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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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은 그 자채로 하나의 드라마다. 작가와 감독, 프로듀서가 그 세상 속에서 벌이는 갈등과 화해, 성취와 좌절이 이 대본 없는 드라마에 생생한 재료가 된다. 6월 안에 새로 시작될 세 편의 드라마는 또 어떤 세계를 펼쳐보일지 미리 엿봤다.

<결혼 못하는 남자> – 사과나무 픽쳐스 윤신애 대표

출생의 비밀이나 재벌가라는 설정 없이도 소소한 재미를 주는 일본 드라마를 볼 때면, 왜 우리나라에서는 저런 걸 못 만드나 싶었다. 까칠한 마흔 살 노총각의 생활과 정서를 꼼꼼하게 그려낸 아베 히로시 주연의 <결혼 못하는 남자>도 일상의 디테일에 강한 일드의 목록에 있었다. 감각적인 누아르 <개와 늑대의 시간>을 만들었던 사과나무 픽쳐스에서 이 드라마를 한국판으로 리메이크한다. 김종학 프로덕션에서 오래 기획실장으 로 일했던 윤신애 대표는 요즘 하루의 절반은 <결못남> 현장에서 보내고 나머지 반은 <신의 물방울> 시나리오 기획 개발 작업에 쓰고 있다.

<결혼 못하는 남자>는 진행이 어느 정도 되고 있나.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된다. 6월 15일부터 방송되는데 <선덕여왕>이랑 붙는다. 경쟁작이 워낙 대작인데다 좋은 배우들에, 김영현 작가에…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다(웃음).

후지 TV에서 방영했던 일본 원작과는 어떤 점이 가장 달라질지 궁금하다.
처음 판권을 사올 때, 이드라마를 본 내 주변 마흔 살 또래의 결혼 안 한 남자들이 너무 재미있다기에 관심을 가졌다. 결혼이 늦는 남자들을 보면‘저래갖고 장가가겠어?’싶은 특이한 점들 있지 않나. 이 주인공은 그런 걸 총망라해서 갖고 있는 인물이다. 기본 콘셉트는 그대로 유지하되 캐릭터들이 좀 바뀔 거다. 그리고우리나라에선 집안에 누구 하나 결혼 안 하고 있으면 온 집안의 골칫거리지 않나. 가족의 유대와 간섭이 심한 우리 문화를 고려해 원작보다는 가족들 비중을 더 강화할 거다. <꽃보다 남자>의 김소은이 여기서는 스물여섯으로 나오는데, 대학 졸업하고 힘들게 인턴으로 들어가 정식 사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인물이다. 이런 설정도 실정에 맞게 바꾼 거라 볼 수 있다.

지진희는 반듯한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런 헐렁하고 제멋대로인 괴짜를 상상하기 쉽지 않다.
나도 좋은 남편감 느낌으로만 생각하다가, <봄날>을 같이 찍으면서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됐다. 반상회가면 딱 아줌마들한테 인기 있을 타입으로 수다를 떤다. 고기 구워 먹을 때 타는 꼴 못 보거나, 군것질거리를 입에 달고 살거나, 프라모델 만드는 거 좋아하는 등 의외로 오타쿠 같은 느낌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오버하지 않고 잘 드러내면 그런 자기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을 거다.

만화 원작인 <신의 물방울> 드라마 제작에도 참여한다고 들었다.
제작은 아니고, 기획 개발을 같이 한다. 판권을 갖고 있는 키이스트에서 제안해서 시놉시스까지만 쓰는 거다. 이런 작업은 처음인 셈인데, <신의 물방울>처럼 주목받는 원작을갖고 팀을 골라서 계약한다는 건 기획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무척 잘 쓴 이야기지만, 드라마화하기 굉장히 어려운 작품이다. 만화적인 스토리 보다는 와인 상식을 쉽게 가르쳐주는 교재로서 더 어필했다고 본다. 스토리를 개발해서 론칭시키기까지의 일이 재미있다.전문 기획자, 창작을 하는 집단으로 남고 싶다. 우리 회사의 강점은 결국 그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가급적 투자 말고 캐스팅, 작품, 대본에만 더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웃음).

