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로렌의 40주년 역사

W

2007년9월8일, 뉴욕 센트럴 파크 안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컨서버토리 가든에는 가난한 이민자에서 출발해 미국 패션계의 제왕으로 군림한 랄프 로렌의 40주년 역사가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졌다.

랄프 로렌의 40주년 기념 쇼가 열리기 바로

직전,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 시장은 자리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으며 유유히 흘러나오는 노래 <마이 페어 레이디>에 심취해 있었다. 남루한 복장의 꽃팔이 일라이자가 교육과 연습을 통해 세련된 말투와 매너, 우아한 품위를 갖춘 사교계의 숙녀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 <마이 페어 레이디>와 랄프 로렌의 자전적 드라마의 유사성을 음미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결론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재투성이 아가씨가 사교계의 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어딘지 모르게 랄프 로렌 40주년 역사와 닮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백발 랄프 로렌의 관록과 유머 감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블룸버그 뉴욕 시장은 미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랄프 로렌에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었다. 뉴요커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유산인 센트럴 파크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컨서버토리 가든을 역사상 처음으로 선뜻 내주었으니까. “디자인에 있어 나의 목표는 궁극적인 꿈을 실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상상 가능한 최상의 실제를 뜻합니다.” 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상상 가능한 꿈을 꾸며, 그 꿈을 위해 오롯이 전진해온 랄프 로렌에게 <마이 페어 레이디>의 일라이자는 어쩌면 분신이 아닐까?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 회장은 랄프 로렌의 4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에 앞서 “로렌의 성공은 그의 열정과 환상 덕분입니다”라는 짧은 코멘트로 한 편의 패션 드라마와 같은 그의 삶을 압축해 표현했다.
1967년, 랄프 로렌의 가장 핵심적인 브랜드인 ‘폴로’ 라는 이름의 남성용 넥타이 브랜드를 히트시킨 이후 로렌은 미국적인 디자인 왕국을 세우며 자신의 꿈을 실현해왔다. 1939년 유대계 러시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디자인 교육조차 받아본 적이 없는 옷가게 판매원이 세계 패션계의 거물로 우뚝 선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패션 감각이 뛰어나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근사한 옷을 사기 위해 방과 후에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군 제대 후 그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남성복 업체인 ‘브룩스 브라더스’ 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1968년, 폭 2.5인치짜리 넥타이는 한물가고 폭이 4인치나 되는 클래식 넥타이가 히트할 거라는 자신의 직감에 사활을 걸고 넥타이 사업을 시작해 디자이너 랄프 로렌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넥타이의 성공은 사업의 시작일 뿐이었다. 랄프 로렌은 미국 남성복에 혁명을 일으킨 선두주자였다. 1968년 프리미엄 남성복 브랜드를 만들며 회사를 출범시킬 때도 그의 타고난 감각은 빛을 발했다. “나는 수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수트가 내게 주는 느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턱시도 재킷에 즐겨 진을 매치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진과 트위드 재킷과 부츠를 매치하기 시작하더군요. 미국의 남성들은 점점 수트에서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남성복 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음을 가장 먼저 간파한 이가 랄프 로렌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정교하게 잘 만든 영국식 테일러드 수트를 선보이기 위해 런던의 최고 재단사에게 잘 지은 수트를 주문해 뉴욕으로 가져왔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고급스러운 수트에 감탄했다. 로렌은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다음에 만들 것” 이라고. 이렇게 해서 랄프 로렌은 럭셔리한 퀄리티의 퍼플 라벨을 미국 시장에 성공시켰다. 그는‘폴로’라는 대중적인 브랜드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고, 창의적인 감성을 더해 폴로 이미지를 고급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사업 수완이 최고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저는 유행에 민감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행에 반대하고 유행이 주류인 패션계의 일부가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유행은 너무 일시적입니다. 저는 유행의 영향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제 관심은 일시적인 패션이 아니라 장수, 영원, 스타일에 있습니다.” 그의 겸손한 생각과는 달리, 그는 본능적이고 직감적으로 시대별 트렌드를 예견하는 ‘유행에 민감한 트렌드리더’ 였다.
1971년 여성복 라인을 론칭할 때도 그의 본능은 역시 적중했다. ‘남성복을 변형시킨 여성복’ 이라는, 남들이 시도하지 않는 독특한 관점을 관철시켰는데 결과는 뜻밖의 대성공이었다. “스타일이 매우 뛰어난 제 아내는 셔츠와 찢어진 재킷이 입고 싶을 때 남자 아동복 전문점에 가곤 했는데, 사람들은 항상 아내가 이러한 옷을 어디서 구하는지 궁금해했습니다. 그녀의 옷차림을 볼 때마다 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무시하면서 말을 탄 채 바람에 머릿결을 날리고 있는 반항적인 소녀, 스포티하면서도 유행을 따르지 않았던 캐서린 헵번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그녀를 위해 셔츠를 디자인했습니다.” 로렌은 남성용 재단 셔츠의 라인을 과감히 여성용으로 디자인하여 클래식한 남성복을 여성 스타일로 재창출했다. 남성복 팬츠를 본뜬 넉넉한 와이드 팬츠와 주름 팬츠, 남성복의 딱딱한 테일러링을 그대로 닮은 윙 칼라 재킷, 넥타이 소재로 만든 스커트, 그리고 박시한 캐시미어 스웨터와 무릎 길이 셔츠를 연장한 개념의 드레스까지. 그의 여성복은 시종일관 남성복을 변형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중성적 디자인의 여성복은 오히려 여성스러운 면을 강조하는 새로운 룩으로 인기를 얻었고, 남성복에 주로 쓰인 고급스러운 코튼과 옥스퍼드 소재 등이 천연 섬유의 소멸에 실망하던 여성들에게 어필하며, 하이 소사이어티 룩의 새로운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드디어! 두말할 것도 없이 랄프 로렌이 최고의 트렌드 예견가임을 말해주는 폴로의 대표작 ‘폴로 플레이어 엠블럼’ 이 세상에 소개된다. 원래 여성복 재단 셔츠의 커프에 작게 새겨진 이 징표가 40년이 지난 지금, 날개를 달고 세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블록버스터급 엠블럼이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로렌은 이 대중적 인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미국적 문화의 필수 요소를 의상으로 되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여 ‘미국을 위한, 가장 미국적인 디자이너’ 로 남고 싶었다.
1978년 소박한 양털 조끼, 목동의 재킷, 목장 소녀가 입음직한 체크 프린트 플레어 스커트 등 미국의 전통과 로렌의 독특한 스타일이 어우러진 웨스턴 웨어 컬렉션을 발표했으며, 1981년 미국 원주민인 인디언 문화에서 영감을 얻은 독특한 문양, 칸초 벨트, 페티코트 스커트 등으로 구성된 산타페 컬렉션을 전 세계에 히트시키며, 명실공히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디자이너로 자리 잡는다.
마지막으로, 40년 비즈니스 경력의 랄프 로렌은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거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미국과 푸에르토리코에서 1천여 개의 점포를 운영하는 미국의 백화점 체인 ‘J.C 페니’ 와 제휴해 내년 2월부터 ‘아메리칸 리빙’ 이라는 새로운 매장을 개장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미 미국인 대부분이 랄프 로렌이 만든 의상을 한 벌 이상 갖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로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인들이 그가 만든 페인트로 칠한 방에서 그의 이름이 수놓인 침대 시트에서 잠들기를 바란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춘>은 랄프 로렌 40주년 기념 기사에서 “로렌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랄프 로렌이 미국 기업의 상징으로 남길 원한다” 고 전했다.
랄프 로렌은 과연 미국 패션 디자이너들의 서바이벌 게임에서 최후의 생존자로 남을 수 있을까? 그 결과가 판가름 난 것은 아니지만, 랄프 로렌이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흰 셔츠에 승마 바지를 입은 존스와 스미스는 랄프 로렌 광고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최근 출간된 인기 칙릿 소설 <러브러브 뉴욕>의 한 구절처럼 말이다.

