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관으로 보던 그 남자는 자신을 비추는 조명의 조도에 따라 에릭으로 불렸다가 문정혁이 되었다가, 했다. 그러나 그 네모진 틀 바깥의 그는 도리 없이 문정혁, 나흘 밤낮을 지새우고도 단단하게 성실한 젊은 남자, 매일 좀 더 넓어진 보폭으로 성장하고 있는 배우였다.

드라마 촬영장의 시간은 비현실적이다. 그곳에 몇시간이고 머물다 보면 고장난 타임머신, 혹은 찰나를 조각조각 편집해 몇번이고 복기하는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의 머릿속을 헤매는 심정이 된다. 같은 장면을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부터, 가까이서, 멀리서, 앞에서, 뒤에서, 그렇게 열번이고 스무 번이고 거듭 찍는다. 드라마에서는 몇 초안에 흘려보내는 차안에서의 두어 마디, 택시를 잡는 성급한 손짓, 에스컬레이터 앞에서의 실랑이 같은 것들이 밤이 새도록 고장난 테이프처럼 참을성 있게 반복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비현실적인 시간속에서 움직이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태도는 너무나 현실적으로 경건해서, 어느새 그 공간에 발을 들여놓은 모든이에게 그 희한한 시간의 정조가 스멀스멀 스며들고 만다. ‘태주’와‘혜린’이 차안에서 나누는 대화를 촬영하는 견인차가 잠수교를 뱅글뱅글 돌아 같은 코스를 네번째 반복했을 무렵, 지켜보는 이의 시간 감각은 이미 반포대교 저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태주’와 ‘혜린’에게는 딱한번 주고받고 말대화겠지만, 문정혁과 윤지혜는 그것을 벌써 1시간 이상 반복하고 있다. 새벽2시가 가까워진 시각, 자정부터 시작된 이날의 야외 촬영은 아무래도 날을 넘겨 내일 아침까지 계속될 모양이었다.

잠시 조명과 카메라 앵글을 체크할 동안, 문정혁은 촬영용 BMW에서 내려 담배를 한개비 문다.“어제 시작한 촬영이 오늘 점심때 끝났어요.”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웃는다. 피곤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대본을 들춰본다. 너무 여러번 들추어서 페이지 끝부분이 묶은 부분의 두배로 뚱뚱해진 대본을. 웃는다. 페트병에 담긴 생수를 한모금 마신다. 스태프에게 다가간다. 말을 건다. 웃는다. 조명을 유심히 쳐다본다. 농담을 한다. 또 웃는다. 카메라가 멈추었을 때의 그의 행동을 묘사하는 데에는 많은 단어가 필요 없다. 그저 단문이면 된다. 얇은 봄 재킷을 입고 겨울바람을 맞는 것, 경칩이 지났는데 시도 때도 없이 눈발이 날리는 것, 그래서 요 며칠 촬영 스케줄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 어제 잠을 자지 못한 것, 오늘도 잠을 자지 못할 것…. 드라마 촬영장에서는 밥먹듯 흔한 일이지만, 막상 겪으면 밥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회의하게 할 고충을, 그는 그렇게 단문으로 편히 대했다.“그래도 이번 드라마는 스케줄이 너그럽네요.” 후, 하고 그가 내뿜는 것이 담배 연기인지, 시린 입김인지 알 수 없었다.

<케세라 세라>는 캐스팅 전 단계부터 <내 이름은 김삼순2>로 불리며 소근소근 입소문을 탔다. <…김삼순>의 김윤철 감독의 작품인 탓에 산 오해였지만, 제작사인 초록뱀미디어는 전작과의 연결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건 대강의 줄거리만 읽어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솔메이트라느니, ‘단 한 사람을 위한 심장’이라느니 하는 소리에 촌스러워 죽겠다고 요란을 떨던 냉소적인‘요즘 애들’이, 독한 사랑에 머리부터 제대로 입수하는 이야기다. 그 촌스럽고 후진 사랑 앞에서 그들은 감히 ‘케세라 세라’를 외치지 못한다. 구질구질한 순정과 찬란한 성장통에 대한 연애담,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정교한 퍼즐을 조각조각 만드느라, 무대 위에서 ‘에릭’이었던 그는‘문정혁’으로 돌아와 ‘태주’가 되었다. 김윤철 감독도 문정혁을 직접 부를 때는 ‘정혁 씨’라고 부르고, 스태프들에게 동선을 지시할 때는 그를 가리켜 3인칭의 ‘태주’로 부른다. 그것은 모든 스태프들이 한결같았다. 다음 촬영 스케줄을 묻는 에디터에게 현장 스태프는 “태주가 내려달라고 하니까 혜린이가 그냥 차를 몰고 가버려요. 태주가 ‘에이, 가란다고 정말 가냐’라고 한마디하고 다리를 뛰어서 건너오는 장면이에요”라고, 꽤 진지하게 연기까지 해 보인다. 실은 그 장면을 준비하느라 예닐곱 명의 스태프가 진작부터 잠수교 남단 방향의 교통을 정리하는 중인데도,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정혁은 문정혁이 아니라 태주다.

순정 없이도 눈물 나게 추운밤. 잠수교 아래로 몰아치는 매서운 강바람은 그 찔끔 흘러나온 눈물조차 얼릴 기세다. 스태프들은 모두 방한복 차림에, 귀를 덮는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속에서 에릭, 아니 문정혁, 아니 태주는 홑겹 옷으로 칼바람을 맞아내면서도 춘삼월인 체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잠수교를 위로, 아래로, 달리고 또 달리는 동안 스웨이드 코트에 장갑까지 꼈는데도 추위를 견디지 못해 담요를 뒤집어쓴 에디터는 코를 훌쩍이며 신음했다. 조명 팀이 잠시 조명의 각도를 수정하는 동안, 코디네이터가 입혀준 패딩 점퍼를 어깨에만 걸친 문정혁이 그런 에디터를 딱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음날 저녁,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신세계 백화점이 유독5층에만 불을 밝혔다. 촬영 지점을 설정하고 리허설을 두어번 하고 나니 밤 10시가 훌쩍 넘었다. 끝나는 시간을 기약할수 없는 촬영이 이제부터, 오늘도, 시작되는 것이다. 카메라가 비추는 부분은 인파를 헤쳐야 에스컬레이터에 당도할수 있는 한낮의 백화점이었으나, 그 나머지 공간은 영혼이 떠난 육신처럼 멈추어 있었다. 감독의 큐사인이 떨어지자 꺼칠한 낯빛의 숨죽인 사람들이 마이크를 들고, 카메라를 잡고, 이어폰을 꽂은 휴대폰과 너덜너덜한 큐시트를 들고 신중한 걸음으로 움직였다. 물론 그들 사이에는 단문의 대수롭지 않은 호흡으로 태주의 감정을 명민하게 조였다 놓을 줄 아는, 문정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