<신의 물방울>은 일본 만화, <결못남>은 일본 드라마 원작이다. 여전히 킬러 콘텐츠는 일본 소설, 드라마일까? 국내에서 다양한 문학상이 신설되어 원 소스 멀티유스를 위한 콘텐츠를 발굴하려고 노력하지만 별 소득이 없는 것 같다.
원 소스 멀티유스의 시도는 좋지만 국내 콘텐츠의 문제는 원작료를 너무 비싸게 받기 때문에 경쟁이 지나치다는 거다. 원작자가 집필에 참여해야 한다는 등, 내거는조건도 까다롭다. 소설과 영상물은 엄연히 다른 분야의 창작이고 전문가가 따로 있는데도 말이다.어떻게 재미있게 만들어서 선보일 수 있을까, 크게 보고 콘텐츠가 진화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드라마 콘텐츠에서 파생하는 수익에서 제작사 몫은 얼마 안 된다. 드라마 제작사 협의회에서 공정거래위원회에 방송 3사를 제소하기도 했고. 이런 구조의 불합리함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나?
방송사에서 제작사에 주는 예산은 제작비의70%가 안 된다. 나머지는 어떻게든 해나가야 하는데 참 버거운 일이다. 하지만 배우들이 너무 높아진 개런티를 합리적으로 바꿔보자는 생각으로 다같이 몸값을 낮추면서 훨씬 편해지긴 했다. 스태프들 임금을 안 주거나 하는 제작사도 있는데, 그렇게 하고싶지는 않다. 같이 살아야 하니까.

결국 가장 큰 문제는 제작사가 아닌 방송사에서 기본 저작권을 갖는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농담처럼 우리는‘퀵서비스’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여기서 찍은 테이프 저기다 갖다 주는 것뿐이라고(웃음). 사실 콘텐츠를 잘 만들면 리스크를 감수하는 만큼 돌아오는 수익이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PPL도 허용되어야 한다.‘그 여자가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사무실에 출근한다’고 할 때의 그런 뉘앙스가 분명 있지 않나. 그런데 상표를 가리면 캐릭터를 더 어렵게 설명하게되는 거다. 렉서스나 인피니티 같은 머리 좋은 브랜드는 우리 드라마를 스폰서해서 중국 시장에 쉽게 진출한다. 중국인이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정서적인 벽을 이런 식으로 넘어버리는 거다. 한국 드라마 힘을 일본 브랜드가 업는다. 왜 세계시장에다 한국 드라마를 통해 우리 브랜드 광고를 못하나? 얼마나 아까운 기회인가? 이런 건 개별적으로 싸우기에는 너무 힘든 문제다.

우리나라 드라마 산업의 규모는 이제 국내시장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커진 게 사실이다.‘한류’라는, 배우에 기댄 지나치게 낙관적인 단어의 설명 말고, 한국 드라마가 정말 일본이나 아시아 시장에서 얼마만큼 경쟁력이 있나.
우리는 좀 덤벙덤벙하면서 잘한다(웃음). 감정을 쫙쫙 몰아가는 데 능하고, 특히 멜로를 그리는 데 탁월하다. 일본 드라마 보면, 부부 간에도 서로 매너 있게 사랑한다(웃음). 그런데 우리는 울고불고 죽네 사네 별거 다 하며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게 있지 않나. 드라마 찍는 것 자체도 몰아쳐서 찍기도 하지만.저 남자가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거는구나 하는 환상을 시청자에게 충족시켜주는 부분이 있다. 아마일본 아주머니들이 배용준한테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도 그런 이유일 거다.

