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선 분주함과 치열함, 고단함과 경건함, 사람의 밥벌이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감상이 오간다. 아니, 감상 같은 건 사치다. 혹독한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만난 것은 여배우이지만 스타는 아니었고, 주인공이되 묵묵히 큰 그림의 부속이 되어 움직이는 겸허한 한 사람의 스태프였다.

일, 하려고요. 강수연은 꽃봉오리 같은 뾰족한 입술을 열어 또록또록 말했다. 지난해 가을의 인터뷰에서, 그는 몇 개의 시나리오와 몇 개의 드라마 대본을 놓고 고르는 중이라 했다. 새해 새드라마 잘되길 바란다고, 해 바뀔 때 인사를 건넨 일이기억나는걸 보면 그의 출연작이 정해졌다는 뉴스를 본게 연말 무렵이었나 보다. 더는 꽃같지 않은 여배우들이, 불같이 연기할 만한 영화가 줄어드는 충무로 현실이 안타깝다 했다. 자연스럽게 나이 먹어가는 여자를 보여주고 싶다던 그의 이야기가 떠오르며, 강수연은 어떤 여자를 보여주기로 결심했을까 궁금했다.

봄을 준비하는 드라마의 촬영장은 여전히 혹독한 겨울이다. 강원도에서 4박5일간의 스키장 로케이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각오는 했지만 역시 현장은 춥다. 해는 짧고, 날 안에 갈 길은 멀다. 마음이 분주해서 예민하고 거칠어진스태프들을 조심스레 헤치고 들어가자, 반색하는 강수연이 있었다.“어서와. 사진 찍을 만한게 있으려나 모르겠네. 옷이다 이래, 문희는 멋내는 여자가 아니라서.”‘멋 내는 여자’가 못 되는 문희는 재벌의 서녀로 태어나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좇는 사람이다. 백화점 사업을 물려받기 위한 야심이한 축이 되고, 어릴때 미혼모가 되어 낳았지만 다른 데로 입양된 아들의 이야기가 또 드라마의 한축을 이룬다. 이승연을 비롯해 김해숙, 정웅인, 박상면, 이정길 등 배우 라인업이 밀도 있다.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제목에서 알아챌 수 있듯, <문희>는 <국희>를 쓴 정성희 작가의 작품이다. 강수연은 <패션 70’S>와 <서울 1945> 같은 다른 드라마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젊은데도 인생의 굴곡을 호소력 넘치게 풀어내는 작가의 역량을 극찬한다. 허락된 시간은 인터뷰를 위해서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에도 짧았다. 하룻밤을 머물며 동행 스케치를 하기 위해 전해받은 촬영 콘티 시트에는 등장 인물란에 ‘문희’의 이름이 빠진 신이 없다. 게다가 상황은 현장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해서, 다음날 촬영분에서두 장면을 앞당겨 찍기로 한참이었다. 강수연은 촬영을 마친 장면의 낱장 모서리를 찢어 표시하고 있었다. 몇 장인가를 찢어 넘기고, 매니저가 가져온 크로크 무슈를 몇 입 베어물었을때 다시 슛을 준비해야 했다. 한달새 4킬로그램이 빠졌다는 건 부러한 체중 조절 때문이 아니지 싶었다.

밤 촬영은 스키장 안의 편의점에서 진행되었다. 슬로프에서 저녁 타임을 뛰고 내려온 사람들이 한창 장을 보러 올시간이다. 통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끝도 없이 모여들어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 들고, ‘스마일~’ 하는 셔터음이 불쑥 껴든다.“강수연이네?”하고 알아보는 사람들은 대체로 두가지 유형이었다. 1“. <여인천하>의 그 강수연이네?”2“. 강수연이네? 어쩜 하나도 안변했어.”한발 물러서 그 얘기를 들으며, 하나도 안변해서 다행이라기보다 저들이 얼마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사실이 서글퍼졌다. 사람들의 눈은 그렇게 잔인해서 얼마나 변했나, 어떻게 늙었나를 단박에 알아본다. 여배우의 시간이라고 멈춰 있겠나, 변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인데 말이다.

사진을 확인하다가 문득,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동안은 강수연의 얼굴이 한 가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입술선을 새치름하게 세운 표정. 마치 외부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로 집중하는듯 보인다. 수많은 스태프들과 구경하는 눈들 속에서, 자기 안으로부터 끌어올린 감정을 놓치지 않으려면 에너지를 애써 모아야할 것이다.어쩌면 어린 시절부터의 습관일까. 말을 시작하면서부터 연기라는걸 해왔을 그가 주변과 동떨어져 혼자 몰입해 있는 모습은, 왠지 서늘하고 멋진 광경이었다.

다음날 큐시트에는 아침 7시부터 문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스케줄이 바뀌어 서너 시간 후에야 강수연 촬영분을 찍게 된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6시부터 일어나 부산떨며 준비를 마친 다음 예정 시간을 넘겨 들었다. 정작 큰 문제는 강수연도 마찬가지 였다는 거다. 전날 새벽까지 촬영을한 여배우를 배려해서 스케줄을 미루는 것은 고사하고, 잠도 설치며 헤어와 메이크업을 마친 채로 기다리게 하다니 대접이 이만저만이 아니다.“어쩌겠어, FD들도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하느라 힘들었다는데 야단칠 수도 없잖아.” 드라마의 막무가내함에 다시 한번 놀란 순간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여인천하>에 대한양가적 감정을 토로했다. 50부작으로 계약한 그드라마는, 1백50회를 넘겨 끝이 났다. 캐릭터의 강한 이미지 때문에 부담도 컸고, 2년동안이나 촬영하며 건강도 나빠졌다면서도 그는 연장의 끝까지 간 일에 대해 “드라마는 영화와 달라서 도의적 책임이라는게 있다”고 말했다. 계약은 계약이지만, 시청자들이 원하면 해야 되는 책임이 있더라고. 포스터 촬영날 서울에서 짧게 다시 만난 강수연은 다음날 또 강원도로 넘어간다고 했다. 이 배우는 한계에 부딪힐 정도로 스스로를 혹사하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도, 다시 드라마를 찍으며 설레고 있었다. 그 막무가내의 힘은 어디에서 올까. 아마도 사람들을 매일 정해진 시간, TV앞으로 끌어당겨 앉게 하는 힘과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리라는 짐작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