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선 분주함과 치열함, 고단함과 경건함, 사람의 밥벌이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감상이 오간다. 아니, 감상 같은 건 사치다. 혹독한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만난 것은 여배우이지만 스타는 아니었고, 주인공이되 묵묵히 큰 그림의 부속이 되어 움직이는 겸허한 한 사람의 스태프였다.

잠을 못자고, 밥도 못먹고, 폭신한 데다 맘놓고 엉덩이를 묻을 수도 없다. 새벽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차례가올 때를 기다리고, OK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정해진 동작을 되풀이한다. 이건 하루벌이 막노동꾼이 아니라 여배우의 일상에 대한 묘사다. 잠시라도 쉴틈이나면 누군가가 달려와 부지런히 얼굴에 분칠하고 매만져준다는 점만은 막노동꾼과 다르지만. 짧으면 석달, 길면 대여섯 달까지 묶여 지내야 하는 드라마 촬영 기간 동안 배우는, 마치 폴로 리그를 치르는 말처럼 매섭게 통제되고 살뜰하게 착취당하게 마련이다. 주말에 <사랑에 미치다> 첫 방영을 앞두고 있는 이미연도 역시나 잠을 못자고, 밥도 못먹고, 어디 따뜻한 데다 엉덩이를 내려놓지도 못한 채 촬영 중이었다. 그날 아침의 체감기온은 영하 20도라고 했고,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내려가는 사이에 흐물대며 떠오른 묽은 해는 맥을 못추고 있었다.8시의 청주공항, 활주로에 덩그러니 놓인 비행기 주변으로 모여든 스태프들은 하나같이 등이 굽었다. 아스팔트에서 정강이를 타고 올라온2월의 찬 공기가 움츠린 어깨에 묵직하게 걸터앉은 탓이다. 그 살풍경이 눈에 익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코끼리 1백마리가 사방을 둘러싸고 내지르는 듯한 괴성에 폐까지 먹먹해진다. 촬영지인 활주로옆 공군 기지에서 전투기가 뜨고 내리며 흐름을 똑똑 끊어놓는 것이다. 5분 간격으로 스태프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소리 나는 하늘을 보고 잠시 묵념하듯 멈춰 서 있다. 간간이 욕이 섞인 묵념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추위나 소음이 여배우에게라고 특별히 비껴갈 리도 없건만 이미연은 현장의 누구와도 달리 쾌활했다. 그가 각별히 역동적인 표정을 가진 배우라는건화면만 보고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당신이 보아온 그 얼굴은, 화면 밖에서도 다름이 없다. 카메라가 꺼져 있는 동안 흘리는 변화무쌍한 표정은, 슛 들어갈 순간을 위해 주워다 저축해두고 싶을 정도로 헤프고 그래서 아까웠다. 아낌없이 웃고 떠들고 찡그릴때 그의 얼굴은 긴눈과 코와 입으로 여백 없이 꽉찬다. 주름 걱정을 하며 웃음에 인색하게 구는 여배우들과는 달라서, 보기좋았다. 이틀후, 인천공항에서 다시 만난 이미연의 짐가방 속에는 회마다 알록달록 색이 다른 여덟 권의 대본이 들어 있었다. 그날 촬영분만이 아니라 나와 있는 대본 전부를 챙겨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이미연의 습관이고, 낱장의 귀퉁이를 찢어두는 것은 자신의 출연 부분을 표시하는 독특한 버릇이다. 그는 이야기의 전체를 본다는 일이 배우에게, 혹은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미리 대본을 여러 차례 읽어 그 앞뒤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아요. “(촬영할때 예민한 편인가요?”묻자) 그런가 봐요. 그래도 요즘은 많이 나아졌죠, 촬영장에서 밥은 먹으니까. 이번 드라마 들어올 때도, 약속 받은 한가지가 그거예요. 반응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고 미리 여유있게 찍는다는것. 쪽 대본을 받아서 한장씩 외워서 촬영하는건, 배우로서 내가 뭐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마저 들게 만드는 짓이에요. 암기력 테스트가 아니라 상황을,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죠, 연기는.”여기서 말을 줄였지만, 그녀가전드라마인 <명성황후>에서도중하차한 사정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을 완벽하게 납득시키는 원칙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사랑에 미치다는 개봉을 기다리는 영화 <어깨너머의 연인> 다음으로 찍는 작품이다. 드라마 현장은 영화와 다른 호흡이 필요하고,거기에 적응하는 일은 배우에게 적잖은 긴장을 요구한다(곁에 앉아 농담을 주고받던 상대역 이종혁이 맞장구를 치는데, 그 또한 얼마전영화 <바람 피기 좋은날>에 출연했다). 하루에 소화해야 하는 장면의 분량이 영화보다 더 많기 때문에 빠른 템포에 걸음을 맞춰야 하고, 영화처럼 배우의 컨디션을 중심으로 현장이 움직여주지도 않는다. 그런가 하면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즉각적인 피드백’은, 몇 달씩 기다려야 관객을 만나는 영화가 따라오지 못하는 드라마의 매력이기도 하다. 어떤 드라마든 전체중 한두 회는 꼭 챙겨 본다는 이미연은, 시청자로서본 최고의 드라마로 노희경 작가의 <꽃보다 아름다워>를 꼽는다. “<굿바이 솔로>나 <기적>도 봤는데 별로내‘과’가 아니더라고요. 내 과라고 하면 글쎄, 뭘까… 배우든 영화든 드라마든, 무언가 좋은 이유를 길게 설명할수 있는건 아니라고 봐요.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이죠. 찰나에 진정성이 드러나는 거예요. 리얼리티가 있고 진실함이 있는 것, 그게 한순간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 좋아요.”