관계를 극단적으로 비틀고 꼬는 막장 드라마, 가볍고 유머러스한 코미디가 인기다. 이런 드라마들이 만들어지는 건 불황의 사회상을 반영한다고도 해석되는데 당신의 견해는 어떤가.
제작자라면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갈등하고 있을 것이다. 시청률이 잘 나오니까. 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 온통 나와서 고함을 질러대니, 우리 스태프들끼리 ‘이 착한 드라마는 어떻게 살아남나’라는 말도 한다(웃음). 하지만 나는 인간의 심성까지 그런 식으로 과하게 그리는 건 못하겠다. 지상파라는 건 모두가 공유해야 할 전파를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일이니까, 기본적인 윤리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상적인 것은 시대를 반영하면서 반발짝 정도만 앞서가는 거다. 내가 <옥탑방 고양이> 원작을 샀을 때는, 동거에 대해 이제는 이야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내 이름은 김삼순> 역시 살찐 노처녀 이야기를 조금 밝게 포장한 거고. <결못남> 같은 경우도 내 두 살 위 오빠가 실제로 결혼을 안 해서 마치 자기 드라마처럼 좋아한다(웃음). 이전에는 마흔 살을 다루면 무조건 결혼한 설정이었는데 이제는 안 하거나 돌싱인 사람이 많지 않나. 이런 주변의 리얼리티에 즐거운 판타지를 결합하는 게, 드라마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바라보다가> – 정진영, 김의찬 작가

드라마 <그저 바라보다가>(이하 <그바보>)는 평범한 우체국 직원과 인기 여배우의 계약 결혼을 주요 소재로 다룬다. 성별이 뒤바뀐 또 하나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겠으나 작품을 집필한 김의찬, 정진영 작가의 욕심이 그 정도로 만만하진 않다. <순풍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같은 시트콤으로 일찌감치 필력을 알린 이 부부 작가팀은 로맨틱 코미디의 외피 아래 인생과 가족의 가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는다. 그러니까, 이건‘러브 어페어’보다‘패밀리 어페어’에 가까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바보>를 처음 구상한 게 7년 전이라고 들었다. 작품으로 만들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정진영(이하 정)
결혼한 해 어느 날, 둘이 필이 꽂혀서 드라마 기획을 세 개나 완성했다. <그바보>는 그중 두 번째 이야기다. 시작은 한 줄의 루머였다. 모 여배우가 음주운전 단속 에 걸렸는데 그 옆 좌석에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타고 있다 도망갔다는 내용이었다. 진위 여부를 떠 나 루머가 지니는,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힘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여배우와 정치인 의 아들 사이에 평범한 누군가가 개입하면 어떨까, 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게 이 드라마다. 원래 는 <황태자의 첫사랑>보다 이 작품을 먼저 발표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리조트 협찬이 붙고 편성 자체도 여름 특집이 되면서 순서가 뒤집혔다. 이런저런 사연이 있어서인지 우리는 <그바보>란 드라 마에애착이무척깊다. 기획안셋중가장좋았고구동백이라는 캐릭터를 잡았을 때 강력한 감이 왔 다. 제작이 미뤄질 때마다 매번 안타까웠는데 이제는 지난 7년 동안 작품을 충분히 숙성시킬 수 있 었다고 좋게 생각하는 편이다. 예전엔 이 드라마를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지 금의 대본은 인생의 가치와 철학에 대한 메시지까지 녹여내고 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소재를 다룬 <스타의 연인>이 한발 앞서 전파를 탄 바 있다. 시청자들은 어쩔 수 없이 두 드라마를 견주게 되지 않을까? <그바보>는 <스타의 연인>과 어떻게 다른 작품인가?
<스타의 연인>이 처음 방송됐을 무렵, 우리는 한창 대본을 쓰고 있었다. 혹시라도 겹치는 부분이 있을까 싶어 한 회 한 회 조마조마해하면서 봤는데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가지로 뻗기에 안심했다. 당시엔 코드가 비슷하면 프로젝트 자체를 포기해야겠다고까지 생각했다.
김의찬(이하 김) 일단 <그 바보>의 핵심은 쇼윈도 커플이다. 쇼윈도 커플이 진짜 커플이 되어가는 과정을 좇는다는 것, 가십의 이면을 로맨스로 풀어낸다는 게 가장 큰 차이다.

