다. 이 배우는 항상 감출 것 없는 맨 얼굴처럼 보인다.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미리 계산하고 짐짓 표정을 만드는 이들과 달리 그는 웃어도, 또 울어도 자신에게 솔직하다. 유난스럽지 않고 수줍게 드러내는 감정이 진짜같이 선명해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끈다. 카메라 앞을 떠나 스태프 틈에 섞이고, 자신의 촬영분을 확인하는 천정명은 소리를 크게 내어 웃지는 않았지만 내내 입가에 그 진짜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잔뜩 비밀을 품고 숲속에 고립되어 지내는 아이들이라도 이렇게 웃는 상대에게는 속을 열어 보일수 있겠구나 싶다. 거의 혼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야 하는 작품인 데다 아직 현장 분위기에 적응해야 할 촬영 초반인 탓에 배우의 신경에도 날이 서있지 않을까지레 염려한건 기우였다. 신중하게 흘러가는 영화 촬영장의 시간을, 천정명은 충분히 즐기고 있는것 같았다.

“드라마 찍을 때는 많이 힘들었어요. 3개월을 내리 찍으면서도 늘 스케줄에 쫓겼거든요. 심할 경우, 하루에 30분씩 자면서 간신히 버텨야 했죠.” 몸을 무겁게 하는 피로보다 배우를 더 지치게 만든 건, 스스로 최선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이었을지 모른다. <굿바이 솔로>처럼 4~5 회 대본이 미리 연기자들에게 주어져서, 준비하고 촬영에 임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살인적일 정도로 급한 TV 제작 시스템이 배우가 영화에 대해 품고 있던 욕심을 더욱 키워놓은 셈이다. <헨젤과 그레텔>의 촬영은 부산, 제주도, 경주를 거친 뒤 다시 부산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짜여 있다. 내내 집을 떠나 지방으로 전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천정명은 “이미 그런 건 익숙하니 괜찮다”고 말할 뿐이다. 오히려 원하는 작품을 만나 차근차근 감정을 쌓아가며 연기할 수 있는 지금이 퍽 만족스러운 듯했다.

오후에는 아역 배우 은원재와의 촬영이 이어졌다. 둘은 드라마 <패션 70’s>에서한 인물을 연기한바 있다. 은원재가 천정명이 분한 극중 인물 빈의 아역이었던 것이다. 공교로운 인연 때문인지 서로 농을 치며 어울리는 모습이 유난히 살갑다. 하지만 어둡고 좁은 세트 안에 자리를 잡은 뒤에는 두배우 모두 얼른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다. 그러고감독의 슛사인과 함께 맡은 배역에 빠르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촬영장의 모든 이들은 숨소리마저 삼킨 채 연기자의 움직임과 대사에만 신경을 모은다. 잠시후, 다시 한번 컷. 사람들 간의 공기가 짧게나마 풀어지는 때다. 꾸준히 교차되는 긴장과 이완의 순간은 촬영장 안에서 일종의 리듬감마저 만들어내는 듯했다. 지금 천정명은 그리듬에 막 몸을 실은 참이다. 이제부터 몇달간, 어쩌면 힘겹도록 이어질 연주지만 앞으로 짚어야할 복잡한 감정의 음표들과 난해한 기교마저도 그는 즐겁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꽤보기 좋은 배우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