이드라마의 기획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멜로지만 콩쥐 팥쥐가 따로 있지 않아서’였다. 윤계상과 김은주까지네 사람의 주인공은 저마다 공감 가는 삶의 무게를 지고 있으며, 그래서 누군가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해 다른 누군가가속시원히 희생되어주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같은 시간대의 <하얀 거탑>이 어디서나 벌어지는 남자들의 권력 다툼을선굵게 그려낸다면, <사랑에 미치다>는 누구라도 겪어봤을 남녀간의 흔들리는 감정을 섬세하게 소묘한다. 숫자로 싸움을 붙일 수는 있겠지만, 그런 표면적인 승부가 그에게 큰 의미를 갖지는 않을 것 같다.“시청률이 많이 나와주는 것도 좋겠지만 실은 더 오래 남는 걸 하고 싶어요. 새롭고, 의미 있는 거.”

이미연을 촬영 현장에서 네 번 만났다. 청주의 활주로와 공항 자재 창고와 안면도 격납고같이, 어디가 더 춥고 열악한가를 서로 다투는 그네군데에서 그는 한결같이 밝고 싱그러웠다. 활기를 안으로 숨기려 해도 도무지 숨겨지지 않아서 말씨나 몸짓 끝에 드러내고 마는 사람이 있는데, 이미연이 그랬다. 그리고 그 밝음은, 주변까지도 화사하게 밝히는 힘이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매만진 매끈한 장소에서 그를만났더라면 크게 감흥을 못느꼈을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미연이 참 희한하다고, 나이도 안먹는다고 신기해하지만, 그는 드라마 촬영하는 동안은 맘대로 아플 수도 없는 몸이라 답할 뿐이다.

물리적인 노동의 강도만 따지자면, 드라마 촬영장은 ‘체험! 삶의 현장’ 못지않게 가혹하다. 새벽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차례가 올 때를 기다리고, OK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정해진 동작을 되풀이한다. 짧으면 석달, 길면 대여섯 달까지 묶여 지내야 하는 이기간 동안 배우는, 마음 놓고 아플 여유도 없어서더 병이 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연은 카메라 밖에서 더 싱그러웠다. 활기를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미연은 그날 촬영하는 분량 말고도첫회부터 몽땅, 나와 있는 대본 전부를 챙겨 가지고 다닌다. 이야기의 앞뒤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할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허락해주는 시스템이야말로,그가 배우로서 받아 마땅하다 고집하는 배려고, 대접이다.얼굴을 주름 없이 잡아주는 앵글이나 조명이 아니라 말이다,슛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미연은 현장 한구석에 앉아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기도하고 졸기도 하고 그랬다. 그 얼굴은, 쓸쓸해 보이는 순간도 있었으나 말갛게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