<그바보>가 묘사하는 연예계는 어떤 곳인가? 시청자들은 <온에어>가 그랬듯, 좀 세게 써주길 원할 지도 모른다.
<그바보>는‘연예계’를 그린 작품이 아니다. 구동백과 한지수라는 두 캐릭터 간의 대조적인 존재감이 중요하게 다뤄질 뿐, 여배우라는 직업 자체에는 이야기의 초점이 옮겨가지 않는 다.
오히려 전체 구조상으로는 6개월 뒤의 시장 선거전이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연예 산업보다 는 정치가 주요 소재인 셈이다. 절대 만날 수 없 는 두 남녀가 연애와 결혼까지 감행하게 되는 배 경에 선거전이 있다는 설정이니까. 정 원래는 대 선이었다. 너무 거창해서 시장 선거로 낮췄더니 공교롭게도 경쟁 상대가 <시티홀>이 됐다.

구동백의 시점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시청자의 공감을 얻느냐 못 얻느냐는 오히려 한지수 캐릭터에 달려 있지 않나 싶다. 대중의 일상과 거리가 있는 캐릭터이니만큼, 더 정교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될 필요가 있다.
지수가 결코 연기하기 쉬운 역할이 아니기 때문에 여배우를 신중하게 캐스팅했다. 그런데 김아중이 대본을 보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동백이는 1부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알겠는데, 지수 캐릭터는 16 개로 쪼개져 매회 소개되는 느낌이었어요.”그 말 이 맞다. 1부 때는 사건 안에 녹아 있고, 2부 때는 스캔들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3부쯤에 아 픔을 드러낸다. 시청자들이 구동백과 함께 천천히 한지수를 알아가게끔 장치를 한거다.

주연 배우인 황정민과 김아중은 각각 순박한 소 시민, 그리고 화려한 스타의 이미지에 맞춘 듯 잘 어울린다. 배우의 대중적 페르소나와 캐릭터의 싱크로율은 높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나? 작가로 서 연기자에게 뭔가 색다른 모습을 덧입히고 싶은 욕심도 있을 것 같은데.
글 쓰는 사람과 연 출하는 사람은 출연자들을 가장 예쁘게 보여주면 된다. 각자 원하는 방향과 색깔이 있겠지만 핵심은 배우다. 황정민, 김아중으로 주연이 결정된 후, 그들에게 잘 맞춰서 쓰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야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고 믿는다.
시트콤을 하며 많은 배우들과 일해봤다. 그런데 그 배우에게 없는 캐릭터를 줘서 대박이 나는 경우는 보질 못했다. 허 간호사나 미달이 아빠나 다 연기자들의 면면을 관찰한 끝에 얻어진 캐릭터들이다. 작가 입장에 서는 배우에게 뭔가 새로운 옷을 입히고 연기 변신을 시켜줘야겠다는 욕심보다는, 가장 잘 어울리 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주려는 고민이 앞선다. 영화처럼 사전 제작 기간이 충분하다면 또 모르겠 다. 작가, 감독, 배우가 소통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TV 드라마에선 아무래도 어렵다.

권력 투쟁이나 계급 차이를 농담의 소재로 특히 선호하는 편인가? <순풍산부인과>나 <웬만해선 그 들을 막을 수 없다> 같은 시트콤은 매 에피소드가 등장인물들 간의 파워 게임이었다. 게다가 <황태 자의 첫사랑>과 <그바보>는 공히 대조적인 입지의 남녀 주인공을 내세운다.
서열을 가지고 코미 디를 하기가 참 용이하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익숙한 코드이기 때문이다. 희한 한 사람, 특이한 사건으로 웃기는 건 단발성이다.‘분장실의 강선생님’도 조직 내 서열을 다루는 설 정이 공감을 쉽게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재미있는 거다. 그 코미디 코드를 우리가 잘 알고 있으니까 자꾸 그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다.