유행에 연연하지 않는 클래식을 존중하지만, 시대적 유행을 예견하는 안목을 지닌 디자이너 랄프 로렌.

남성복 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음을 가장 먼저 간파한 이가 랄프 로렌이다. 그가 원한 것이 곧 고객이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정교하게 잘 만든 영국식 테일러드 수트를 선보이기 위해 런던의 최고 재단사에게 잘 지은 수트를 주문해 뉴욕으로 가져왔다.

2007년9월8일 저녁 미국 뉴욕 센트럴 파크에는 할리우드

톱스타부터 미국 정치를 대표하는 케네디가와 부시가 인사들, 도나 카란, 캐롤리나 헤레라, 베라 왕 같은 스타 디자이너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패션 제왕에 기립박수를 헌사했다. 이 세기의 손님들을 위해 수십 개의 샹들리에가 불을 밝혔고, 철갑상어알과 최고급 샴페인이 등장한 초호화 만찬이 차려졌으며, 수백만 송이의 달리아가 은은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컨서버토리 가든의 앤티크한 쇠창살 너머 푸른 정원을 배경으로, 하얀 직물들이 휘감긴 거대한 모로칸 궁전 같은 그곳에는 클래식한 보타이와 턱시도를 차려입은 명사들과 할리우드 스타들, 우아한 드레스 차림의 귀부인들이 그림같이 서서 즐겁고 흥분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든 스펙터클에 종지부를 찍을 리얼 패션 스펙터클이 펼쳐진 것이다.
“제가 그동안 사랑했던 요소들을 모두 쏟아부었습니다.” 로렌이 귀띔한 대로 쇼에는 그의 베스트 시그너처 아이콘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러플이 물결치는 가운에는 검은색 그물망을 부풀려 씌운 모자가 매치되었고, 하운드투스 체크 재킷, 승마용 베스트와 클래식한 팬츠로 차려입은 남자 모델이 뒤를 따랐다. 총 72개의 룩이 등장했다 사라졌고, 블랙 보타이를 맨 로렌이 감동적으로 런웨이 위에 등장했다. 이 순간,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고 프랭크 시나트라의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밤의 끝을 잡고 열린 가든 파티에는 4백명의 손님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별들의 고향, 할리우드에도 이보다 더 영화 같은 순간은 쉬이 오지 않을 것이며, 랄프 로
렌보다 더 영화같은 스토리도 없을 것이다.

에디터
안정아
브랜드
랄프로렌

SNS 공유하기