<꽃보다 아름다워>, <굿바이 솔로> 등 섬세하고 진지한 드라마를 연출했던 기민수 감독과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호흡은 어땠나?
감독님이 이런 말씀을 했다. 지금까지는 돌을 물에 던 져 한없이 가라앉고 파고들게 하는, 그런 느낌의 작품을 주로 해왔는데, 우리 대본에서는 그 돌이 물 수제비를 뜨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걸 목격하게 된다고.

화법이 참… 독특하시다.
좀 그런 편이다. 아무튼 돌을 빠뜨릴 듯 빠뜨리지 않으며 스피디하게 전 진하는 이야기가 자기로선 무척 신기하다고 하신다.
우리는 이 드라마를 약간은 판타지로 그리고 싶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감독님은 현실적인 묘사를 선호하는 분이다.“지상에서 발을 이만큼만 떨어뜨려도 되지 않을까요?”의견을 건네도 한결같이 발을 육지에 꼭 붙이고 계신 분이라, 그 조율 이 약간 어려웠다. 언젠가는 감독님께 이런 이야기를 했다.“찍으면서 즐거운 걸 한번 겪어보세요.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드릴게요.”코미디는 만드는 사람이 굉장히 즐거워질 수 있는 작업이다. 감독님이 <그바보>를 통해 그런 경험을 해보셨으면 한다.

부부 작가가 쓰는 드라마다. 작품에 묘사된 연애의 디테일 중 본인들의 경험에서 빌려온 것도 있나? 아니면 못 해봐서 아쉬웠던 걸 대본 쓰면서 해소하는 편인가?
난 잠깐 나가 있어야 할 것 같다.
만난 지 이제 15년째 접어드는데 그동안의 데이트라면 극장 가고 밥 먹고 수다떤게 전부다. 번듯한 프러포즈도 못 받았으니 이 친구가 유머 마저 없었으면 절대 결혼 안 했을 거다. 이런 건 있다. 성격 급한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면, 김 작가가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야, 풀 어, 풀어’이렇게 말해주곤 한다. 동백이에게도 드 라마 안에서 똑같은 행동을 시켰다.‘하루하루 즐 겁게 살면 돼. 인생 뭐 있어?’하는 제스처다. 그 걸 동생에게도, 그리고 나중에는 지수에게도 해 준다. 멋있는 장면 같은 건 내가 경험에서 빌려올 거리가 없다. 다만 캐릭터의 소소한 면모를 쓸 때 는 김 작가를 참고한다.

흔한 로맨틱 코미디로 분류하기에는 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많다. 작가 입장에서 <그바보>는 어떤 드라마라고 설명하고 싶나?
동백이 지수 에게 건네는 마지막 대사가 바로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들려줬던 말이다.“반짝반짝 빛나 는 건 하늘에만 있는 게 아니다. 땅에도 있다. 사람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빛날 수 있다.”바로 그게 이 드라마를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다.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 람들을 그리려고 한다. 동백은 지수와 연애만 하 는 게 아니다. 아버지의 철학을 나눔으로써 비로 소 둘은 가까워진다. 로맨틱 코미디는 포장일 뿐 이다. 진짜 알맹이는 페이소스가 있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태양을 삼켜라> 유철용 PD

유철용PD가 만든 드라마에는 거칠고 파란만장한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랑과 야망에 모든 것을 건 남자의 이야기인 <올인>이 그랬고, 힘들고 고단하게 사랑하는 네 남녀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인 <슬픈 연가>도 그랬다. 겨우겨우 일이 잘 풀릴라 치면 음모와 계략에 걸려 넘어지던 주인공들은 그럼에도 끝까지 이를 악물고 이겨낸다. 오는7월초, 첫 방송을 앞두고 있는 그의 신작 <태양을 삼켜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엔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뿌리를 찾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꿈을 찾는 이야기다.

먼저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전작 <히트>의 시즌 2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실제로 시즌 2를 제작할 계획이 있나?
<히트>의 작가와는 계속 만들자는 얘기를 했다. 작가도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고. 드라마 끝나고 MBC와 만나서 또 가자는 얘기도 했는 데, 작가도 그렇고 나도 다음 스케줄이 잡혀버렸다. 그렇지만 나중에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장르다. 그리고 드라마 자체도 마치 다시 시작할 것 같은 상태에서 끝났기 때문에 시즌 2에 대한 미련이 많 이 남았을 거다. 기회가 되면 꼭 해보고 싶다.

한창 촬영 중인 새 드라마 <태양을 삼켜라>의 짧은 시놉시스를 봤다. 젊은이들이 제주도 서귀포를 최고의 도시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펼친다는 내용이던데, 사실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좀 더 설 명해줄 수 있나?
<태양을 삼켜라>가 내가 연출한 이전의 드라마들과 다른 점은 극적 모티프가 한국 근현대사의 한 사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5·16 군사 쿠데타 당시 고 박정희 대통령이‘국 토 건설단’을 발족했다. 국토 건설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소위 말하는 깡패들과 병역 기피자들을 모 아서 전국의 댐과 도로 공사를 시킨 거다. 드라마 는 그 국토건설단원으로 참가한 깡패 출신의 남 자로부터 시작된다. 제주도 공사에 투입된 이 남 자가 거기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해녀 아가씨와 묘하고 짧은 러브 스토리를 만들고, 그래서 제주 도를 기반으로 여러 캐릭터들이 등장하게 된다.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의 근현대사를 훑게 되겠다. 그럼, 정치적인 색깔도 살짝 들어가는 건가?
그렇지는 않다. 물론 드라마를 보면서 혁 명이라든가 국토 건설 단원에 대한 시각이 보여 질 수 있지만, 우리 드라마에선 극적인 모티프로 활용하는 정도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몇 가지 포인트들이 있다. 일단 주인공들의 삶이 다 극적이고 파란만장하다. 자신의 과거에 얽힌 뿌리를 찾아가는 친구도 있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키워오던 꿈을 찾아가 는 친구도 있다. 불가능할 것 같은 희망을 실제로 현실화해가는 과정을 그려나갈 예정이다.

원작이 따로 있다고 들었다. 차기작으로 이 작품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원작을 쓴 강철 화 작가와는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다. 지금 <태양 을 삼켜라>는 드라마타이즈하는 과정에서 다시 손질해 책으로 출판이 될 거다. 원작을 읽고 상당히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소설 속에 표현된 캐릭터들의 범상치 않은 삶 때문이었 다. 한 사람 한 사람 따라가다 보면 정말 드라마 틱한 인생이 펼쳐지는데, 그 굴곡진 인생이 아주 잘 표현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 작품들도 그렇고, 주인공들이 참 고생이 많다. 남들이 겪지 않은 일들을 겪어내고, 또 그걸 이겨낸다.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넘어서려고 애쓰는 이런 인생에 관심이 많은 건가?
그런 것 같다. 내가 만든 드라마는 정말 다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대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일상을 다 룬 드라마나 단순한 청춘물에 다가가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고. 우리가 사는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고 말랑말랑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거 같다.

그렇지만 살면서 어떤 난관을 맞닥뜨린다 해도 돌아가거나 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난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굳이, 항상 맞서 싸운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그래서 그렇다. 막연히 외무고시를 준비할 까 하고 있었는데,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엠티를 갔는데 어떤 선배가 신입생들에게 자신의 10년 뒤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앞에 나와서 행동으로 표현해보라고 했다. 그때 내가 그린 모습은 외교 관이 아니라 카메라 뒤에서 큐 사인을 주고 있는 감독이었다. 그러고 나서 혼자 유학 준비를 하고, 부모님에겐 경제학 공부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스웨덴으로 영화 유학을 떠났다. 그때부터 험난한 인생이 시작됐다. 그래서 그런지 하는 작품들마다 이렇다.(웃음)

<태양을 삼켜라>는 오랜만에 찾아온 블록버스터급 드라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이만한 스케일의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 그래서 언론의 기대와 우려가 크다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하진 않았나?
부담이 왜 없겠나. 처음에 이 드라마를 기획할 당시가 최악의 경기 불황이었다. 그런데 해외 촬영에, 그 것도 아프리카까지 로케이션을 간다고 하니까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들이 많이 있었고, 나도 알고 있었다. 라스베이거스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성유리가 연기하는 주인공 수현이는 라스베이거 스 쇼의 이벤트 담당 프로듀서로 <태양의 서커스>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다른 등장인 물들도 수현과의 관계로 인해 아프리카에 가게 되는 설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 이것이 단순히 드라마의 외형을 키우고 혹은 단순한 볼거리 제공을 위해서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막상 촬영에 들어가고 작품에 몰입하게 되면 그런 외적인 조건을 잊을 수밖에 없다. 주어진 상황에 완전히 몰입해서 작품을 잘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한 거다.

혹자는 ‘유철용 PD의 작품은 TV 화면보다 스크린에 더 어울리는 스케일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영화 같은 드라마라는 평가에 대해 선 어떻게 생각하나?
드라마 만들 때 딱히 뭔가 를 의식하면서 만드는 건 전혀 아닌데, 여태까지 만든 작품들을 방송하고 나서 그런 이야기를 많 이 들었다. 그래서 실제로 영화를 하자는 제의도 받았지만 나중에 개인적으로 영화를 연출할 생각 을 하고 있다. 하고 싶다고 아무때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당한 준비가 되고 기회가 됐을 때 영화를 연출해볼 계획이다.

이렇게 큰 작품 말고 아기자기한 소품 같은 드라마를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물론 해봤다.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해봐야지 생각한 드라마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어머니’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어머니라는 단어 자체가 가 지고 있는 광대한 의미망, 그 단어가 함축하고 있 는 나름의 의미를 꼭 담아보고 싶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주 평범한 샐러리맨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물론 일상적으로 접근하진 않 을 거 같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겠지만.(웃음)

최완규 작가와 사실상‘크루’이면서 업무 파트너이지 않나. 두 사람이 대표로 있는‘에이스토리’ 는 작가 양성을 위해 설립한 회사인가?
최 작가가 작가로서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예전부터 작가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어했다. 특정 장르 에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모이면 시너지 효과를 통해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시즌제로 드라마가 나올 수 있는 것도 이런 작가 시스템 덕분이다. 신인 작가 발굴도 겸하면서, 개성 이 강한 작가들이 모여 다양한 측면에서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최완규 작가는 <태양을 삼켜라>를 열심히 집필 중이라고 들었다. 촬영은 어느 정도 진행되었나?
아프리카 분량은 다 촬영했고, 60년대 제주도 분량이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어제 라스베이거 스 헌팅을 다녀왔는데 이제 촬영을 떠날 거다. 그전에 제주도 촬영을 완전히 마무리지어야 한다.

얘기만 들어도 숨이 가쁘다.
계속 난관에 부닥친다. 뭐 하나 넘기면 새롭게 다른 하나가 나타나고. 드라마 주인공들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 제작 과정도 계속 이런 식이다. 산을 넘으면 물이 나오고.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파급 효과는 엄청나다. 이미 <올인> 같은 작품을 통해서 드라마가 가진 힘을 느껴봤을 것 같다. 이걸 일종의 책임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가장 많이 느꼈던 게 <올인>을 끝 내고 나서였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드라마가 자기 인생에 어떤 힘이 되었는지 에 대해 들을 때가 있다. 정말 힘들었을 때 이 드라마를 보고 삶의 활력을 얻어 열심히 살아야겠단 의지를 갖게 됐단 거다. 그런 기운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작품을 계속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태양을 삼켜라>를 보고 난 후 시청자들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활력을 줄 수 있고, 희망을 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난 지금도 후배들이나 주변 사람을 만 나면 하는 얘기가 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생각하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드라마를 통해서 이런 내 생각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정준화, 황선우, 서동현
포토그래퍼
이상학
아트 디자이너
김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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